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중국고대 과거시험 응시자는 세 가지 일을 반드시 했다

중은우시 2012. 6. 4. 14:50

글: 예방육(倪方六)

 

1년에 1번인 대학입학시험이 다가왔다. 이 기회에 중국고대의 시험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과거는 고대의 대학입학시험인 셈이다. 진정으로 '시험 한번으로 일생이 결정되는(一考定終生)'. 그래서 고대의 과거응시생과 가족들은 모두 과거를 중시했고,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특히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에 고대의 응시생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 일을 반드시 했다.

 

첫째, 조상의 묘에 향을 피우다.

 

소위 "조상의 묘에서 연기가 나오다(祖墳冒靑煙)"라는 것은 조상의 풍수가 뛰어나다는 것을 가리키는 통속적인 말이다. 풍수는 원래 중국인들의 극히 소박한 건축부지선정이론과 기본적인 환경관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국운, 가운, 수명, 관운등이 함께 섞여서, 풍수는 뭐든지 포괄하고 뭐근지 할 수 있는 강호비술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상의 묘를 잘 쓰면 자손들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대의 과거응시생들은 이를 더욱 믿었다. 시험에 합격할지 말지는 조상의 풍수와 연결시켜서 얘기를 하곤 했다.

 

어떤 때는 풍수와 운명이 모종의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자고이래로 강남에서 재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무엇때문인가? 땅이 영험하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나는 법인가? 고대인들은 이것을 "풍수가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풍수가 정말 시험생의 운명을 결정하는가? 만일 고대의 쑤저우(蘇州)출신 과거응시생이라면 분명히 '그렇다'고 답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시작한 이래 쑤저우에서는 모두 45명의 문과장원, 5명의 무과장원을 배출했다. 수량이 전국제일이다. 청나라때만 예로 들면, 순치3년(1646년)부터 광서30년(1904년) 과거폐지시까지, 쑤저우에서는 모두 13명의 회원, 6명의 방안, 12명의 탐화를 배출했고, 685명의 진사를 배출했다. 역시 전국제일이다. 그런데, 수,당시대에 쑤저우에서는 장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다. 모조리 송나라이후의 일이다.

 

쑤저우의 옛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풍수가 돌도 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쑤저우로 풍수가 왔다는 말이다. 남송 쑤저우사람인 범성대는 <오군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당시 민간에는 두 가지 참언이 돌았는데, 하나는 "궁륭산이, 장원귀래(穹隆山移, 狀元歸來)"(궁륭산이 움직이면 장원이 돌아온다)이고, 다른 하나는 "조과이정출장원(潮過夷亭出狀元)"(바닷물이 이정을 넘어오면 장원이 나온다). 그 뜻은 현지의 궁륭산이 움직이거나, 이정이라는 곳으로 조수가 들어오면, 쑤저우에서 장원이 나온다는 말이다. 과연 그 참언대로, 궁륭산이 움직이고, 바닷물이 들어온 그 해에 쑤저우에서는 첫번째 장원이 배출된다. 그후에는 그 운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쑤저우는 명실상부한 '장원의 도시'이다. 장쑤성의 대학입시수석도 대부분 쑤저우에서 배출된다.

 

이것은 한 지방의 풍수전설이다. 한 가문의 풍수전설은 더욱 많다.

 

청나라때의 사람인 이조원의 <담묵록>(권1)에는 이런 조상풍수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당시 안휘의 전초에는 방안(2등)을 한 명 배출했는데, 이름이 오작(吳爵)이다. 오작이 급제한 후에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는 일찌기 풍수를 잘 보는 복건사람인 간요파를 집으로 모셨다. 그에게 명당자리를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매일 잘 대접했다. 그러나 이 풍수가는 3년을 찾아다녔지만, 오씨집안이 원하는 명당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떠나려고 마음먹는다. 오작의 증조부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면서 그를 붙잡는다. 풍수가는 할 수 없이 남아서 다시 살펴본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매화산으로 명당을 찾아나섰는데, 큰 눈을 만났다. 함께 부근의 주루로 가서 식사를 하였다. 풍수가는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앞이 밝아지는 것같았다. 오랫동안 찾아헤매던 길지를 찾은 것이다. 술을 다 마신 후 풍수가는 이것을 오작의 증조부에게 얘기한다. 3년을 찾아도 못찾았던 것을 이렇게 쉽게 찾아낸 것이다. 원래 풍수길지가 바로 눈 앞에 있었던 것이다. 풍수가는 오작의 증조부를 데리고 3리 바깥의 한 곳으로 간다. 그리고 이곳이 명당이라고 가르켜 준다. 눈이 그치고 날이 맑은 후, 풍수가는 오작의 증조부를 데리고 몇 번을 가서 다시 살펴보고는 확실하다고 말한다.

 

풍수가는 기뻐하며 오작의 증조부에게 말한다. "하늘이 내렸다. 이 땅을 얻었으니 그대에게 보답을 충분히 한 셈이 된다. 그러나 매장후 그대의 자식들대에서는 발흥하지 않을 것이다. 손자대에 이르러 크게 발흥할 것이다. 발흥하면 형제가 같이 할 것이다. 건너편의 문봉은 뛰어나니, 분명히 갑(甲)으로 합격할 것이나 1등은 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2등, 혹은 3등을 할 것이고, 1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비교적 길지만, 개략적인 뜻은 조상묘를 이 곳에 쓰면, 자손이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말이다. 나중에 오씨집안은 정말 흥성한다. 풍수가가 말한대로 자손들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다. 진사가 여러명 배출된다. 오작대에 이르러서는 2등, 즉 방안까지 하게 된다.

 

이런 풍수전설은 옛사람들의 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소위 명당을 하나 얻기 위하여, 심지어 사람들은 매장시간을 늦추기까지 했다. 혹은 묘를 이장하기도 했다. 청나라사람 제연의 <명제소식>에 따르면, 이런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성방직이라는 사람이 풍수에 정통했는데, 조상묘의 풍수가 좋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명당을 잡아서 이장하려 했다. 그런데, 이장후 묘내에서 '유지료(有知了, 알았다)'는 소리가 들였고,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몇년이 되지 않아, 성방직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연이어 조카도 과거에 급제한다.

 

실제로 이들 풍수로 인해서 가져온 운은 전설일 뿐이다 혹은 우연이 겹친 것이다. 예를 들어, 쑤저우에서 장원이 많이 나온 것은 풍수와 무관하다. 참언이 들어맞은 것도 아니다. 송나라때 북방소수민족의 침입으로 전국의 정치, 경제중심이 동남으로 이전한 결과일 뿐이다. 쑤저우의 당시 학풍이 좋고 학생들이 열심히 하며, 가장과 사회가 교육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서향지지(書香之地)'가 된 것이다.

 

둘째, 점을 친다.

 

'점'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산명(算命)이다. 그 수단은 각양각색이다. 이것은 중국민간에서 지금도 유행하는 강호비술이다. 필자는 지난 달에 지난(濟南)에 간 적이 있는데, 옛거리인 부용가에서 낡은 사당안에, 많은 묘령의 여자들이 한 뚱뚱한 대사를 불러서 점을 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처음에 그녀들이 호객꾼들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녀들은 관광객들이었다. 나중에 두 여자가 '신첨(神籤)'을 뽑아서, 대사에게 판단해달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라. 손에는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사람들이 이렇게 점을 미신하다니.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고대의 점복술은 왕왕 현대보다 훨씬 잘 들어맞았다. 신기했다. 예를 들어, 강희33년(1694년)에 배지선이라는 장쑤 쩐장 단투 사람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북경으로 과거를 치러 간다.

 

떠나기 전에, 한 친구가 점이 잘 들어맞는 사부에게 물어보자고 한다. 몇 사람이나 시험에 합격할 것인지. 이 사부는 그저 한 글자만을 적었다. "귀(貴)". 이 몇 사람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사부는 이 글자가 이미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모두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배지선이 회시 1등 회원으로 합격한 후에야 깨닫는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배지선이다. 이 '귀'자를 파자하면 "중일목인(中一目人)'이 되는데, 배지선은 생리적인 결함으로 애꾸눈이었던 것이다.

 

점복은 고대의 과거응시생들에게 매우 유행했다. 그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거의 모든 응시생들이 점을 쳤다. 북송을 예로 들면, 당년 도성 동경(즉, 개봉)의 곳곳에는 점치는 산명선생들이 있었다. 산명선생은 모조리 시험생들을 상대로 장사했다. 이들 산명선생은 얼굴빛을 잘 살펴서 시험생의 기호에 맞게 말해주거나, 일부러 고심막측하게 말한다. 그래서 시험생을 속여먹는 것이다. 한 무리의 시험생이 다 함게 무리를 지어서 어느 절의 늙은 스님에게 점을 쳐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과거에 몇 사람이나 합격할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늙은 스님은 침묵을 지키고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만에 손가락 한 개를 내민다. 시험생들은 노스님이 그들중 1명이 합격한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가 발표되니 정말 1명이 합격했다. 이 시험생들은 노스님의 신기묘산에 감복했다. 실제로, 이 두뇌가 뛰어난 노스님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즉 '1명이 합격한다"고 볼 수도 있고, "한 무리가 모조리 합격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1명도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스님의 모든 신비는 '침묵불어(沈默不語)'에 있었던 것이다.

 

과연 점복술은 '사기게임'이다. 그러나 고대의 시험생들은 이를 믿었다. 영험함을 보증하기 위하여 점을 치는데도 날짜를 골랐다. 많은 시험생들은 과거에 응시하는 그 해의 첫날에 즉,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점을 쳐서 '상상(上上)'의 괘가 나오기를 바랐다.

 

셋째, 과거신에게 절을 한다.

 

신앙은 일종의 문화이다. 중국고대인들은 과거시험은 신령이 보우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과거응시생들이 생각하는 '시험의 신'은 누구였을까? 팢아보았더니, 각지의 시험응시생들이 신앙하는 대상은 차이가 있었다. 공인된 시험신은 "문창제군(文昌帝君)"이다. '문창'은 원래 별의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문곡성(文曲星)' 혹은 '문성(文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대인들은 그것이 문운공명(文運功名)을 주재하는 별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이 별신은 도교에서 모시는 선비들의 공명녹위를 관장하는 신과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의 신이 되어 선비와 학생들이 모시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문창제군은 대선신(大善神)이다. 빌면 반드시 보답을 한다. 그래서 고대의 응시생들은 시험을 치르기 전에 경건하게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수십년전에는 '파사구(破四舊)'로 전국각지의 문창제군사당의 불이 꺼졌었다. 이제는 다시 흥성한다. 특히 대학입시가 가까워지면,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문창제군에 제사를 지내는 외에 고대의 과거응시생들은 "괴성(魁星)"에도 제사를 지냈다. '괴성'은 북두칠성의 첫번째 별이다. 그래서 '괴수(魁首)', '괴원(魁元)'이라는 명칭이 있다. 이 별은 금방제명(金榜題名)을 관장하고 문장의 흥쇠를 관장한다. 고대 과거응시생들에게 지위가 아주 높았다. '1등을 하려면 반드시 괴성에 제사지내야 한다' 고대 각지의 시험생들이 괴성에 제사지내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이십팔수중에서, 이 별은 '규성(奎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규"는 "괴"와 발음이 통하므로, 고대의 복건 시험생들은 시험을 치르기 7일전에 청개구리를 사와서 방생한다. 이런 방식으로 괴성에 제사지냈다.

 

그외에, 시험치기 3일전에, 공묘에 제사지내는 활동을 한다. 공묘에서 모시는 대상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고대의 성인인 대유 공중니이다. 고대의 시험생들은 공자가 하늘에 영혼이 있고, 공자의 박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주시험관도 공자가 이번 과거시험이 순조롭게 끝나게 도와주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뽑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에 공묘에 제사를 지냈다.

 

공묘에 제사를 지낸 후, 어떤 곳에서는 시험감독전에 특수한 제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명,청시대에 남경 진회하에 있는 강남공원은 '개룡문(開龍門, 과거시험을 여는 것)'의 3일전에, 현지의 득도한 고승을 모셔서 공원의 최고건축물인 명원루의 위에서 법사를 벌인다. 단을 쌓고 3일 주야를 기도하며 신령이 비호해주기를 기원한다.

 

당연히 고대의 과거응시생이 시험치기 며칠 전에 하는 활동에 다른 것들도 있다. 그러나, 명청시기에 시험전 오후에 시험생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외출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시험장의 시간이 자시(子時), 즉 한밤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오전9시에 시험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