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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동관(童貫): 역사최고기록을 다수 가진 환관

by 중은우시 2012. 6. 2.

글: 유계흥(劉繼興)

 

1111년, 즉 송휘종 정화(政和) 원년, 대태감 동관은 조정의 군사대권을 장악한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추밀원을 지휘했다. 북송때 추밀원은 중서성(中書省)과 함께 이부(二府)로 나란히 불리웠다. 추밀사는 군대를 장악하고, 재상은 정치를 장악한다. 송사(宋史)에서는 "추밀원은 군국기무, 병방(兵防), 변비(邊備), 융마(戎馬)의 정령(政令), 출납밀명을 장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보좌한다." 추밀사는 조정의 최고군사장관이다. 이때부터, 동관은 전국의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며, 중국역사상 군권을 최대로 장악한 태감이 된다.

 

동관은 역사상 군권을 최대로 장악한 태감이었을 뿐아니라, 그는 또 다른 몇 가지 중국역사상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중국역사상 병권을 가장 오랫동안 장악한 태감(약20년), 중국역사상 최초로 외국에 사신으로 간 태감(부사의 신분으로 정화원년 요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왕에 책봉된 태감(연나라의 영토를 모조리 수복한 후, 광양군왕에 봉해짐);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환관(이것은 그가 20살이 되어서 환관이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북송말년, 송휘종은 서화예술에 관심을 쏟고 해야할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강이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조정은 '육적(六賊)'이 장악하였는데, 그들은 각각 채경(蔡京), 왕분(王), 동관, 양사성(梁師成), 주면(朱勔), 이언(李彦)이다. 채경과 동관은 그 유명한 '육적'의 영수급인물들이다. 당시 채경을 '공상'이라고 부르고, 동관을 '온상(相, 그가 환관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온은 할머니라는 뜻이다)', 이는 조롱하는 의미가 있다.

 

당시 도성 변량(梁)에는 이런 민요가 떠돌았다: "타파통(打破筒), 발료채(潑了菜), 편시인간호세계(便是人間好世界)". 여기서 '채(菜)'는 반복무상, 양면삼도, 유리시도(唯利是圖)의 채경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은 대태감 동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적'의 우두머리중 하나인 동관은 금나라와의 인랑입실(引狼入室)의 '해상지맹(海上之盟)'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정강지치를 초래한 대죄인이 된다. 그리하여 천여년동안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었다. <송사>에도 '간신'으로 분류되어 있다.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수호전>에서도 여러번 동관이 언급된다. 그를 80만대군을 거느리고 양산박으로 가서 송강의거군을 진압하다가 십면매복에 걸려, 겨우 몸만 빠져나와 변경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그렸다.

 

동관은 개봉 사람이고, 자는 도부(道夫)이다. 4년간 사숙에서 공부했고, 환관이 된 후 입궁하여 태감으로 된 것은 이미 스무살이 가까워서이다. <송사>에는 그가 "턱 아래 수염 열 가락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즉, 동환관의 턱은 다른 환관과 달랐다. 그의 턱에는 몇 가닥의 수염이 있었다. "신체는 건장하고, 용모는 잘 생겼다" "피골은 최와 같아서, 환관같지가 않았다."

 

동관이 입궁할 때, 고향사람이며 선배환관인 이헌(李憲)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헌은 전공을 세운 환관중에서 서북의 변방에서 감군으로 여러해동안 지낸 바 있다. 동관은 이헌을 따라 전선을 드나들며 십여차례 서북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래서 군사를 잘 알았다. 그러나 신종황제때, 운명의 신은 동관을 보살펴주지 않았다. 궁에 들어간지 이십여년동안, 그는 시종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 국면은 조길(송휘종)이 황제가 된 후에야 비로소 변화가 이루어진다.

 

송휘종 조길이 즉위할 때, 동관은 이미 48세였다. 송휘종은 내정공봉관(內廷供奉官)의 명의로 동관을 항주로 파견하여 명금국(明金局)을 설치하고 서화를 수집하게 시켰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내정공봉관은 대체로 황궁의 물자구매과장에 해당한다. 이것은 높은 직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콩고물이 많은 직위이다. 동관은 거기서 이익을 얻는데만 만족하지는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일을 잘 처리했다. 그리하여 송휘종의 환심을 산다.

 

송휘종은 동관을 서북감군으로 임명하여, 강족, 토번의 반란을 평정하게 시킨다. 송나라군대는 전선인 황천까지 갔는데, 마침 변량의 태을궁이 불에 탄다. 송휘종은 미신을 믿어, 이것이 패전의 징조라 보고, 급히 동관에게 밀령을 내린다. 출병을 하지 말라고. 동관은 그러나 담량이 컸다. 그는 황제의 밀명을 보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놓아둔다. 당시 송나라군대의 주장(총사령관)인 왕후(王厚)가 묻는다. "폐하가 무슨 성지를 내리셨습니까?" 동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한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보고 빨리 공을 세우라고 할 뿐입니다."

 

그 결과 송나라군대는 일거에 사천을 수복한다. 장병들이 기뻐날뛸 때, 동관은 축하연회에서 황제의 밀명을 내놓고, 장군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을 이를 보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은 멸문의 큰 죄이다. 군대를 이끌던 주장은 황공하여 그에게 왜 이렇게 했는지 물어본다. 동관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때는 사기가 올라 있을 때였는데, 이렇게 전투를 중지시키면, 이후 어떻게 다시 싸우겠습니까?" 주장이 묻는다. "그러면 패배하면 어떡할 생각이었습니까?" 동관이 말한다. "그것이 바로 당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지 않은 원인입니다. 패배하면, 당연히 나 한 사람이 죄를 받을 겁니다. 승리하면, 여러분들의 공입니다."

 

이때부터 동관은 서북군내에서 명망을 수립한다.

 

그후, 동관은 전쟁터를 누비며 자주 서북에 출몰하여, 서하와의 전투를 주재한다.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몇차례 승전을 이끈다. 서하국은 국력이 따르지 못하여 경제가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마지막에는 보상을 하고 사죄하겠다고 한다. 동관은 효과를 보았을 때 적절히 그칠 줄 알았다. 송휘종에게 보고하고, 송휘종은 육로대군의 진격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동관에게 태부(太傅)직을 내리고, 경국공에 봉한다.

 

나중에 다시 동관의 주재하에, 대송은 토번과 전투를 시작한다. 1년후, 송군은 하황지구의 토번부대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청해성 동남부, 황하이북지역을 지배한다. 이번 전투에서 송나라군대는 '강역을 3천여리나 늘였고, 이천칠백명의 수령을 항복시키고, 호구 70만을 늘였고, 전후에 걸쳐 6번 전투를 하고, 1만여 수급을 베었다." 송신종때의 고토를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동관은 희하, 난황, 진봉로경략안무제치사로 승진하고 서북변방의 최고사령관이 된다. 그후 동관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서북의 중요도시 적석군과 도주(洮州)를 수복한다.

 

송휘종은 동관을 더욱 인정한다. 1111년, 동관은 태위로 승진하고, 추밀원을 이끌며, 전국의 군권을 장악한다. 이때부터 동관은 삼공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선화2년 방랍의 의거후, 금방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듯이 남방의 송군은 궤멸한다. 송휘종은 동관을 보내어 강,회,형,절등로선무사로 파견하고, 담진으로 하여금 양절로제치사를 맡게 해서, 경성부근의 금군과 섬서육로의 번,한병 15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방랍의거는 실패하고 만다.

 

선화7년, 동관은 연나라의 영토 전역을 수복한 공으로 광양군왕에 오른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태원에 주둔하여 변방을 지킨다. 당시, 금나라는 이미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대거 남하하여 송나라를 침략한다. 동관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태원에서 변량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송흠종의 변경을 지키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송휘종을 따라 남순한다. 그리하여 대학사 진동등이 상소를 올려, 채경, 동관등 6명을 나라를 망친 육적으로 탄핵한다. 동관의 주요죄명은 "요,금나라와 원한을 맺고, 변방의 틈이 생기게 했다"는 것이다. 이때 송휘종은 황위를 물려주고, 송흠종이 등극한다. 동관은 총애를 잃는다. 정강원년, 즉 1126년, 그는 세 번이나 연속으로 강등된다.

 

1126년 7월, 동관은 길양군(지금의 해남 애현)으로 귀양간다. 조정은 동관의 십대죄를 물어, 감찰어사 장징으로 하여금 그를 처단하게 한다.

 

비록 동관이 귀양을 갔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용맹함과 힘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장징은 황명을 받아 동관을 참하여야 하지만, 쉽게 손을 쓰지 못한다. 장징은 그를 남웅주까지 쫓아가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동관'을 배알하게 한다. 거짓으로 황상이 차, 약물을 보내라고 했다고 하면서 동관으로 하여금 경성으로 돌아와 하북선무사를 맡도록 하려 하며, 다음 날 사신이 성지를 전할 것이라고 했다. 동관은 이를 믿었고, 수염을 만지며 웃음을 보인다. "역시 내가 없으면 안되겠지." 그리고 장징을 따라온 수행원만 남긴다. 다음 날 오전, 장징이 온다. 동관은 기뻐하며 나가서 맞이하고,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는다. 장징은 그 자리에서 조서를 읽어, 동관의 십대죄상을 문책한다. 동관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장징이 보내온 수행원의 칼에 머리가 날아갔다.

 

며칠 후, 감찰어사 장징 일행은 수필의 말ㅇ르 타고, 남웅주 아문을 출발하여, 목갑 하나를 가지고 떠난다. 그 안에는 동관의 수급이 들어있었다. 매관을 넘어 변경으로 질주했다. 구월 초칠일, 동관의 수급은 변량성에 높이 걸린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고, 소란스러웠다.

 

역사상 여러가지 '최고'의 기록을 세운 대태감은 이렇게 황천으로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