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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林彪)의 비행기추락: 유일한 여자시신은 섭군(葉群)이 아닌가?

by 중은우시 2012. 6. 22.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9월 13일은 임표가 죽은 지 36주년 되는 날이다(이 글은 2007년에 발표되었음). 그러나, 그 사건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슈에 대하여는 아직도 설이 분분하다. 비행기가 추락한 후, 탑승인원의 신분을 확인하는데 아주 힘이 들었다. 그중 여자시신 하나에는 피임약을 지니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섭군이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미국뉴스와 세계보도>의 1994년 1월 31일 오스트레일리아 기자인 Peter Hannam의 글에 따르면, 1971년 9월 13일 새벽 2시 30분경, 두카자원 단지더마는 몽골 동부의 바이르허에 가까운 형석광산의 폭약고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비행기가 추락할 때 꼬리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그 비행기가 추락한 곳까지(9마일 떨어진 곳)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 이 비행기의 날개에는 중국민항256호라는 글자가 있는 영국제 삼차극1E비행기는 이렇게 비행을 끝냈다.

 

경찰인 투바니 주미드는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중 하나이다. 그는 이 초원에 흩어진 잔해를 조사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세 곳에 큰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어디가 가장 먼저 불붙었는지는 문제이다. 나는 차에서 나와서, 두 세 걸음을 걸었는데,무슨 물건에 발이 걸렸다.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은 등을 하늘로 향한 남자시신이었다."

 

여명이 되자 무서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짝 타버린 8구의 남자시신과 1구의 여자시신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 큰 불은 그들의 옷을 거의 다 태웠다. 그저 권총갑과 허리띠만 남았다. 당시의 몽골 외교부 부부장인 두거서런진 어더비리거는 이렇게 회고한다: "비행기의 사람을 거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200마일 떨어진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날아와서 이들 시신을 관찰했다.

 

큰불이 꺼진 후 남은 개인 문건은 1개의 신분증이었다. 그것은 임표의 아들 임입과(林立果)의 신분증이었다. 이 증으로 사후에 그가 비행기에 탔음을 확인해주었다. 나머지 8구의 시신은 신분을 확인할 단서가 없었다. 비행기의 글자, 모주석의 상장(像章), 비행노트 및 기타 문건으로 이 비행기 및 그 승객은 모두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현임 몽골민주의회의원인 근덩산부진 주나이는 사고현장에서 첫번째 의료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말했다: "현장에 있던 의료전문가로서, 나는 연령이 50세가 넘는 사람은 없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주나이는 동시에 유일한 여성시신은 아주 젊었고 임표의 50세된 부인 섭군일 수는 없다고 했다.

 

한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이렇게 피터에게 말했다. 그는 임표가 그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는 주장에 의문이 있다. 당시 그는 몽골외교부에서 영어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깊은 밤에, 낯선 사람의 전화를 받고 깼다. 10분후 차량 하나가 그를 안전부로 데려갔다. 그리고 작은 방에 갇혔다. 한 사람이 그에게 영문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에게 즉시 몽골어로 번역하라고 지시한다. 종이를 보고 그는 아주 놀랐다. 이것은 피임약설명서였던 것이다. 위에 쓰여진 것은 약효와 복용방법이었다. 번역문을 보고, 안전부의 사람은 웃었다. 사후에 그들은 그에게 말해주었다. 피임약은 그 여자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고.

 

상식으로 보면, 섭군은 이미 피임약을 사용할 연령을 넘어섰다. 이 여자는 섭군이 아닐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면 임표가 비행기에 타고 있었는지도 큰 의문이 든다.

 

다만, 1971년 임표이 아들 임입과와 약혼한 장녕(張寧)은 임표 일가가 확실히 그 비행기를 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피터가 장녕에게 물었다. 섭군은 폐경기가 되었는지. 장녕은 이에 대하여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한 다음 분명하게 섭군은 확실히 임신능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북대하에서 임표는 모택동이 남방을 순시할 때의 비밀강화내용을 듣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루는 그가 평소와 달리 섭군의 침실로 갔다. 다음 날, 섭군은 급히 의사를 찾아서, 이로 인하여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의사가 검사를 하고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피터는 장녕에게 말한다. 추락한 비행기현장에 있던 여자시신의 주머니에서 피임약이 발견되었다고. 그리고 그의 의문을 얘기한다: "섭군이 자주 피임약을 복용했는가?"

 

장녕은 말한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몸을 아주 아꼈는데, 피임약의 부작용을 겁냈다. 그러나 임입과는 때때로 피임약을 가지고 다녔다. 아마도 그가 피임약을 섭군의 주머니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장녕은 1971년 9월 12일 마지막 몇시간동안 임표의 별장에서 발생한 일을 얘기했다.

 

그날, 일가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임표는 수면제를 먹고, 방으로 가서 잠들었다. 임입과가 돌연 돌아왔다. 섭군을 다른 방으로 불러서 밀담을 한다. 그후 섭군은 사람들에게 선포한다. "준비를 해라. 내일 아침 7시에 비행기를 타고 광주로 간다.' 섭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임표의 딸 임두두는 급히 경위부대에 전화를 걸고, 북경에 소식을 전한다. 11시, 주은래가 전화를 걸어와서 묻는다. 섭군은 전화로 10여분간 얘기한다. 아주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 그녀는 결정을 바꾼다. 사람들에게 즉시 출발하라고 한다. 임두두는 떠나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임입과는 막 잠이 든 장녕을 부르지 않고, 몇몇 심복만을 데리고 갔다. 섭군과 함께 아직 정신이 다 들지 않은 임표도 자동차를 탔다. 그리고 차를 몰고 산해관공항으로 향했다.

 

섭군의 기사는 나중에 장녕에게 말한다. 황급히 가는 중에 임표등은 비행기에서 내려준 줄사다리를 기어올라서 비행기를 탔다고. 임표는 아주 약했다. 아래에서 사람이 그를 어깨에 올리고, 위에서는 섭군이 힘을 다해서 끌어당겨서 비로소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처음에 동남방향으로 날아간다. 20분후 다시 방향을 꺽어서 되돌아와 비행장에서 몇 바퀴를 돈다. 그 후에 북으로 날아갔다. 피터는 몽골과 러시아에서 임표의 비행기추락사건을 조사했다.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해준다. 사고난 비행기가 처음에 몽골경내로 들어왔을 때, 계속 북으로 소련-몽골국경선을 향했다. 그런데 다시 되돌려서 남쪽으로 200킬로미터 가량을 비행하고, 그 후에 온도이한(溫都爾汗)에서 추락한다. 그 이유는 시종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임표일가가 확실히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