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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고대에 '과거' 시험은 어떻게 준비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8. 21.

글: 왕영비(王潁菲) 

 

수(隋)나라때부터 시작된 과거시험은 청(淸)나라말기에 폐지된다. 1천여년의 역사가 있다. 괴거시험은 선비를 하루아침에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요소가 된 후, 각종 형식의 '과거시험준비반'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고대의 시험준비반은 어떤 유형이었을까? 시험준비반에서는 어떤 과목을 공부했을까? 선생들은 돈을 벌었을까? 오늘날과 비교하면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을까?

 

서원(書院): 명청시기 최대의 '과거준비기구'

 

고대의 학제시스템은 관학(官學), 사학(私學), 서원(書院)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지방관학은 수량이 적고, 사람수는 많았다; 소형 사학의 교육의 질은 천차만별이고,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관리가 어려웠다. 서원은 대부분 안정적인 교사, 스승, 경비원천과 완비된 관리게획이 있었다. 그래서 인재를 배양하는 중요한 기지였다.

 

서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당나라 중엽이다. 그때는 정부가 설립한 관방기구였다. 주로 도서를 수장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중 소수는 사인(私人)이 설립하여, 은거하며 독서하고 제자를 모아서 학문을 가르키는 장소가 되었다. 당나라말기 오대(五代)에 이르러서는 전쟁과 정치의 영향으로 관부에서 충분한 학문연구장소를 제공할 수가 없게 되어, 일부 학문있는 선비들이 은거하여 글을 읽는 기간동안, 초막을 짓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그리고 서원 혹은 서당으로 이런 독서와 강학의 장소를 명명한다. 오대때의 진씨서당(陳氏書堂)은 이 시기를 대표한다. 진씨서당은 "건물이 수십칸이고(堂廡數十間)", "책은 수천권이 있다(書數千卷)", "밭이 이십경이 있다(田二十頃)". 이를 밑천으로 하여 학문을 가르킨다. 학생선발의 기준은 아주 광범위했다. "제자들중 뛰어난 자는 약관이상은 모두 배울 수 있었다." 교육내용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왕왕 사람별로 다르게 가르켰다.

 

북송전기, 중앙정부에서는 과거급제자에게 풍성한 정신적 물질적 보답을 해준다. 독서로 운명을 바꾸고,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국자감이나 지방관학에 들어갈 수 없었던 선비는 "왕왕 서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서 정사(精舍)를 짓고, 무리를 지어서 살면서 공부를 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렇게 새로운 신규 서원건립의 붐을 형성했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숭양서원(嵩陽書院), 악록서원(岳麓書院), 태산서원(泰山書院), 모산서원(茅山書院)등 저명한 서원들이 이 시기에 속속 나타난다. 호남대학 악록서원 교수 등홍파(鄧洪波)는 그의 <중국서원사>에서 일찌기 언급한 바 있다. 양송 3백여년의 역사중 서원이 720여곳에 달한다. 수량에서 당나라 오대의 서원총합의 10배이상으로 늘어난다. "공부를 잘 하면 벼슬을 한다(學而優則仕)". 학술인재와 과거인재를 모두 배양하는 것이 서원의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원, 명, 청시기에 서원은 갈수록 조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서원 산장(山長)의 임면, 교육내용의 설정, 경비의 공급을 모두 관청이 확정했다. 서원은 점점 과거의 부속기구로 전락한다. 명실상부한 '공무원시험학원'으로 변모한다.

 

문사(文社) 과거시험전의 '강화반'

 

소위 "전투를 앞두고 창을 갈면, 날카롭지는 않더라도 빛은 난다(臨陣磨槍, 不快也光)"이라는 것은 고대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앞둔 심정이고, 오늘날 대학입시를 앞둔 응시생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험 전에 '강화반'을 왕왕 1년전부터 시작한다. 서안평(徐雁平)에 따르면, 송,원시기때무터 시작하여 과거준비생들은 글로써 결사를 만들어 문사(文社, 혹은 文會, 文舍라고도 한다)를 만들었다. 이 독서인들이 상호 배우는 장소로서 자신들의 도덕수양을 강화하는 곳이다. 그러나, 문사의 더욱 중요한 기능은 과거준비생들이 과거에서 나올 지식을 복습하고, 모의과거시험을 치르고, 곧 다가울 과거를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서안평은 그들을 '과거강화반'이라고 불렀다. '강화반'에서 학생들은 함께 작문을 하고 상호토론학습한다. 혹은 스승을 불러서 지도를 받기도 했다. 서원의 선생들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다. 서원에서 거인(擧人)을 많이 배출하면 할수록, 서원의 명성도 커졌다.

 

그러나, 서원에 붙어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문사도 있다. 옛날의 명문망족(名門望族)에 있어서, 가족의 흥성은 구성원중에 과거합격자가 나오느냐와 관련이 있다. 과거합격은 점점 가족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가족자제의 과거합격률을 높이기 위하여, 일부 대가족은 돈을 내서, 사당의 곁에 집을 짓고 독립한 문사를 만들거나 다른 가족과 합쳐서 문사를 공동으로 만든다. 가장들은 가족의 명의로 고향으로 돌아온 거인, 진사들을 초청하거나 혹은 지방에서 명성이 있는 학자를 선생으로 모신다. 그후 전 가족의 자제를 불러모아서 공동으로 시험준비를 한다. 청나라때 도광때 양강총독(兩江總督) 겸 양회염정(兩淮鹽政)을 지낸 양장거(梁章鋸)의 가족은 문사를 설립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조부, 부친, 백부, 숙부, 형제 및 그 본인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거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지방에는 마을에서 집단으로 돈을 내어 문사를 건립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건물을 짓고, 선생을 모신다. 그리고 마을의 자제들이 과거시험을 복습할 수 있도록 한다. 목적은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삭생들이 나중에 관직에 나가면 고향에 보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이런 상황은 당시 안휘 휘주일대에서 특히 성행했다. 돈을 내서 문사를 만든 사람의 이름은 지방지에 기록되어 남는다. '천고유명(千古留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후 결사를 제한하는 금령이 반포되면서 전국각지에서 유행하던 문사활동은 점차 조용해진다.

 

전문과목준비반: 의학, 천문, 산학, 지리

 

위진남북조때, 노장의 현학(玄學)이 성행한다. 사람들은 양생지도를 많이 추구하고, 의학도 자연히 중시되었다. 의도를 익히려면 병을 진단하는 것이든 약재를 구분하는 것이든, 여러해동안 연구하여야 비로소 정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의사는 의술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덕행이 불량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북위 선무제는 조서를 내려 의관(醫館)을 짓고 의학지식을 전수한다. 이는 중국최초의 관방이 설치한 전문과목 '학원'이 된다.

 

당나라에 이르러, 의학과목은 중서성(中書省) 아래의 태의서(太醫署)에 둔다. 조정은 전문적인 박사(교사)를 초청해서 가르치게 한다. 교육내용은 더욱 세분화된다. 주로, 의학, 침학, 안마, 주금(禁)으로 나뉘었다. 그중 의학은 5과(科)로 나뉘는데; 체료(體療, 내과), 창종(瘡腫, 외과), 소소(少小, 소아과), 이목구치과(耳目口齒科)와 각법과(角法科, 拔火罐等)이다. 교육사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태의서에는 '약원(藥園)'을 두었다. 즉 약사(藥師)를 두고 학생 16명을 받는다.

 

중서성 아래의 태사국(太史局, 나중에 司天臺로 바뀜)을 두는데 천문박사 2명을 두어 천문관생 90명과 천문생 50명을 가르킨다; 역박사(曆博士) 1명이, 55명의 역생을 가리킨다; 국에는 또한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어, 누각생 360명을 가르킨다. 이들은 계시(計時), 보시(報時)를 학습한다. 태복시(太僕寺)는 수의박사(獸醫博士) 4명이 학생 100명을 가르킨다. 태복시(太卜寺)는 복정박사(卜正博士) 2명, 복서조교(卜筮助敎) 2인이 복서생 9인을 가르킨다. 그외에, 문하성(門下省)에 홍문관(弘文館)과 교서랑(校書郞)을 두고 교서랑은 전적을 교정하고 간행물의 잘못을 시정하며, 그 아래에는 탁서수(拓書手), 필장(筆匠), 해서(楷書)등 직원이 있었으며 학생 30명을 뽑아서 훈련시켰다.

 

관청이 개설한 교육훈련반외에 가족들이 소규모로 개설하기도 한다. 고대 학원의 또 다른 중요형식이다.

 

만일, 가족중에 전문가가 있으면, 자손은 독보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 된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의학이다. 일반적으로 대대로 전승된다. 명나라때의 명의 이시진(李時珍)은 조손3대가 의업에 종사했고, 어떤 명의는 의술을 행하면서 저술을 하고, 제자를 받는다. 사적으로 전수하는 것과 관청의 의학교육과의 다른 점은 기초의학지식을 학습한 후에 선생 자신의 의술, 저술, 비방을 가르킨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유파를 형성한다. 천문, 산술, 여지(지리)등 전문과목지식의 전수도 의학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저명한 과학자인 조충지(祖沖之)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가업을 전수받는다. 그의 아들도 가학을 전수받아 역산 분야에 아주 정통했다. 명성이 높아지면, 일부 저명한 과학자들은 제자를 받는다. 예를 들어, 원나라때의 대수학가 주세걸(朱世傑)은 수학을 전수한다. "집을 찾아오는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주로 학생들이 시험방식에 익숙하게 가르친다.

 

현재의 학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학원도 시험을 치르는 과목을 가르쳤다.

 

과거에서 시험치는 것은 유가전통문화이다. 그러므로, 서원, 문사와 관학과 마찬가지로, 대다수는 유학경전을 전수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예를 들어, <대학> <중용> <논어> <맹자>등이다. 과거제도와 유학의 발전과 더불어, 원나라 대덕(大德)이후, 정주이학(程朱理學)의 <사서집주>가 공식교재가 된다.

 

서안평은 팔고문(八股文)이 과거시험의 작성양식이 되면서, 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사서오경을 숙독하도록 하는 외에, 선생들은 자주 제목을 주고, 학생들이 팔고문을 쓰는 능력을 기르게 했다. 팔고문의 격률, 단계등을 익히는 것이다.

 

송나라와 당나라의 과거시험에서, 책문(策問) 과목은 학샐들의 중점복습대상이었다. 책문은 주로 시험관이 제출한 정사(政事) 문제이다. 학생들이 역사를 귀감으로 삼아 대책을 내놓게 하는 것이다. 책문의 시험은 범위가 넓다. 정치, 교육, 생산, 관리, 지리등등이 포함된다.  경의보다 준비하기가 어렵다. 그외에 일부 '연도핫이슈'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해에 자연재해, 하운해운, 양식문제등이 그것이다. 시험생들은 과거를 보러가기 전에 중점이슈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학생은 심지어 사전에 가능한 시험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미리 써서 외우기도 한다. 일단 그 시험문제가 나오면 바로 답안지에 써내려가는 것이다.

 

청나라때의 중요한 시험과목은 시첩시(試帖詩)이다. 비록 시작(詩作)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것은 당나라때부터이지만, 송나라때 취소되었었다. 원나라 명나라 양대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청나라 건륭제때, 다시 시험과목에 들어간다. 청나라때의 시첩시는 기본적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범위내이다. 그러나 출제되는 시의 격식은 이전시대보다 더욱 엄격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학원에서 먼저 시첩시의 형식을 잘 연습해야 한다. 그 후에 몇 가지 방식을 준비해서 시험에 대비한다.

 

발전모델: 명나라때부터 학원은 농촌에서 도시로

 

장중례(張仲禮)의 <중국신사의 수입>이라는 책에서, 소재하는 서원 서숙(書塾) 혹은 문사의 명성, 소재지 및 신분의 차이에 따라, 매 선생의 급여수준은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역사가 오래된 서원은 관청의 정기적인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에, 충분한 재력으로 관리인과 교사의 급여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외에 일부 성회 혹은 부유한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고임금으로 저명한 학자를 초빙할 수 있었다. 이들 지방의 교사들은 고정적인 급여이외에 서원으로부터 빙의(聘儀), 정의(程儀), 신선(薪膳), 절의(節儀)등의 명목으로 지급되는 돈을 받았다. 어떤 학생은 스승에게 "효경비(孝敬費)", 즉 지례(贄禮)를 지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경의 중산서원은 증국번이 태평천국을 진압한 후 재건된 것이다. 서원의 신장정규정에 따르면, 서원의 산장의 연수입은 984냥은자인데, 그중 800먕은 급여이고, 160냥은 식비보조금, 24냥은 절경(節敬)이었다.

 

그러나, 이들 유명한 서원의 교사들은 '소강(小康)생활'을 지내지만 이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일부 변방지구 혹은 명성이 없는 학교교사의 빈곤한 처지였다. 섬서 정변 서성서원의 선생은 매년 겨우 6만동전의 급여와 6천동전의 과절비를 받았다. 다 합쳐봐야 55냥은자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작은 지방의 서원, 문사등에서 선생을 지낸다면 신분있는 학자의 1년수입은 기본적으로 30냥에서 150냥가량이다. 보통교사의 연수입은 50냥이 되지 않는다. 1880년대, 북경이 부유한 5식구의 1년생활비가 980냥에 이르는 소비수준과 비교하면, 선생의 생활은 확실히 빈곤했다.

 

과거가 갈수록 선비들에게 중시되면서, 관청은 민간교육에 대하여 통제를 갈수록 심하게 한다. 명나라때부터, 문사, 서원등은 공리성을 더욱 많이 지니게 된다. 원래 안정된 환경하에서 공부해야 하여 특별히 산림에 은거하거나 교외에 세워졌던 서원들은 학생들이 찾아오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점차로 도시로 이전한다. 그리하여 초기의 이문회우(以文會友), 학문연구의 순수한 원래의도는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