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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산화난만시 정의별양농: 모택동유소기양가후인취회측기(聚會側記)

by 중은우시 2012. 3. 27.

글: 공동매(孔東梅)

 

2004년 여름, 어느 주일의 저녁, 나와 모친 이민(李敏)은 아주 의미있는 모임에 참석했다. 유소기(劉少奇)의 부인 왕광미(王光美) 할머니가 소집하여, 모택동, 유소기 두 집안의 후손들이 경성에서 함께 모여서 우정을 얘기하는 자리였다.

 

모임은 19시로 정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여섯시 반에서 몇분 사이였다. 북경 경도신원대하(京都信苑大廈) 26층의 조용한 대청에서 모임의 연락인인 유원(劉源) 숙부는 이미 기다린지 오래 되었다. 그는 나의 어머니를 대청으로 안내했고, 친절하게도 '누님'이라고 부르며, 어머니가 자리에 앉아서 쉴 때까지 보살펴주었다. 얼마후 이눌(李訥) 이모부부가 도착했다. 유원 숙부는 급히 나가서 인사했다. 그는 이눌 이모보다 거의 12살이 어렸다. 그래서 모씨자매를 자신의 누님으로 대해왔다. 최근 들어서 그때문에 모,유 두 집안은 왕래가 더욱 밀접해졌다.

 

1948년, 나의 외할아버지인 모택동과 유소기는 중공중앙을 이끌고 서백파에 주둔할 때, 나의 이모부인 왕경청(王景淸)이 경위를 맡고 있었으며, 보초를 섰다. 유씨집안사람들과는 교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광미 할머니는 바로 여기서 유소기 할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얼마후, 그녀는 중공오대서기를 따라 북경으로 들어갔고, 지금까지 이미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3년 나의 모친은 중남해에서 이사나온다. 이눌 이모는 외할아버지의 곁에 남아 있었다. 모택동, 유소기 두 집안은 수십년동안 이웃으로 살았다. 1967년까지. 십여년후 다시 만났을 때. 이눌 이모는 과거처럼 기뻐하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말했다: "소원원(小源源), 소원원(小源源)" 유원 숙부는 돌연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그 소박하고 말이 없으며 학식이 깊은 누님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의 친밀한 칭호가 입에서 바로 나왔다: "이눌 누님".  큰 바람과 파도가 지나간 후, 인생의 온갖 맛이 마음 속에서 솟아올랐다. 이모와 유원 숙부의 눈은 모두 붉어졌다. 

 

1980년대초, 유원 숙부가 하남에서 근무할 때, 부향장이든 부성장이든 여러번 이눌 이모를 보러 갔다. 그때마다 현지 특산품과 공예품을 사가지고 갔다. 이눌 이모는 외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주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옥련봉(玉蓮蓬)을 답례로 주었다. 유원 숙부는 이를 항상 가장 진귀한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얼마전에 이눌 이모가 삼협을 참관하러 갔었다. 군대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이 무경 수전부대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한다. 다음 날, 유원 숙부는 차가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서릉장강대교변에서 일찌감치 맞이하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서 기뻐 어쩔 줄을 몰랐고, 악수하고 서로 포옹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는 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눌은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이 소원원이다. 생기기도 잘 생겼고, 재미있었다. 지금은 그런데 장군이다."(유원 숙부는 당시에 무경 소장이었다). 유원 숙부가 대답한다: "누님이야말로 예뻣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예쁩니다." 서로 한바탕 웃고나서 유원 숙부가 말한다. "앞으로 우리는 세계 제일의 댐을 만들 겁니다. 모 백부의 두 시사를 위에 써놓을 겁니다. 고협출평호(高峽出平湖), 당경세계수(當驚世界殊)" 이눌 이모는 웃으며 멀리 댐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미래의 장관인 모습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급한 발걸음이 두 사람의 회고를 깨트렸다. 이눌 이모의 아들이자 나의 사촌동생인 왕효지(王效芝)가 황급히 뛰어들어오며 말했다: "차가 너무 막혔어요." 우리 어린 오누이를 보고, 유원 숙부는 우스개소리를 했다. 어쩐지 너희들이 안보이더라니. 그는 나와 효지를 대할 때 아주 편하게 대해주었다.

 

돌연 유원 숙부가 화제를 바꾸어, 나의 모친에게 말한다: "동매는 내가 당신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것을 안믿더라구요. 누님은 기억하지요. 우리가 프로그램을 공연까지 했잖아요." "그 사진에 왜 숙부는 안보이는데요?" 나는 끝까지 우겼다. 어머니는 옛날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고 미소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때, 그는 아직 키가 작아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데, 찍히지 않은 거지."(유원 숙부는 당시 8살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유원 숙부는 얘기했다. 1959년 어머니 이민과 부친 공령화(孔令華)가 중남해 국향서옥에서 혼례를 거행했고, 당시 외할아버지(모택동)이 3탁자의 주연을 준비했다. 이것은 항상 근검절약을 숭상하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외할아버지는 국가원수 직무를 사임한다. 유소기 할아버지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을 이어받는다. 중국정계에 이때부터 모택동, 유소기의 두 사람이 나란히 '주석'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유씨집안과 일찌감치 교분이 있었다. 유소기 할아버지의 장남인 유윤빈(劉允斌), 장녀 유애금(劉愛琴)은 모두 모친의 소련국제아동원의 동창들이었다. 1949년 어머니와 유소기, 왕광미 부부는 함게 모안영 외숙의 혼례에 참석했다. 어머니가 결혼할 때는 외할아버지가 손님들을 불러서 영화 <보련등>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영화가 서루상영실에서 보았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마침 이웃에 살던 유소기 일가들을 만났다. 얼마후 중남해 춘우재에서 무회를 열었는데,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쉬고 있던 어머니는 다시 한번 유소기, 왕광미 부부를 만난다. 외할아버니는 기뻐하며 그들에게 신혼인 자신의 딸을 소개해주었다. 왕광미 할머니는 어머니의 곁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에게 몇 살인지 묻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를 물었다..유원 숙부는 그가 참가한 것이 바로 춘우재의 무회였다고 말한다.

 

웃음소리가 넘칠 때, 83세된 왕광미 할머니는 정정(亭亭) 아줌마의 부축을 받아 나타났다. 어머니와 이모는 급히 몸을 일으켜 맞이하러 나갔다. 그리고 노인의 양손을 꼭 잡았다.

 

만년의 왕광미 할머니는 손님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호텔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 그녀는 파격적으로 모택동의 딸 이민, 이눌 두 집안사람들을 불러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노인은 유원 숙부에게 "예전에, 그들 자매둘은 나를 보러 왔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움직기기 힘들지만 그들과 아이들이 보고싶다. 한번 모이자." 그녀는 이렇게 당부했다: "원아, 네가 빨리 준비해라" 그리고 특별히 당부했다. 이것은 두 집안의 모임이다. 비서와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아라.

 

왕광미 할머니와 같이 온 사람은 팔순이 넘은 할머니였다. 그녀가 바로 유씨집안의 보모이고 전설적인 인물인 "조할머니(趙姥姥)"이다. 문혁이 시작된 후, 1967년 왕광미가 감옥에 갇힌다. 1969년 유소기 할아버지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유씨집안이 어려움에 처했지만, 다행히 조할머니가 유씨집안의 가장 어린 딸인 소소(小小)를 데리고 간다. 조할머니의 집은 유씨자녀들이 모이는 곳이 된다. 그녀는 유소기의 자녀들을 도와서 기억하기도 싫은 그 세월을 넘길 수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존경받을만한 노인이다.

 

1976년 외할아버지가 서거한 후, 이눌 이모는 중병을 앓고, 생활이 아주 곤란했다. 1979년 왕광미 할머니는 감옥에서 나온 후 조할머니와 이눌 이모를 찾아와서, 그녀의 집안일을 도와준다. 얼마후 이모는 이모부 왕경청과 결혼한다. 노인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만일 유소기 할아버지가 같은 배를 타고 비바람을 겪은 것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이 왕광미 할머니를 존경한다면, 외할아버지의 후손들에 대한 사심없는 도움은 우리들로 하여금 왕광미 할머니의 넓은 흉금에 숙연하고 존경심을 들게 한다.

 

왕광미 할머니는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녀는 자주 당시 7,8세된 사촌동생 왕효지를 데리고 수영하러 갔다. 지금까지 왕광미 할머니는 여전히 매주 수영과 운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몸이 여전히 건강하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 그녀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이모가 자주 그녀를 찾아뵙는다.

 

이제 두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도착했다. 모두 몸이 어떤지 물으며 정도 깊고 의미고 크다. 이것은 두 특수한 가정이고, 그 구성원의 운명이 국가운명의 흥쇠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 중국사회의 발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모임은 실로 귀한 것이다.

 

모택동과 유소기. 두 사람은 모두 호남에서 출생한다. 고향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들은 1922년에 서로를 알게 되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생사를 함께 넘나든다.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가장 흉험했던 위기를 넘기고, 가장 휘황했던 전성기도 맞이한다. 그들의 품행은 인민들의 가장 많은 신뢰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따랐고, 국가를 승리의 길로 이끌었으며, 지금 우뚝 솟아 있다. 만년의 서로 다른 처지로 그들은 다시 공동의 역사적 비극에 빠진다. 그리고 각자의 가정은 불행을 겪는다.

 

그러나, 두 위인들이 말한 것이 맞았다. 모택동은 말했다: "인민이 진정한 영웅이다" 뮤소기도 말했다: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인민이 그들을 계승했고, 그들을 뛰어넘었다. 한걸음 한걸음 번영, 부강, 자존, 자강의 길로 향한다. 지금도 인민들은 여전히 그들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그들을 존경한다.

 

자리에 다 앉자 두 집안사람들은 속속 왕광미 할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축원했다. 그리고 조할머니에게도 술을 바치며 감사인사를 했다. 어머니와 이모는 여러번 왕광미 할머니의 몸과 생활에 대하여 세심하게 물어보았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너희 둘은 몸이 모두 약하고, 나이도 적지 않다. 그래도 나보다는 많이 젋지 않느냐. 그래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 왕광미 할머니는 모씨자매를 향하여 술잔을 들고, "너희도 몸을 조심해라" 고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와 효지를 향해서 "아이들이 뛰어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쉽게 늙으나 하늘은 늙지 않는다" 어머니와 이모는 모두 환갑의 나이가 되었다. 정정 이모와 유원 숙부도 이미 쉰이 넘었다. 옛날 중남해에서 놀던 어린아이들이 이제는 모두 중노년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에 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하늘도 늙을 것이다" 세월은 바뀌었고, 공명과 영욕은 모두 지난 일이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달라졌다. 그저 진정한 정만이 남아 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유원 숙부는 나에게 말해준다. 그는 소식의 천고명구를 기억해냈다는 것이다. "회수향래소슬처(回首向來蕭瑟處), 야무풍우야무청(也無風雨也無晴)"

 

식사자리는 계속하여 시끄러웟다. 현재의 세상일들을 얘기하는게 가장 많았다. 가장 유머있는 사람은 정정 아주머니였다. 아시아, 유렵, 아메리카; 정치, 예술, 경매; 사업, 생활, 가정 얘기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중간에 유원 숙부가 몸을 일으켜, 효지를 왕광미의 곁으로 데려갔다. "보세요. 그가 자라면서 갈수록 모 백부의 팔각모를 쓴 그 사진을 닯지 않았습니까?" 효지가 급히 몸을 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정정 숙모가 바로 말을 이었다: "닮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닮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그러자 웃음소리 가운데 모든 사람의 눈이 사촌동생 효지를 향했다. 모두가 기억 속의 이미지를 대조해보는 것같았다. 이눌 이모의 눈에는 안위하는 빛이 흘렀다.

 

유원과 효지의 숙질은 서로 한잔씩 주고 받았다. 화제는 선진무기의 성능과 대만문제로 옮겨갔다. 반시간도 되지 않아서 이미 취하고 얼굴이 벌개졌다. 나는 자주 그들이 술마시고 하는 말에서의 말실수와 언사를 가지고 농을 하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그들 둘은 대취했다. 그들 둘이 취한 것은 바로 이 두 집안이 기꺼이 취한 것이다.

 

위인들은 사업을 위하여, 필생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물질적인 부는 남겨주지 않았다. 심지어 모든 가정에 있어야 하는 따스한 기억마저도 극히 적다. 역사는 역사이다. 바꿀 수가 없다. 더더구나 없앨 수도 없다; 당사자의 회고는 항상 농후한 개인적인 색체와 피할 수 없는 편면성을 가진다. 방관자의 기억은 경우에 따라 바뀐다. 삼대 사람들의 연회는 두시간여동안 계속되었다. 비디오카메라로 그 광경을 모두 담았다. 어머니와 이모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은발이 가득한 광미 할머니는 말을 별로 하지 않고 그저 자상하고 초연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른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아서 행복해 보였고, 아름다워 보였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일찌감치 위인들이 공동의 분투와 공동의영욕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상통과 공통, 이해와 동정이 이 두 집안의 모임을 이처럼 유쾌하고 친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불현듯 생각이 난다. 오늘, 우리가 겪은 휘황과 겪은 재난은 천년동안 통일과 내란이 끊이지 않았던 민족에게 완전히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구속을 초탈하여, 손을 잡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할 수 있도록 해줄 수있을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바다보다 광활한 것은 하늘이고, 하늘보다 광활한 것은 사람의 흉금이라고.

두 위인이 가족에게, 후손에게, 인민에게 남긴 것은 끝없는 정신의 재부이다.

외할아버지가 말한 싯구처럼, "대도산화난만시(待到山花爛漫時), 타재총중소(她在叢中笑)"(산꽃이 온 산에 가득 피게 되면 그녀는 그 가운데 웃고 있으리라). 지금 이미 산꽃이 활짝 핀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