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옹동화(翁同龢)와 손육문(孫毓汶)

중은우시 2012. 6. 10. 11:38

글: 유계흥(劉繼興)

 

옹동화는 청나라말기에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함풍6년(1856년)에 장원(狀元)을 했고, 한림원 수찬을 제수받았으며, 동치제, 광서제의 두 황제의 스승을 지낸다. 형부상서, 공부상서, 호부상서, 협판대학사,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대신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삼장원(人蔘狀元)"이라고 불렀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 옹동화가 전시(殿試)에서 일등을 하여 함풍6년 장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원래 재주 이외에, 그가 지니고 갔던 두뿌리의 인삼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손육문이다. 자는 내산(萊山)이고, 산동 제녕 사람이다. 그와 옹동화는 모두 함풍6년에 같이 진사가 되었는데, 옹동화는 이 때의 장원이고, 손육문은 바로 그의 다음인 2등 방안(榜眼)이었다.

 

손육문의 집안은 아주 대단하다. 그의 할아버지인 손옥정(孫玉庭)은 청나라의 대학사였고, 부친 손서진(孫瑞珍)은 상서를 지냈고, 당형인 손육계(孫毓桂)는 도광20년(1840년)의 장원이다.

 

옹동화의 집안도 손육문과 비교해서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았다. 옹동화의 부친인 옹심존(翁心存)은 관직이 체인각대학사에 이르렀고, 나중에 동치제의 스승이 된다. 옹동화의 형님인 옹동서(翁同書)는 도광20년(1840년)에 진사가 되어 한림원 편수를 제수받는다. 일찌기 안휘순무를 지냈다; 옹동화의 둘째형인 옹동작(翁同爵)은 일찌기 섬서순무, 호북순무를 지냈다. 당시 옹씨집안은 "일문사진사(一門四進士), 일문삼순무(一門三巡撫), 부자대학사(父子大學士), 부자상서(父子尙書), 부자제사(父子帝師)"로 유명했다.

 

옹동화와 손육문은 모두 재능이 뛰어났고,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였다. 함풍6년의 전시에서 장원을 경쟁하는 사람은 기실 바로 옹동화와 손육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반드시 장원이 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손씨지안은 손육문이 두각을 나타내고, 당형인 손육계와 함께 '형제장원'을 노렸다. 장원을 옹씨집안에서 빼앗아 갈까봐 한가지 계책을 생각해낸다.

 

당시, 과거시험을 치러 오는 사람들중 멀리서 오는 사람은 전시 전날, 대부분 조문(朝門) 부근에서 기숙한다. 옹씨, 손씨 두 십안은 대대로 관리를 지내고, 대대로 집안간의 교분이 있었다. 손씨의 집은 황성부근에 있고, 옹씨의 집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시 전날, 손씨집안에서는 옹동화를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도록 요청한다. 저녁을 먹은 후, 손육계의 부친인 손서진은 아들 손육문에게 일찍 자라고 분부한다.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전시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은 어른의 신분으로 옹동화를 접대하며 술을 많이 권했다. 식사가 끝난 후 손서진은 다시 옹동화를 그의 서재로 데려가서, 전시의 절차를 하나하나 말해준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옹동화는 방으로 돌아가 쉴 수 있었다. 이때 손육문은 일찌감치 잠이 들어있었고, 정력을 잘 보총하고 있었다.

 

옹동화는 침대에 올라갔지만, 손서진은 다시 사람을 시켜 옹동화의 방의 옆에서 폭죽을 터트리게 한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러했다. 옹동화는 한 잠도 자지 못한다. 다음 날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옹동화는 온 몸에 기운이 없는 것을 느끼고 졸음이 왔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해서는 전시에서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돌연 몸에 지니고 온 두 뿌리의 인삼이 생각났다. 즉시 입안에 넣고 씹었다. 옹동화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붓을 들어 답안을 적어가는데 한 글자도 잘못 쓰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두 뿌리의 인삼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결국 옹동화가 장원을 따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옹동화를 '인삼장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인삼은 자고이래로 사람들이 보건식품으로 여겼다. 인삼은 여러가지 공는을 지니고 있다. 대보원기(大補元氣), 보신조양(補腎助陽), 생진지갈(生津止渴), 보비익폐(補脾益肺), 익심복맥(益心復脈), 익지건뇌(益智健腦)등의 기능이 있다. <신농본초경>에 따르면, 인삼은 "주보오장(主補五臟), 안정신(安精神), 정혼백(定魂魄), 제사기(除邪氣), 명목개심익지(明目開心益智), 구복경신연년(久服輕身延年)"(주로 오장을 보하고, 정신과 혼백을 안정시키며,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눈을 밝게 하고 가슴이 트이게 하며 지혜를 북돋운다.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목숨이 연장된다). 그래서 인삼을 성분으로 한 많은 약방들이 치료에서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독삼탕(獨蔘湯), 삼부탕(蔘附湯), 생맥산(生脈散) 등등이 있다.

 

옹동화와 손육문은 모두 고위 관직에 오르지만, 결말은 모두 좋지 않았다.

 

옹동화는 함풍8년(1858년) 섬감학정이 된다. 동치4년(866년) 그는 홍덕원행주(동치제의 비서실)가 되어 어린 황제의 스승이 된다. 동치13년에는 이미 내각학사 겸 시랑이 되어 있었다. 광서초년, 그는 도찰원좌도어사, 형부상서, 군기대신이 되며, 광서제의 서재에서 '총사부'를 맡았다. 그는 신하이면서 황제의 스승이 된 것이다.

 

손육문은 편수의 직을 제수받은 후, 함풍팔년에 부친상을 지내기 위하여 산동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단련을 지내지만, 승거린친과 뜻이 맞지 않아 삭탈관직당하고 신강으로 유배간다. 광서원년(1875년)에 그는 북경으로 돌아와서 내각학사, 공부좌시랑이 된다.

 

광서10년, 중국-프랑스전쟁이 벌어진다. 당시 조정의 청류당의 사람들은 공친왕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으면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마친 서태후도 공친왕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기뢰를 틈타서 공친왕의 직책을 박탈한다. 공친왕와 함게 일했던 이홍조(李鴻藻), 옹동화는 모두 쫓겨난다.

 

손육문은 군기처에 들어간 후, 10년간 국가의 정무를 책임졌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순친왕이 광서16년(1890년)에 죽은 후, 그는 여전히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갑오(1894년, 광서20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조정의 내외에서는 손육문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문정식(文廷式)등은 손육문의 집으로 가서 문생첩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 뜻은 더 이상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육문은 관료로서의 명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손육문은 서태후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 이연영과 결의형제를 맺고, 내부소식을 정탐해서 알려주고, 황상(광서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즉, 손육문은 서태후가 가장 신임하는 대신이고, 태감 이연영과는 결의형제이며, 자주 황궁의 기밀을 정탐하여, 서태후에게 보고했고, 황제를 눈에 두지 않았다.

 

또 하나의 사례는 더더욱 손육문을 잘 설명한다. 한번은 귀주번사 왕덕방이 북경으로 가서 그를 배견한다. 손육문은 문턱을 넘는 비용으로 백금 천냥을 요구한다. 왕번사는 화가 나서 욕을 해댔다: "내가 관리를 지내는 것은 너희 손가의 관리가 아니다. 안본다고 뭐 나쁠 게 있겠느냐. 왜 뇌물까지 바쳐야 하는가?" 그리고는 분개하여 떠났다. 그는 황제에게 왕덕방에 대하여 나쁘게 보고한다.

 

1894년 십월, 청일전쟁에서 연전연패하는 소식이 전해진다. 서태후는 부득이 나이 육순이 넘은 공친왕을 만나고 다시 조정에 나와서 대외교섭을 주재하고 군무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한다 .반달후, 손육문은 광서제에 의하여 모든 직무를 박탈당한다.

 

얼마후, 공친왕이 병사한다. 옹동화는 광서제의 지지를 받아, 조정의 영수가 된다. 청일전쟁의 참패는 무술변법을 불러온다. 중국근대사회정치에 있어서는 사상유례없는 개혁이었다. 옹동화는 역사발전의 조류에 맞추어, 광서제에게 강유위등 진보적인 인사를 추천하고, 강유위등은 그를 "중국유신의 제1스승"이라고 존경한다. 그는 변법유신을 적극 추진한다. 그는 부술변법의 강령성 문건인 <정국시조(定國是詔)>를 초안하여 백일유신의 서막을 연다. 그러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이익을 건드리는 바람에, 옹동화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옹동화를 삭탈관직하고 영원히 다시 기용하지 못하게 하고, 지방관리로 하여금 엄중히 단속하게 한다.

 

옹동화와 손육문은 둘 다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