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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집단 후손의 현황

by 중은우시 2012. 3. 2.

글: 종견(鍾堅)

 

 

 

1971년 임표(林彪, 린바오)는 몽골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임표의 적계, 수행인원과 관련인원은 신속히 숙청된다. 대다수의 정치운명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는다. 그후 40년간, 부친대의 생사부침은 후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임표의 적계혈맥, 그의 수행인원, 부하의 자녀들도 구름위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9.13"사건이후, 마오자완(毛家灣)의 임표판공실 업무인원, 임입과(林立果)의 여자친구 장녕(張寧)등은 북경 아주청년요양원으로 압송되오 조사를 받는다. 배신자인 임두두(林豆豆, 林立衡)은 혁명진영에 투항한 공신으로서, 한때 조직의 관대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비림비공(非林非孔)"운동이 시작된 후, 임두두는 충격을 받고, 몇번이나 자살하고자 했으나 미수에 그친다.

 

1974년 7월 31일, 모택동은 임두두의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는다. 그리고 친필지시를 내린다. "임입형에 대한 감호를 해제하라. 그녀가 미혼부 장운림(張雲林)과 왕래하도록 윤허한다. 그녀는 반당분자와 구별해야 한다." 공군 조직부서는 이 지시에 따라, 임두두, 장운림이 즉시 결혼하도록 비준한다. 만일 두 사람이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임두두는 카이펑(開封)으로 가고, 장운림은 넌장(嫩江)으로 보내어지고,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임두두, 장운림은 결혼하고, 함께 카이펑의 공군 모농장으로 갔고, 1년후, 공군은 다시 임두두를 정저우(鄭州)로 보낸다.

 

"두두의 교제범위는 매우 넓었다. 그녀와 내왕한 것은 일부 노장군과 원수의 자식들이었다." 공군 정치부의 전 문예처 부처장 관위훈(官偉勳)은 1970년대에 마오자완에서 일찌기 섭군(葉群)에게 개인교습을 한 바 있다. 임두두와도 몇번 만난 인연이 있다. 임두두는 북경으로 와서 이동에 대하여 활동할 때, 중앙조직부 초대소에 머물렀다. 이곳은 관위훈의 집에서 아주 가까워서, 임두두는 특별히 관위훈의 집으로 가서 부친과 함께 연루된 옛 부하들을 만난다. 두 집안은 이때부터 좋은 친구사이가 된다.

 

관위훈은 지금 벌써 80세이다. 관위훈의 배우자는 임두두가 이전에는 매년 몇번 찾아왔었다고 말한다. 임두두는 북경 동쪽에 살았고, 관위훈의 집은 서북쪽에 있다. 북경성을 절반은 가로질러야 한다. 임두두와 관위훈이 얘기하는 것은 모두 과거 공군의 일부 상황이다. 예를 들어, 어느 동지가 아직 건재한지, 그들의 상황은 어떤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드물었다. 관씨집안사람들도 묻기가 쉽지 않았다.

 

북경에서 임두두와 가까운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1981년, 임두두 부부가 막 북경으로 되돌아왔을 때, 집안에 주로 머물고 외출은 자제했다. 많은 친구들도 감히 그녀를 보러가지 못했다. 다시 연루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후에 형세가 바뀌어, 옛친구들과 자주 오간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임두두에게 일을 부탁하곤 한다.

 

임두두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백부가 있다. '9.13'후 일가가 연루되어서 모두 안휘 농촌으로 보내어졌다. 나의 조카 한 명도 거기에 있다. 중앙조직부는 잘 도와준다. 그를 북경으로 데려오는데 동의했다." 장운림에게도 동생이 있는데, 역시 연루되었다. 나중에 원 직장으로 가기를 원해서, 임두두를 찾아간다. 임두두는 한 중앙의 원로에게 서신을 쓴다. 비록 '9.13'후 한번도 그 원로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는 임두두의 서신을 받은 이틀 후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임두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임두두의 "약세외교(弱勢外交)"라고 말한다. "그녀의 신세는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처지를 동정한다." 부친 임표의 옛날 부하와 임표의 전우의 아들중 일부는 고위직에 있다. 그들은 기꺼이 그녀를 도와서 일처리를 해준다. 북경의 권내에 임두두의 "약세외교"는 아주 잘 통한다. 그녀가 부탁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준다. 그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을 만나지 않는다. 특히 매체기자는 겁낸다.

 

근대사연구소에서 은퇴한 후, 임두두는 각종 사회활동에 주력한다. 그녀는 호북혁명노구부빈회의 회원이고, 북경의 한 저능아동학교의 명예교장이며, 고향인 황강(黃岡) 사람의 부탁을 받아, 그녀는 자주 고향의 일부 공익사업을 위하여 뛰어다니곤 한다.

 

임표 후손중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은 임표와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녀 임효림(林曉霖)이 있다. 대륙에서 출판된 <합군공전(哈軍工傳)>의 작가인 등서연()은 임효림을 인터뷰한 바 있다. 임효림은 부친 임표와 계모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당시 합군공에서 공부할 때, 섭군이 핑계를 찾아 그녀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가 부친 임표와 만나는 것을 제지했다.

 

임효림이 여전히 군중조직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 섭군은 밈표의 명의로 임효림과의 부녀관계를 단절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임효림도 임표에게 서신을 써서 다시는 임씨성을 쓰지 않겠다는 서신을 보낸다. 그후 윈난 다리로 보내어 개조된다. 1971년 "9.13"사건발생후, 간부는 임효림 부부를 찾아가서 얘기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문제를 자백하고, 임표반당집단의 범죄를 고발하라고 말한다. 당시 어떤 사람은 그녀의 아들 얼굴에 "임적지손(林賊之孫)"이라는 글자를 쓰기도 했다.

 

이에 임효림은 분노해 마지 않는다. 부친의 연루로, 그녀는 꼬박 4년간 조사를 받는다. '문혁'이 끝날 때까지 그랬다. 이때의 임효림은 이미 두 아들의 어머니였다. 일가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국방과학위의 과기정보연구소에서 일했다.

 

2007년, 광동 "8.1"남창의거군 삼하패 기면활동과 기타 일부 경우에 임효림은 매체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녀는 "부친에게 박해받은 사람들에게 사죄한다"고 말하여 그 자리에서 소동이 일어난다.

 

임효림을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최근 들어 그녀는 모두 사죄한다. 그녀는 유소기, 나서경, 팽덕회등 노홍군의 자녀들에게 사죄했고, 심지어 임표사건에 연루된 부하의 자녀후손들에게도 사죄했다.

 

임효림의 일부 사죄행위는 대륙의 네티즌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인들이 보기에는 용인할 수 없었다. '일처리에 원칙이 없는" 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1980년대에 관계가 밀접했던 임씨자매는 나중에 일부 사항에 대한 인식차이로,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 이 동부이모의 자매는 같이 베이징에 살면서, 평소에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다.

 

40년동안, 황영승(黃永勝), 오법헌(吳法憲), 이작붕(李作鵬), 구회작(邱會作)의 4명은 이미 차례로 사망했다. 그들의 부인중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구회작의 부인인 호민(胡敏)뿐이다.  인터뷰과정에서, 기자는 2011년 1월 홍콩에서 출판된 <구회작회고록>에 호민이 서명한 상,하책이 있었다. 서명한 글자는 분명했으나 약간 떨렸다.

 

황,오,이,구의 2대는 이미 대부분 은퇴했다. 가장 어린 사람도 1959년생이다. 3대중 많은 사람들은 다국적기업의 고급 화이트 칼라이다. 어떤 사람은 온 가족이 이민을 갔다. 도시의 보통민중의 가정과 비교하면, 임표집단의 후손은 기본적으로 먹고사는데는 걱정이 없다. 그저 일찌기 정치투쟁에서 패배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대부분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황영승의 장남 황춘광(黃春光)은 네 가족의 대체적인 상황을 소개했다. 그중 황영승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황춘광이 장남이다. 그리고, 황춘명(黃春明), 황춘요(黃春耀), 황춘의(黃春義) 삼형제가 있다. 첫째, 셋째는 간부전업했고, 둘째, 넷째는 복원했다가 나중에 정책조정으로 전업대우로 바뀐다. '복원'은 노동자신분이고, '전업'은 간부신분이다. 황씨 2대의 네 아들은 차례로 사업에 종사한다.

 

둘째와 넷째의 자손들은 각각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이민갔다. 셋째 황춘요는 나중에 황정(黃正)으로 개명하며, 2010년 10월 홍콩에서 출판된 <군인영승>의 작자이다. 황씨 3대는 대부분 회사의 화이트 칼라이거나 고위경영진이다.

 

오법헌은 1남 4녀를 두었다. 오신조(吳新潮)가 장남이다. 나머지는 모두 딸이다. 오신조는 산동의 한 대학에서 은퇴했다. 셋째는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고, '문혁'역사연구에 종사한다. 오씨집안의 몇 딸들은 모두 국유기업의 기술자이거나 의사였다. 넷째 딸은 모두 사업을 하고 있다.

 

이작붕은 다섯 자녀를 두었다. 모조리 국유기업에서 일한다. 그중 장남 이빙천(李氷天)은 선양의 한 병원에서 원장으로 있다. 사위는 미술을 배웠는데, "경영두뇌가 있어, 사업을 성공시켰다."

 

구회작은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구로광(邱路光), 차남 구승광(邱承光), 셋째 구광광(邱光光), 넷째 구소광(邱小光). 구로광은 원래 경영대학원의 교수였는데,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다. 셋째도 사업을 한다. 넷째는 석가장의 한 국영자동차제조공장에서 은퇴했다. 딸 구소경(邱小京)은 부친대의 한 전우이며 개국소장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구씨집안의 둘째아들인 구승광은 홍콩에서 <심령의 대화>라는 책을 출판한다. 그와 부친의 대화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 책은 황씨집안의 불만을 부른다. "내가 아는 바로는 호아주머니(구회작의 부인 호민)는 일찌기 이런 대화가 없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많은 것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책에서 많은 부분은 내 부친을 모멸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 형제는 모두 극히 분노한다." 황춘광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