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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한비자의 죽음과 임표의 죽음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larryguo 

 

한비자와 임표는 모두 비명에 죽었다. 그 연유를 따져보면 닮은 점이 아주 많다.

한비자는 전국말기의 저명한 학자이다. 진시황이 한비자의 책을 읽고 '천인(天人)'이라고 감탄한다. 나중에 한비자를 불러들인 다음에 얘기를 나눠보고는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결국 한비자는 진나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기에 따르면, 이사는 진시황에게 한비자를 하옥하도록 건의했고, 독약을 보내어 한비자로 하여금 자살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진시황의 뜻이 없었다면, 이사가 감히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인들은 한비자가 이사에게 죽었다는 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청나라학자 매증량은 한비자가 <세난(說難)>을 쓴 것이 해를 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진시황이다.

<세난>은 한비자의 득의의 작품이다. 이 글은 고대의 유세가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어떻게 군왕의 심리와 객관적 형세를 파악하여 계책을 기획하고 내놓을지 그리고 군왕의 중용을 받을지에 관한 것이다.

<세난>의 내용중 정수를 살펴보자:

"군주가 표면적으로 이 일을 하고자 할 때 ,마음 속으로는 이를 빌어 다른 일을 이루려고 한다. 이때 진언하는 자는 군주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알아야 할 뿐아니라, 그가 이렇게 하려는 의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진언하는 자는 한 가지 평범하지 않으나 군주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기획할 때, 총명한 자라면 외부의 흔적으로 이 일을 추측해내야 한다. 일이 누설되면, 군주는 반드시 진언을 한 자가 누설했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그렇게 하면 위험이 따르게 된다." 

"군주가 형편없는 생각을 하지만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할 때, 유세하는 자는 그것을 아름다운 일로 포장하면서, 그가 왜 그 일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야 한다. 군주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달성할 수 없는 일인 경우, 진언하는 자는 그를 위하여 이 일의 결점과 그 일의 나쁜 점을 드러낸 다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점을 칭찬해야 한다. 군주는 스스로의 지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진언하는 자는 그에게 여러가지 다른 일에서의 유사한 상황들을 얘기해서 그에게 근거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내가 한 말 중에서 방법을 찾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 가장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가 스스로의 총명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 진언하는 자는 군주에게 별 것이 아닌 일을 건의하더라도, 반드시 멋진 명분으로 포장해야 한다..."

 

<세난>의 마지막 말은 더더욱 천하의 군주들이 보면 뜨끔할 내용이다:

"용은 일종의 동물이다. 길들이면 놀리면서 탈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목의 아래에는 1척 길이의 역린(逆鱗)이 있다. 만일 누군가 그것을 건드린다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진언하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

 

원래 한비자의 술법은 제왕을 손바닥에 놓고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총명한 인물이니, 진시황이 결국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

 

임표는 지모가 뛰어나지만 성격이 괴이하여, 중공역사상 독특한 인물이다. 전반생은 군사로 전투에 종사했고, 전공이 탁월했으며, 성공한 군사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후반생은 정계에서 각축하며 군주의 뜻을 잘 헤아리고 그에 맞추었다. 그러나 지나쳐서 완화자분(玩火自焚)했다. 실패한 정치가로서 비명에 죽고 역사책에 이름을 올린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된 후, 임표는 전쟁에서 쌓은 지혜를 중공정계내부투쟁에 쏟는다. 특히 모택동이라는 군왕의 의도를 잘 헤아려, 대응했고, 매번 성공을 거둔다.

 

임표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3번에 걸쳐 모택동을 구해준 걸작이다:

첫째, 1959년 여산회의에서 모택동이 팽덕회를 비판한다. 당시 당내에는 팽덕회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택동은 임표를 구원병으로 나서게 한다. 임표는 과연 모택동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시작부터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중국에서, 오로지 모주석이 대영웅이다. 누구도 영웅이 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어서, 임표는 일거에 팽덕회에게 5가지 죄를 덮어씌운다. "이번에는 초병매마(招兵買馬)했다. 야심가이고, 음모가이고, 위군자이고, 풍옥상(馮玉祥)과 같은 류의 인물이다."

십대원수중에 전공으로 볼 때, 팽덕회, 임표 두 사람이 가장 크다. 모택옹이 공로가 큰 팽덕회를 쓰러뜨리려면 임표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1963년 칠천인대회이다. 삼년대기근으로 당내의 고위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택동을 직접 겨냥해서 비판했다. 모택동도 부득이 스스로 자책해야 한다. 이때 임표의 말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삼면홍기는 중국혁명발전중이 창조이다. 인민의 창조이고, 당의 창조이다. 현재 나타난 이런 곤란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 우리가 모주석의 지시, 모주석의 경고, 모주석의 사상을 따라서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인한 것이다. 모주석의 사상은 항상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의 동지는 모주석의 사상을 잘 체득하지 못했다." 임표는 삼년간 천만이상이 아사한 사고를 가볍게 말했다. 이것은 학비를 낸 것이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삼면홍기는 모택동의 실패작이다. 삼천만이 굶어죽고, 모택동이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표의 이런 말은 모택동을 위하여 강변한 측면이 강하다. 여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는다. 모택동은 그러나 속으로 기뻐했다. 즉시 임표의 말을 인쇄하여 뿌리게 한다.

 

셋째, 1966년 5월 18일, 중공정치국확대회의상에서의 일이다. 임표는 모택동을 추켜세우며 문혁의 길을 열어주는 외에, 정변에 관한 말을 한다: "정변은 현재 일종의 기풍이다. 세계에서 정변이 이미 유행이 되었다." "반혁명정변은 대부분 궁중정변이다. 내부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는 그리고 무수한 고금중외의 정변사례를 언급한다. 부자상잔, 형제상살, 어떻게 해야 음모가 성공하는지.

임표는 그리고 특별히 모택동이 정변을 방지한 일을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모주석이 최근 몇 개월, 특별히 반혁명정변에 주의했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나서경문제가 발생한 후, 이 문제를 얘기했다. 이번에 팽진문제가 발생한 후, 모주석은 사람을 찾아서 이 문제를 얘기한다. 병력을 움직여, 반혁명정변을 방지하고, 그들이 우리의 급소부위, TV방송국, 라디오방송국을 점령하는 것을 방지하여야 한다. 군대와 공안계통에도 모두 배치했다. 모주석은 요 몇개월간 이런 일을 했다."

 

임표는 정변의 모자를 아무런 병권도 가지지 못한 유소기에게 덮어씌운다. 여러해후, 이 말은 임표 자신이 정변을 도모한 청사진으로 열거된다.

 

임표의 3번에 걸친 도움에 모택동은 감격한다. 임표의 당내지위는 계속 올라간다. 문혁때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올라선다. 그리고 파천황적으로 당장에까지 기재된다.

임표는 고서를 좋아했다. 그가 한비자의 <설난>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따. 그러나 그는 용을 다루는 기술을 연마했고, 한비자와 서로 짠 듯이 들어맞았다.

임표의 필기에 나오는 모택동에 대한 심득을 보자:

"그는 먼저 '너의' 의견을 날조하고 그 후에 그가 너의 의견을 반박한다. 날조는 노동(老東, 모택동을 가리킴)의 관용수법이다. 금후 그이 이 수법을 주의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그이 모든 창거, 공적을 주도적으로 지적해라. 그가 스스로 드러낼 필요가 없도록."

"네가 먼저 동(東)을 말하면 그는 굳이 서(西)를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먼저 들은 후에 하면 일치할 수 있다."

"그는 자아숭배, 자아미신이 있고, 자신을 숭배한다. 공은 자신의 것이고 과는 남의 것이다."

"'좌'경의 자태를 높이 견지하라"

"추세를 보아가며 앞으로 나가라.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속담에 '옛 수법은 다시 써도 통한다'는 말이 있다. 임표가 군왕을 대하는 것은 계속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 말한 '반정변'의 말은 속셈을 드러낸 셈이다. 모택동은 고서를 좋아했고, 권모술수를 좋아했다. 임표의 정변에 관한 말에서 아마도 <설난>의 말을 연상했을 것이고, 마음 속으로 불쾌했을 것이다.

모택동은 1966년 7월 8일 강청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친구의 말을 중앙에서 발송하라고 재촉하고, 나는 발송하는데동의하려고 준비한다. 그는 정변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말했는데. 이 문제는 그처럼 말하는 것이 종전에 없었다. 그의 일부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또 말했다: "귀신을 쫓기 위하여 종규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이십세이 육십년대에 공산당의 종규가 되었다."

모택동은 왜 임표의 정변방지책에 대하여 불안을 느꼈다고 하였을까? 왜 종규를 꺼냈을까?

기실, 문혁전날, 모택동은 확실히 군사정변을 걱정했다. 일찌기 자신의 심복군대를 북경지역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게 조치했다. 임표는 국방부장은 당연히 잘 알았다. 그러나, 임표의 이번 정변에 관한 담화는 모택동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정변을 방지하는 일은 군왕의 천기이다. 모주석은 이 일을 얘기하는 것을 꺼렸다. 임표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말해버렸다. 그것이 바로 모택동이 불안해하게 된 하나이다.

문혁은 실제로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다. 모택동은 온유한 장막으로 가릴 필요가 있었다. 그냥 이데올로기분야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문화혁명이라고 말해야 했다. 임표의 정변을 방지해야한다는 말은 권력투쟁임을 밝힌 것이다. 살기등등하고 너무나 적나라하다. 이것이 바로 모택동이 불안해한 두 번째이다.

 

모주석은 자신을 종규라고 말했고, 임표등은 귀신을 잡기 위하여 종규를 빌어왔다고 했다. 이것은 확실히 흑백이 전도된 것이다. 임표는 문혁전에 서열 6위였다. 유소기가 서열 2위이고, 등소평이 서열 5위였다. 그리고 이들이 대권을 장악했다. 유소기 등소평이라는 두 '귀신'을 타도하는 것은 서열 1위인 모택동이지, 절대로 임표가 아니다. 모택동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문혁발동의 책임을 임표등에게 미루는 것이다. 마치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핍상양산(逼上梁山)한 것처럼 얘기한 거시다. 그래서 그는 이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할 수 없이 양산에 오르게 되었다."

 

모택동의 이 서신은 말이 궤이하고, 뜻이 애매하다. 후세학자들 사이에서도 설이 분분하다.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른다. 기실 이 서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임표이다. 임표는 사후에 모택동이 그의 정변설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크게 긴장한다. 이번 정변설은 모주석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모주석과 임표의 관계가 이후에 악화되는데 화근이 된다.

당연히 모택동이 이 서신을 쓸 때, 임표에 대하여 아직도 신뢰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의 9대에서 그를 후계자로 정했을 리가 없다. 다만, 모택동은 임표가 마음을 잘 살피는데 대하여 약간의 거리낌은 이미 있었다.

 

청나라 학자 매증량은 <한비론>에서 이렇게 썼다: "핸재의 군주는 현명하고 지혜있건 아니면 멍청하든 모두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기 원하지 않는다. 사물을 추측해서 알기를 원하지 사물에 측정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만일 군주가 누군가 가볍게 자신을 조종한다고 여기면, 그리고 자신이 그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설사 좌우에서 간신이 진언하여 모함하지 않더라도, 군주는 단 하루도 그의 존재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시황은 한비자가 자신을 조종하고, 자신의 뜻을 헤아리는 것을 용인하지 못했고, 결국 한비자를 제거한다.

 

모택동도 마찬가지로, 임표가 자신을 조종하고 자신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임표가 국가주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죄로 삼아서 한걸음 한걸음 죽음으로 몰고갔다.

모택동과 임표가 마지막으로 서로 등을 진 것은 강청에게 서신을 보낸지 4년후인 1970년 여산회의이다. 그중의 원인은 많고 복잡하다. 그러나 임표의 아부를 잘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일처리방식이 분명히 중요한 요소이다.

모택동은 문혁전 그리고 문혁기간동안 임표의 손을 빌어 개인숭배를 한다. 문혁초기 임표는 전국에서 선전한다. 모택동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위대한 영수이며, 위대한 통수이고, 위대한 조타수이다." 모택동이 천안문의 성루 위에 서서, 만민들이 4대위대를 외치는 것을 들을 때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1970년 모택동이 미국인 에드가 스노우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4대위대, 짜증난다." 이 때의 모택동은 이미 임표가 자신을 손바닥 안에 놓고 놀려는 사람인 것을 알아차렸다. 임표의 아부전술은 갈수록 모택동을 역겹게 했다. 나아가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후계자를 제거하려고 생각한다. 1970년 여산회의에서, 모택동은 국가주석을 둘 것인지 말 것인지의 건을 놓고 함정을 파놓는다. 임표는 이 일에서 진퇴를 잘못처리하여 '반당'의 대죄를 얻는다. 기실 임표가 동의했건 아니건, 모택동은 임표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었다. 관건은 모택동이 일찌감치 임표라는 후계자를 타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종적으로 모택동과 임표를 원수지간으로 만든다. 임표는 두 손을 묶고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고 싶어했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매증량은 생각했다. 만일 한비자가 <세난>을 쓴 것이 공성명취(功成名就) 이후이거나 혹은 그 본인이 세상 일에 흥미를 두지 않았을 때라면 아마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비는 관료사회에 들어있었고, 소진, 장의를 본받아, 자신의 저작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유세를 했고, 관직을 구했다. 이것은 세속의 그물에 뛰어든 것이다. 용을 길들이는 기술은 그저 마음 속에 감추어 두어야 한다. 어찌 군왕에게 이 천기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사마천이 이렇게 말한 것도 당연하다. 한비자가 <세난>을 쓰고서도 자신이 그 위험에 처한 것이 슬프다.

 

임표는 용을 길들이는 기술을 암중으로 연구했고, 절대로 외부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1949년이후, 임표는 고서를 읽으면서, 모택동을 상대한 책략을 연구한다. 우연히 책에 단편적인 심득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만일 그가 정계를 멀리하고 은퇴했다면, 이런 필기를 적어도 무방하다. 전공이 있으니 편안히 생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용을 길들이는 기술을 가지고, 정계에서 불을 가지고 놀핬다. 모택동과 다르 정적들의 투쟁중에 불 속에서 밤을 꺼내려고 했다(火中取栗). 속담에 부귀는 리스크를 안아야 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호랑이에게 가죽을 달라고 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결국 <세난>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군주의 역린을 건드렸고, 살신지화를 입었다. 일가 3가족이 고비사막에서 참사당한다.

 

청나라학지 요내(姚)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하로서 군주의 숨은 뜻을 잘 탐지해내서, 그 뜻에 따르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한비자와 임표는 바로 이처럼 군주가 두려워한 인물이다. 그래서 모두 비명에 죽었다. 그게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