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 고향의 부침

중은우시 2009. 10. 17. 01:56

글: 웅응(熊鷹)

 

"9.13"사건의 발생은 중국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아니라, 임표고향인 호북성 황강시(黃岡市) 임가대만(林家大)도 흥성과 몰락, 영과 욕의 역사적 시험을 겪었다.

 

임가대만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모두 합쳐봐야 십여호가 산다. 장강의 가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으며, 여러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1907년 12월 7일, 임표는 바로 이 풍경이 수려한 작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물결이 일다

 

1960년대 중반, 임표의 '휘황'한 성공과 더불어, 임가대만은 졸지에 유명해졌다. 많은 인민들이 참배하는 성지가 된다.

 

당시 만인참배의 임가대만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임표의 옛집은 1938년에 일본인들에게 불태워져서, 겨우 건물기초와 담장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마을로 들어가는 공로도 없었다. 참관할래야 집이 없었으니,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형편없었고, 쓸쓸했다.

 

사방팔방에서 몰려오는 '혁명군중'과 '혁명소장'의 참관을 맞이하기 위하여, 당시 홍위공사와 회룡산구의 지도자들은 군중들의 요구에 따라, 적극적으로 현정부에 보고한다. 현정부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혁명장악,생산촉진지휘부는 그 보고를 받은 후에 임가대만의 기본건설을 중시해야한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현에서 4.4만위안을 내놓는다. 임가대만에는 '홍위병접대소"와 "임부주석고향관리처"가 설립된다. 그리고 간부들이 파견나와서 친히 이를 지휘감독했다.

 

1967년 봄, 임표의 고향은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된다. 대문에는 "임부주석구거(林副主席舊居)"라는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의 패가 걸린다. 그리고, 방안에는 임표와 가족들의 역사사진과 자료가 걸린다. 동시에 임가대만의 일부 노인들에 따르면, 특별히 단풍원목사와 황주방직창이 복원제작한 임표부모가 옛날에 사용하던 목상(木床), 답판(踏板), 등자(凳子), 방선거(紡線車), 직포기(織布機)와 임표침실의 탁자, 의자, 모기장, 상(床)과 찰화피(花被)들이 역사문물로 임표고거에 전시되어 일반인들이 참관할 수 있었다. 임표가 산을 넘어 학교를 다니든 좁은 길과 팔두오준신학당도 각각 길표지, 기념패와 기념비가 서서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게 했다.

 

참배하러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임가대만의 교통이 큰 문제로 떠오른다. 탕사공로에서 임가대만으로 들어오는 300여미터의 좁은 길은 중간에 작은 언덕이 가로막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걸어가야 했고, 차를 타고 갈 수가 없었다. 드나드는 것이 아주 불편했다. 반드시 횡재만(橫在)의 작은 언덕을 없애야만했다.

 

1967년 8월, 접대소 책임자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황주에서 동방홍 불도저와 폭약을 가져온다. 그리고 임가대만의 일부 노동력을 동원해서 작은 언덕을 파버린다. 참관하러 온 군중, 홍위병과, 군인들도 속속 자원하여 노동에 참가한다. 반개월도 되지 않다. 대대로 임가대만의 앞에 놓여 있던 작은 언덕이 광활한 광장으로 변모한다. 현에서는 자금을 내놓아 새로 만든 광장에 무대를 건설한다. 그리고 발전기, 확성기를 설치하고, 전등, 가로등과 전화까지 가설한다. 무한TV방송국은 12인치 흑백TV를 보내온다. 그리고 산촌 주위에는 설송, 취백, 천년왜등 풍경림을 조성한다. 문앞의 청수당(淸水塘)의 가에는 돌로 둑을 쌓는다. 마을의 곳곳에는 표어가 붙고, 벽에는 '홍어록(紅語錄)'을 써놓는다.

 

단기간의 돌격식 설계와 정교한 '포장'으로 순박한 농촌이었던 임가대만은 전체 마을이 졸지에 홍색의 해양으로 변모하고, 혁명의 모범으로 변모한다.

 

물결이 올라가다

 

임표의 '신성한 광환(光環)'에 둘러싸여, 백양산은 홍색의 산이 되고, 임가대만의 사람들은 혁명의 사람이 된다. 이를 위하여 여러가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당시 대대민병연장을 맡고 있던 임정국은 임가대만에서 출생했고, 임표와는 먼 친척조카뻘이 된다. 사람이 후덕했는데, 서른이 되도록 노총각으로 지내고 있었다. 황강군분부 주임가대만 공작대의 관병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밤을 새워 긴급회의를 소집해서 그의 혼인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한다. 그리고 임정국의 배우자를 찾아주는 것이 임부통수(林副統帥)에 충성하는 구체적이고 중요한 정치적 임무가 된다.

 

어느날 오후, 그들은 돌연 '참배'하는 무리들 중에 한 아가씨가 미목이 청수하고, 예뻤다. 가서 물어보니 그녀의 이름은 방란영(方蘭英)이고, 황석시에 있는 면직공장의 노동자였다. 중학교 졸업학력에 아직 미혼이었다. 공작대의 왕대장은 기뻐하며 친히 나서서 중매를 선다. 상대방을 부대의 대장이 보증하였다. 그러니 분명히 사상적으로 문제가 없고, 정치적으로 믿을만 할 것이며, 게다가 해방군의 연장이기도 하며, 임표와 먼 친척이 된다니 방란영은 바로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동방화촉의 밤이 왔다. 신부가 남편이 해방군 연장(連長)이 아니라, 민병 연장임을 알고는 후회막급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방아가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대장을 찾아가서 따졌다. 나중에 부대의 관병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설득하였고, 게다가 생쌀이 익어 밥이 된 상태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원망을 하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

 

임정국은 1989년에 사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그 엉터리없는 결혼을 얘기할 때마다 포복절도하곤 한다.

 

물결이 솟다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은 전인민에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전개하는데 관한 통지>>(약칭 5.16통지)를 반포한다. <<5.16통지>>발표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 정, 군이 삼위일체가 된 황강지구혁명위원회는 1967년 5월 16일 임가대만의 마을앞광장에서 커다란 영수화상을 다시 만들어, 부통수에 대한 충성과 그의 고향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로 한다.

 

준비요원들의 2개월여에 걸친 노력으로, 8500개의 붉은벽돌, 4통의 시멘트로 기단을 쌓고, 높이 8.5미터, 너비 4.6미터의 거상이 마침내 임가대만 중앙광장에 들어선다. 화상의 정면은 모택동의 모습이었다. 손을 흔들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임표는 손에 어록을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모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그 전체 설계는 장관이었다. 낮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사방에서 강한 빛과 등이 비추게 되면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몰래 귀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 그림에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유화를 그리기 위한 포(布)를 연결시켜 꿰맸는데, 마침 임표의 머리와 온몸의 중간을 가르는 것이었다. 마치 칼로 자르거나 도끼로 내려친 것과 같이 보였다.

 

5월 19일, 관리처 책임자인 웅사조와 위후현 두 사람이 친히 나서서, 무한호북미술학원에서 두 노교수를 초청해온다. 그리고 다시 그린 거상은 포와 포 사이에 이은 자국을 피했을 뿐아니라, 화상이 더욱 견고하고 내구성을 가지게 만들었다. 거상이 완성된 후, 임가대만은 더욱 휘황해보였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최고조에 달했던 1967년에는 매일 만여명씩이 왔다. 개략적인 통계로 1966년에서 1971년 6월까지, 임가대만에 가서 참관하고 참배한 노동자, 농민, 학생과 해방군은 근 800만에 이른다.

 

물결이 가라앉다.

 

1971년 10월 15일 새벽,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이 조용한 산촌을 깨웠다. 사람들이 문을 열자 평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차에서 뛰어내린 10여명은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지방간부도 있었다. 즉시 전 임가대만의 사람들에게 신전만소학교로 와서 회의에 참석하라고 통지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촌민들은 돌연 시커먼 총구와 차가운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중공중앙 1971년 68호 문건 즉, 임표가 1971년 9월 13일 반란을 일으켜 도암가려다 실패하여 사막에서 죽었고, 몽고 원두르한의 사막에 묻혔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회의에서는 몇 가지 금지사항을 전달한다. (임가대만은 상황이 특수하므로 다른 곳보다 문건이 먼저 전달되었다.)

 

거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첫번째 큰 일이었다. 화상은 임표와 모택동 주석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므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어려운 문제였다. 1달후, 상부에서는 할 수 없이 부대를 보내어, 폭약으로 이 강철과 시멘트로 쌓은 거상을 폭파시킨다.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폭발음을 지금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임부주석구거'라는 편액도 부숴버린다. 대문도 철거되고, 접대소도 없어진다. 발전기, TV, 확성기와 실내전시품도 모조리 옮겨간다. 만들어지지 얼마되지 않은 나무들까지 뿌리째 뽑혀버린다. 그 후에 임표구거는 즉시 철거하라고 요구한다.

 

1974년, '비림비공'운동이 전국을 석권한다. 2년동안 조용했던 임가대만에는 다시 한번 바람이 분다. 각지에서 성토대군이 계속하여 이 곳으로 밀려들어왔다. 임가대만의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임적(林賊)'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네를 떠나버린다. 임가대만대도 이름을 백양대대(白羊大隊)로 바꿔버린다. '문혁'후의 1979년에야 원래의 이름인 임가대만촌으로 회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