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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북송명상 구준(寇準): 왜 군자와 소인이 모두 그를 싫어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12. 8.

글: 백가강단

 

정위(丁謂)가 영신방(佞臣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한 사람때문이다. 그는 바로 역사에 명성이 자자한 구준 대인이다. 그들간의 인연은 단지 사소한 한 가지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수(溜鬚)"사건이다.

 

'유수사건'에 관하여, 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천희3년(1019년), 세번 넘어졌다 세번 일어선 구준이 다시 기용되어 왕흠약을 대체하여 재상이 되었다. 구준이 재상이 된 것과 같은 날, 정위도 승진하여 중서성의 참지정사(부재상)가 되었다. 두 사람은 동료가 되었고,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구준은 일찌기 여러번 승상을 맡고 있던 과거급제동기인 이항에게 정위를 추천한 바 있다. 그러나 이항은 거절했다. 구준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이항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의 모습을 보라. 다른 사람의 위에 앉을만한 사람인가?" 구준이 말한다: "정위와 같은 사람을 상공께서는 시종일관 다른 사람의 아래에 눌러둘 수 있을 것같습니까?" 그리고 어느 날 조정에서 연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내각구성원인 구준과 정위는 모두 이 연회에서 구준의 수염에 밥풀과 국물이 묻었다. 곁에 있던 정위가 이를 보고는 몸을 일으켜 이를 털어내주었다. 이 거동은 동료이며 친구간에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준은 이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웃으며 정위를 어쩔 줄 모르게 하였다: "참정. 그대는 나라의 대신으로서 윗사람의 수염이나 털어주는가?"

 

이것이 바로 아부한다는 의미의 성어인 "유수박마(溜鬚拍馬)"중 '유수'의 유래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대인이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구대인이 정위에게 참정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의 국물을 털어주는 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구대인이 지위가 자신보다 약간 낮은 동료의 앞에서 자신이 윗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즉 여러 사람들 앞에서 폼을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전통적인 해석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구대인의 사람됨을 고려하면, 후자의 해석이 더욱 당시의 상황에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일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친구로서, 구대인은 당연히 조용히 처리해야지, 이를 크게 떠벌일 것은 아닌 것이다.

 

사실, 정위는 '유수박마'하는 아부배가 아니다.

 

정위는 친구인 구준의 이 말을 듣고는 잠시 난감해 있다. 이때부터 구준에 원한을 품는다. 나중에 권력투쟁시 구준을 쫓아내서 뇌주로 보내버린다.

 

그렇다면, 정위는 왜 영신방에 올랐고, 구준은 충신방에 올랐을까?

 

먼저 정위라는 사람부터 살펴보자.

 

정위의 유감은 현대인의 유감이고, 현대인의 유감은 구준의 유감이다.

 

정위의 자는 위지(謂之)였는데, 나중에 공언(公言)으로 바꾼다. 소주 장주(지금의 강소성 소주) 사람이며, 966년에 태어났다. 그는 당당히 과거를 통과한 진사였다. 정위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의 저명한 문학가인 왕우칭(王禹偁)은 정위가 보내온 작품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는 당나라의 한유, 유종원후 이백년만의 재능이라고 평가한다. 이를 보면 그는 관직에 나갔을 때 시작이 좋았다. 순화3년, 즉 그가 진사갑과를 한 때, 대리평사, 요주통판을 맡는다. 지금으로 치면 부성장급이다. 1년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직사관, 태자중윤의 신분으로 복건로로 간다. 돌아온 후, 현지의 차, 소금등에 대하여 조사보고서를 올려 황제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하여 전운사가 되는데, 이는 절도사급이다. 그리고 삼사호부판관도 겸직한다. 그러나, 송나라때의 파벌투쟁전통때문에 정위의 관료로서의 길은 그후 기복이 있게 된다.

 

정위의 재주는 사실 구준보다 훨씬 위였다.

 

송나라때 사람인 심괄이 쓴 <몽계필담>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일거이삼역제(一擧而三役濟)".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정위이다. 대중상부연간에 금궁에 불이 나서, 건물이 모조리 재로 변했다. 송진종은 진국공 정위에게 화재후 재건에 대한 책임을 맡겼다. 정위는 "도랑을 파서,  흙을 확보하고; 도랑에 물을 끌어들여서 자재운송을 가능하게 하고; 폐자재로 도랑을 메워, 쓰레기를 처리한다"는 재건방안을 세운다. 그후 백성들로 하여금 도랑을 파게 하여, 흙을 얻고, 다시 물을 도랑에 끌어들여서 성바깥의 건자재를 수로를 통하여 성안으로 운송하고, 건물을 완공한 후에는 도랑을 다시 폐자재와 쓰레기로 메워버렸다. 이는 비용을 줄였을 뿐아니라, 공기도 단축시킨다. 이런 정교한 계획, 세밀한 안배는 현대도시계획에서도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또 한 가지를 보자. 정위가 부재상이 된 후, 사천 일대에 왕균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수민족반란이 일어난다. 조정에서는 병력을 대거 보내어 난을 평정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한다. 정위는 명을 받아, 사천땅으로 깊이 들어가서 반란을 해소시킨다.

 

다음에는 구준을 보자.

 

구준의 자는 평중(平仲)이고, 화주하규(지금의 섬서성 위남) 사람이다. 정위보다 5살이 많다. 송태종 태평흥국5년(980년)에 진사가 된다. 순화5년에 참지정사가 되었다. 구준이 좋은 명성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실 한 가지 일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 교과서에 기록된 "전연지맹(澶淵之盟)"이다. 송나라 경덕원년(1004년), 요나라대군이 송을 침입한다. 구준은 저항할 것을 주장하고, 송진종으로 하여금 황하를 넘어 친정하도록 주청한다. 요나라와는 '전연지맹'을 맺어 잠시 국세를 안정시킨다. <송사>에는 구준에 대하여는 단지 두 글자 "정직(正直)"이라고 언급했다. 그가 곧다(直)는 것에는 별 할 말이 없지만, 그가 바르다(正)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전연지맹"후,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말한다. "폐하는 도박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도박하는 자들은 돈을 모조리 거는 것은 '몰빵'이라고 하는데, 폐하는 바로 구준의 '몰빵'입니다. 이는 위험합니다." 이 비유는 참으로 적절하다. 당시의 조정은 요나라와 싸울 힘이 없었다. 회맹전에 구준은 협상대표에게 일정한 수를 넘어서게 되면 네 목을 베겠다고 말한다.

 

구준은 관료생애동안 세번 쫓겨났다가 다시 세번 기용된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바르지 않았다'는데 있다. '전연지맹'에 공이 있음을 내세워 구준의 권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거란과 이미 화해하였고, 조정에는 큰 일이 없다. 구준은 그 공이 높다고 자랑하였으며, 황상도 이때문에 구준에 아주 후하게 대했다." 그리하여, 구준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권을 독점하고, 재상독재를 실시한다. 자주 윗사람처럼 황제를 핍박하였다. 특히 임사권에 있어서, 원래 제도에 따르면 재상은 어사의 임묭에 관여할 수 없는데, 구준은 그 권한까지 장악했다. 구준은 '현신을 기용하고, 불초한 자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했다. 규정을 따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앙조정에서는 남방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구준도 평생동안 남방사람을 멸시했고, 남방사람을 배척했다. 경덕2년, 14세의 안수가 신동으로 과거시험에 참가한다.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던 구준은 그가 '강좌인(江左人)'이기 때문에 그를 누르려 한다. 그래서 나중에 정위는 그를 일부러 남방중의 남방인 뇌주로 귀양보내서, 거기서 병사하게 만든 것이다.

 

구준이 처음 재상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멸시하는 남방인 왕흠약에 의하여 재상에서 쫓겨난다. 재상에서 쫓겨난 후 섬주(지금의 하남섬현)의 지방관응로 쫓겨난다. 구준은 정무는 돌보지 않고, 하루종일 연회나 베풀고 놀기만 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생일 때, 구준이 연회를 크게 베푼다. 모든 사람이 도착한 후, 그는 돌연 새로운 옷을 입었는데, 그것은 황색에 용을 수놓은 황제의 용포였다. 이 소식은 즉시 경성으로 들어간다. 황제는 재상 왕단을 불러서, "구준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왕단은 이를 듣고 깤짝 놀라서, 구준을 위하여 잘 말해주어 무사히 끝나게 된다.

 

송나라 대중상부7년(1014년) 육월, 왕단의 극력추천하에 구준은 다시 권력의 꼭대기로 돌아온다. 서부추밀정사를 맡는다. 두 사람은 원래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하지만, 구준은 자신보다 재상이 늦게 된 동료인 그를 멸시한다. 그리하여, 그는 왕단과 협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자주 그에게 골치거리를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구준은 왕단이 보내온 문서에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문제삼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단과 상의하지 않고 직접 황제에 올리곤 했다. 이렇게 하여 황제가 왕단을 질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왕단쪽에서도 구준쪽에서 보내온 문서에 꼬투리를 잡아 보복하게 된다. 그러나 왕단은 구준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지는 않고, 문서를 추밀원으로 그냥 돌려보내주고, 송진종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추밀원의 관리가 이 일을 구준에게 보고했다. 구준은 그제서야 부끄럽게 생각하여, 다음 날 왕단을 만나자, 왕단에게 말한다: "왕동년의 도량이 이처럼 크신 줄 몰랐습니다."

 

왕단의 도량은 구준을 감동시켰지만, 그래도 구준은 기회를 잡자 왕단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구준은 자신이 곧 추밀원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람을 시켜 왕단에게 더 높은 관직(使相)에 오르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구준의 이런 요청에 왕단은 깜짝 놀랐다. 사상을 어찌 스스로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은 사사로이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지 않는다는 말로 거절한다. 왕단의 이런 태도에 대하여 구준은 다시 부끄럽고 한편으로 원한을 갖는다. 그러나, 송진종이 왕단에게 구준이 추밀원사를 그만둔 후 어떤 관직을 주면 좋겠는지를 묻자, 왕단은 사상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말한다. 곧이어 구준을 불러서 사상을 맡긴다고 하자, 구준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은 황상밖에 없다고 말한다. 황상이 누가 그를 추천했는지를 말해주자, 구준은 다시 한번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한다. "왕동년의 도량은 나 구준이 헤아릴 수가 없구나."

 

왕단은 재상에 12년을 있다가 병이 깊어졌다. 송진종은 사람을 시켜 왕단을 가마에 태워 궁중으로 불러서 후사를 묻는다. "경에게 만일 어떤 일있으면, 천하의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는가?" 왕단은 처음에는 송진종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군주입니다."라고 답한다. 송진종은 어쩔 수가 없어서 하나하나 이름을 제시하며 물었다. 그래도 왕단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송진종은 왕단에게 직접 말해보라고 하자, 왕단은 비로소 얘기한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구준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송진종은 구준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준은 성격이 강한데...경이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자 왕단은 고집스럽게 말한다. "다른 사람은 신이 잘 모릅니다."

 

황제의 눈에 구준은 마음이 좁고, 편협했다. 다른 대신들과 계속하여 충돌했다. 군자이건 소인이건 모두 그를 싫어했다. 송진종은 그리하여 구준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단이 죽기 전에 추천한 것이니, 구준은 마침내 기회를 얻었다. 천희3년, 영흥군내에 주능이라는 순검이 있는데, 그가 내시 주회정과 결탁하여 천서를 위조한다. 구준은 송진종이 도교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아서, 상소를 올려, "천서가 건우산에 내려왔다"고 말한다. 이 계책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십여일 후, 구준은 경성으로 불려간다. 이해 육월 왕흠약은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고, 구준이 재상이 된다.

 

그러나, 이번에 구대인은 정위라는 재주와 능력이 모두 그보다 위인 상대를 만난다. 구준은 정위의 투쟁하는 과정에서, 유황후를 무시하다가 그녀에게 미움을 받는다. 자신의 처지를 우려하여 구준은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술에 취하여 실언을 하여 누설된다. 정위의 심복이 이를 눈치채자, 구준은 불귀의 길을 걷게 괸다. 구준에게 핍박받았던 풍증등이 속속 그를 공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