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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홍수전의 진면목

by 중은우시 2008. 6. 24.

글: 반욱란(潘旭瀾)

 

홍수전(洪秀全 1814-1864): 본명은 홍인곤(洪仁坤)이고 아명은 화수(火秀)이며, 광동 화현 사람이다. 부친은 홍경양(洪鏡揚)이고, 집안에 전답과 재산이 조금 있었다.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조건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홍수전에게는 형이 두 명있었는데, 그가 유일하게 글을 읽은 사람이었고,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7살때 현지의 사숙에서 글을 배웠고, 14살때 동생(童生)이 된다. 이후 연속 4번 합계 17년간 수재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가 계속낙방하던 때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의 기간동안 여러번 사숙에서 선생을 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글과 문화적 기초지식을 가르켰는데, 이는 당시에 상당히 많은 동생들이 종사하던 무고정직업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수입은 보통농민보다 좋을 것도 없었고 ,단지 신분이 다를 뿐이다.

 

이외에 당시 3명의 광서사람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원래 무뢰한이고, 매일 도박을 했으며, 여러번 도망쳤다. 아편과 서양물건을 운송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광동광서와 호남의 변경을 왈애하면서 상인들로부터 커미션을 받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이 비교적 큰 것은 1844년 4월 풍운산(馮雲山)과 "출유천하(出遊天下)"를 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자주 도박을 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상인들을 위하여 아편, 서양물건을 운송해주고 커미션을 받아서 활동경비로 삼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홍수전이 나중에 성공하고 난 후에 자신과 극소수 동료들은 절대로 이같은 자랑스럽지 못한 경력을 말할리가 없다. 배상제회와 태평군의 내에서도 아무도 이를 들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수성공사>>에도 홍수전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몰랐거나, 단지 사숙의 선생만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이 3명의 광동인이 제공한 자료는 사실로 증명되지도 날조로 입증되지도 못하고 있다.

 

1837년, 홍수전이 세번째로 과거에 낙방한다. 이는 스스로 뜻을 높이 가지고 가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그로서는 정신적 심리적인 타격이 매우 컸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큰 병에 걸린다. "7일간 생과 사를 오가다가 정신이 들고난 후에 '하늘의 말(天話)'을 하게 된다. 이번 병에 대하여, 특히 혼이 하늘을 갔다 온 것에 대하여는 그 자신과 풍운산등이 말한 것이므로 문제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몇가지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쇼를 해서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 것이다. 둘은 내심으로 아주 복잡하게 고민하고 투쟁했다. 셋은 강렬한 자극이 극도의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넷은 정신은 맑지만 미친 생각과 몽환의 심리활동으로 인한 것이다. 다섯은 어떻게 미신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지를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번 큰 병이후 성격도 확실히 바뀐다. 그러나 정신병자가 되지는 않는다. 약을 쓰지 않고도 나았고, 다른 사람이 돌봐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1842년, 그는 네번째로 과거에 응시하나 또 낙방한다. 함께 낙방한 친구(혹은 사촌동생) 풍운산은 과거시험에 대한 극도의 불만에서 그리고, 점성술로 봤을 때, 홍수전은 '기이한 상'을 가지고 있고, '왕자의 풍모'가 있었으므로 그를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풍운산은 그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이 들었을 때의 생각이나 환상과 맞는 것이라고 부추겨, 더 이상 과거를 칠 생각을 포기한다. 홍수전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후, 바로 상제가 그를 "태평천왕대도군전(太平天王大道君全)"에 봉했다고 하면서, 그를 때로는 "홍수(洪秀)"로 때로는 "홍전(洪全)"으로 때로는 "홍수전(洪秀全)"으로 부르게 했다. 이때부터 홍인곤, 홍화수는 홍수전으로 개명한다. 이번 개명은 아주 신경을 쓴 것이다. "수전(秀全)"을 나누면 "화내인왕(禾乃人王)"이 되는데, 이는 "내(禾, 吾)가 곧(乃) 사람의(人) 왕(王)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에 급제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는 것이다. 반란은 사람의 왕이 되기 위한 것이다. 왕이 되면, '자신이 과거를 열어 천하의 선비를 뽑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손에 천지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미운 놈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란, 보복보다 더 큰 것은 점유와 향유였다. 모든 것을 점유하고, 세상의 보물이 다 내것이 되는 것이다.

 

홍수전을 교주로 한 배상제회교의 창립은 그 주요한 사상이론을 양아발(梁阿發)이 편저한 통속 포교서 <<권세양언(勸世良言)>>에 두고 있다. 이것은 전면적이거나 계통적인 기독교교의 소개서가 아니라, 수시로 중국전통관념을 인용하여 <<성경>>을 인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언급하는 신학지식 예를 들어, 하느님은 전능하다거나, 예수는 구원한다거나, 하느님이 유일신이라거나, 우상숭배를 금지한다거나, 천당은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고 지옥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등등의 내용은 들어있다. 이는 홍수전과 풍운산에 의하여 빌려사용되고, 계속 발효했다. 나중에 천왕부앞에 있던 말도안되는 세계지도를 보면, 홍수전이 이때 서방과 세계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그는 '서방에서 진리를 찾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바로 <<권세양언>>에 나오는 약간의 신학지식이다. 이를 기초로 계속 그의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고 새로운 내용을 삽입하여, 그를 교주로 한 배상제회를 창립한다. 미신제조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신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이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하여 지상의 천국을 만들고자 한다. 이 과정을 보면, 홍수전이 창조한 배상제회교는 정치적 사교에 가깝다:

 

첫째, 구세주가 강림하여 전국 및 전세계를 다스린다고 선전했다. 세계의 모든 사교우두머리는 구세주로 자처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권을 탈취하거나 전국,전세계를 통치하는 것을 직접적인 내용으로 선전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니다. 홍수전은 이를 아주 명확하게 핵심내용으로 삼았다. 그는 "천상지존노인이 이미 전세계의 사람이 나에게 속하도록 명을 내렸다. 세상의 만가지 보물이 모우 내 것이다" 그는 천부천형의 명을 받아, 강림하여 인신합일(人神合一)의 "만국독일진주(萬國獨一眞主)'가 되었다고 하였다.

 

둘째, 세계말세론과 반란관료론을 결합했다. 왜 구세주가 필요한가? 세상에 말일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교의 공통된 논조이다. 1850년 5월, 그는 말세론을 구체화하여, 상제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도광30년(1850년)에 내가 대재앙을 내린 것이다. 신앙이 굳건한 자는 구함을 받을 것이오, 믿지 않는 자는 전염벼에 걸릴 것이다. 밭이 있어도 경작하는 자가 없을 것이오, 집이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그러나, "매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고, 천재도 비켜갈 것이다" 1851년이 되어, 영안에서 돌파할 때,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수표를 남발한다. 열심히 싸우는 자는 "크면 승상, 점검, 지휘, 장군, 시위를 받고 최소한 군사직을 받으며 대대로 세습하게 될 것이다"

 

셋째, 언행이 무당화되었고, 군민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한다. 홍수전은 상제가 그에게 보검, 인수(印綏, 도장끈)와 같은 것을 내렸다고 주장하는데서 시작하여 계속하여 옥새에 자칭 "홍일"이라고 하면서 천하를 비추는 밝은 해이므로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양수청, 소조귀는 그의 미신선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선후로 무당스타일의 천부강림, 천형강림을 시도한다. 이 두 사람이 죽은 후에 홍수전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마음대로 '하늘의 말'을 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하늘은 있으나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도 한다. 그리고 자주 그는 '하늘의 뜻'에 따라 시를 짓고 그것을 아황비단에 써서 깃발로 만들어 건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 신화를 만드는 것이며, 태평군의 군관에 대한 정신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참가자들을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홍수전은 미신선전을 통하여 신도들에게 정신적인 통제를 가하는 외에, 일련의 규칙, 조치를 통하여, 인신, 가족, 재물까지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반란초기에, 그는 입회자들에게 가산을 바치도록 요구했고, 전답가옥을 팔아서, 현금으로 바꾸어 '공고(公庫)'에 입금하도록 하였다. 팔지 못한 가옥은 불태워버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가담하면 전 가족이 가담하여 서로 인질이 되고, 퇴로가 없어서 모두 강물을 건너버린 졸이 되는 것이다(중국 장기에서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가지 못함). 오래지 않아, 지방을 하나 점령할 때마다, '도리를 전파'하는 방법으로 살아있고 도망치지 않은 백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 태평군에 편입시켰는데, 이는 철저한 공갈협박에 의한 것이다. 편입된 후, 재산을 전부 내놓지 않거나, 사사로이 은자 5냥이상을 숨기고 있으면, '사심을 품고 있으니, 요마이고, 죄가 극대하다'고 하였다. 21일이 지나도록 천조를 외우지 못하거나, 두 차례에 걸쳐 아무런 이유없이 '도리를 전파'하는데 참가하지 않으면 중대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무조건복종을 하지 않거나, 도구로 길들여지지 않거나, 엉뚱한 소리를 지꺼리면 모두 요마의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妖心未化). 이를 참지 못하고 밤중에 도망치는 것을 "삼경(三更)"이라고 하였다. 천조, 명령에 위반하는 것은 "변요(變妖)"라고 하였다. 이상의 각종 죄명에 대한 처벌은 모두 참수(斬首)였다. 다른 여러가지 천조, 금률을 어기는 행위 즉, 부부동숙, 점검/지휘이상의 관교를 만나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것, 모여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 사사로이 군사를 논하는 것,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 변발을 하는 것...등은 모두 참수에 처하는 범외이다. '반반통요(反叛通妖)'는 특히 '점천등(點天燈)", "오마분시(五馬分屍)'의 극형에 처했다. 전면적이고 엄격한 통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과 재물도 없게 하고, 사상감정도 없게 하며, 인신사유도 없게 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도구로 만들었다.

 

다섯째, 대량의 처녀를 개인적인 성도구로 삼았다. 홍수전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도 처첩이 여럿 있었다. 작은 영안성을 점령하고나서는 이미 36명이었다. 남경으로 들어가서 매번 생일이나 은혜를 입으면 미녀 6명씩을 바쳤다. 매년 봄이 되면 천경의 13개 문입구에서 홍수전을 위하여 미녀를 선발했다. 심지어 아예 규정으로, "모든 소부미녀는 천왕이 쓰도록 준비한다"고 적었다. 태평군이 패망할 때, 천왕의 처첩은 88명(일설에는 108명)이 있었다. 궁중에 너비가 8척에 이르는 큰 침대가 있었는데, 뭐에 쓰는 것인지는 말안해도 알 것이다. 홍수전은 처첩이 너무 많다보니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처첩을 단속하는 <<천부시>>를 수백수 지어서 그녀들에게 외우게 하였다. 이들 양가집 규수들은 그의 성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홍수전은 황제와 사교교주의 부녀에 대한 유린이 극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