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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요문원(姚文元): 잉크병안에서 기어올라온 정계고위층

by 중은우시 2012. 1. 11.

글: 하국승(夏國勝)

 

요문원의 일생은 붓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는 사람을 해치더라도 잘 해쳤고, 명리(名利)를 다 거둔 것은 3번이었다: 첫번째는 호풍을 비판하여 두각을 드러냈고, 둘째는 <영이비고(靈以備考)>로 새로운 스타가 되었으며, 셋째는 <해서파관(海瑞罷官)>은 그를 정계로 들어서게 해주었다.

 

제1보: 호풍비판으로 두각을 드러냄

 

호풍(胡風)은 해방전에 지명도가 아주 높은 작가였다. 그의 저작과 사상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요문원도 호풍의 숭배자였다. 그는 <호풍의 문예사상을 논함>이라는 책을 썼고, 호풍이 "가장 우수한 이론가"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이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을 때인 1954년 하반기, 중국문단에는 호풍비판의 바람이 분다. 요문원은 적지 않게 놀란다. 그리고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를 아직 출판사에 보내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형세를 따라 스스로를 나타내야 했다. 그는 바로 창을 거꾸로 들고, 북경 <문예보> 1955년 제1,제2기합본에 <시비를 확실히 나누고, 경계를 확실히 긋는다>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요문원은 호풍의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겉옷을 입은 자산계급유심주의이론이고....호풍선생은 이미 직접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고, 이미 당을 더럽히는 입장에 섰다..."고 비판한 후, 그는 다시 상해의 <문예월보>에 <호풍이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 3가지 수단>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요문원의 "좌"파언론은 당시 상해시위기관지인 <해방일보>사의 사장 겸 총편집 장춘교의 주의를 끈다. 장춘교는 속으로 생각한다: 호풍을 철처하게 비판해서 걸레로 만들려면, 요문원과 같은 몽둥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장춘교는 요문원을 지도하여 <해방일보>에 연속하여 호풍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게 한다. 동시에, 그 잔이 친히 요문원의 글을 심의,추천하여 <호풍 반혁명양면파는 당의 사적(死敵)>이라는 글을 <인민일보>에 발표하였다. 일시에 요문원의 명성은 크게 떨치고, 반호풍의 영웅이 된다.

 

이렇게 하여, 요문원은 호풍비판을 가지고 장춘교라는 기댈 나무를 갖게 된다. 장춘교도 요문원이라는 가시달린 몽둥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은 일당으로 결탁하게 된다.

 

제2보: <영이비고>로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다.

 

1950년대, 중국의 계급투쟁의 바람은 한번 또 한번 계속 불었다. 1955년 "반호풍"의 투쟁이 막 끝나자,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난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는 요문원의 입맛에 맞았다. 그의 '몽둥이로 때리기'특기를 쓸 장소가 마련된 것이다.

 

요문원이 '스타'가 된 것에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것은 1957년 2월 6일이다. 그는 <문회보>에 요셜은을 공격하는 글 <교조와 원칙-요설원선샌과 토론하다>를 발표한다. 글에서, 요문원은 격렬한 언어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능사를 보여주니, 봉망필로(鋒芒畢露)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약간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멸시할 비판글이라면 요문원이 뜨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요문원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은 모택동의 주목을 받는다.

 

모택동은 상해의 <문회보>를 즐겨보았다. 그날 마침 요문원의 글을 읽었는데, 얼마전에 요설은이 1956년 가을에 태호에서 병을 요양할 때 쓴 글인 <혜천흘차기>를 떠올렸다(당시 모택동은 요설은이 약간 지식분자의 청고(淸高)를 지니고, 마치 '다른 사람은 다 취해도 나 혼자는 깨어있겠다'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요문원의 글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당시 상해시위 서기인 가경시에게 요문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게 한다.

 

1957년 2월 6일, 모택동은 한 강화에서, 문예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요문원의 글을 언급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동지들은 사물을 볼 때 양점론이어야 한다....최근 요봉자의 아들 요문원이라고 있는데 ,글을 하나 썼다. 내가 보기에 괜찮다..." 모택동의 말은 금방 상해시위에 전해진다. 일시에 요문원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상해문예이론게의 '뉴스타'로 쓴 것이다. 당시 중앙은 마침 전국선전공작회의를 소집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치대로라면 요문원은 참가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찬양했으므로, 중공상해시위는 특별대우를 해서, 요문원을 대표로 뽑아 회의에 참가하게 한다. 3월 10일 오후,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상해대표단을 접견하면서 다시 한번 요문원을 언급한다. "편면성을 두려워하지 말라...어떤 사람도 편면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청년도 그렇고, 이희범도 편면성이 있고, 왕몽도 편면성이 있다. 그러나 청년작가중에서 내가 보기에 요문원의 편면성이 비교적 적다."

 

이전의 요문원은 비록 '몽둥이' 영웅이었지만, 상해의 정계와 문예계의 명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무명소졸이었다. 그러나, 짧은 1달내에 모택동이 두번이나 그를 칭찬했으니 사람들이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험도 있고, 자격도 갖추었으니, 요문원은 더더욱 있는 힘을 다하여, 흐름을 파악하고, 기회를 노렸다.

 

1957년 6월 8일, <인민일보>에 전국을 진동시킨 사론 <이것은 왜인가?>가 실린다. 이로써 전국반우파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요문원은 영민한 정치적 후각으로, 자신을 크게 드러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6월 14일, 중앙인민방송국의 뉴스프로그램에서는 요문원의 '대작' 1편을 소개하여 전국을 진동시키고, 상해를 깜짝 놀라게 한다.

 

우너래, 5월 25일, 모택동은 북경에서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제3차전국대표대회 전체대표를 접견하고, 강화를 한다. 신화사는 이것을 아주 짧은 단신으로 보도한다. <해방일보> <인민일보> 및 <문회보>는 모두 이 소식을 싣는다. 그러나, 편집기교에 있어서는 각자 조금씩 달랐다. 사용한 글자나 표제의 크기도 서로 달랐다. 원래 이런 편집이야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이고, 더 생각할 일도 없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사람에게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심각한 정치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문원은 이 세 장의 신문을 대조하여 <영이비고 - 독보우감>이라는 천자짜리 글을 써서 <문회보>에 싣는다. 아마도 요문원의 운이 좋은 것인지, 그의 이 글을 다시 모택동이 보게 된다. 그리고 모택동이 크게 칭찬한다. 즉시 <인민일보> 제1판에 전재하도록 한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뉴스프로그램에서도 요약하여 방송한다. 이렇게 되니 전국각지의 신문들도 이 글을 속속 전재한다.

 

그리하여, 요문원은 문단의 '뉴스타'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 이때부터, 그의 관운은 형통하고, 일약 상해작가협회 당위의 구성원이 되고, 반우파영도소조의 구성원이 된다.

 

제3보: <해서파관>으로 정계에 들어가다.

 

"자계중산랑(子係中山狼), 득지편창광(得志便猖狂)". 정치적으로 득세하자, 요문원의 영혼과 인간성은 모두 비뚤어진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은 '몽둥이'에 의지하여 성공했다. 그렇다면, '몽둥이의 위력'을 더욱 키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몽둥이를 들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마구 휘두른다. 그리고 때리면 때릴수록 강도가 강해졌다. 그는 당대 명사들을 공격했는데, 유사하, 서무공등이 당했다. 그는 문단의 노장들도 공격했는데, 풍설봉, 애청, 파금, 정령등이 당했다. 동시대인들을 다 공격하고나서도 아직 한을 다 못푼듯이 땅 속에 잠든지 오래된 고인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가 공격하는 주요대상은 해서(海瑞)가 된다. 1965년 11월 10일, 그는 다시 <문회보>에 <<평신편역사극<해서파관>>이라는 장편글을 쓴다.

 

<해서파관>은 당시 북경시부시장이며 명사전문가인 오함 교수가 쓴 글이다. 이 글을 쓴 동기는 모택동이 1959년 4월 4일 당의 제8기 7중전회에서 농촌인민공사의 정돈문제를 논의할 때, 해서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목적은 각급간부가 정돈업무를 하면서, 해서의 충성과 강직함, 직언하는 정신을 배우라는 것이다. 오함은 호교목의 의견에 따라, 저명한 경극배우 마련량의 간청하에, 1년여의 시간을 들여, <해서파관>의 경극 극본을 창작해낸다. 이 극본이 발표 및 공연된 후, 널리 호평을 받는다. 모택도도 당시에 칭찬한 바 있다. 그러나, 강청등은 정치적 목적때문에, <해서파관>은 '황제를 욕하는' 극이라고 억지를 썼고, 옛일을 빌어서 현재 일을 공격하는 것이며 팽덕회가 억울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므로 대독초라고 하였다. 이를 기화로 북경시위(당시 북경시서기 겸 시장은 팽진이었음)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당에 충성하나 강청등의 행위에 불만이 있던 당의 지도자들을 공격한다. 강청은 장춘교를 통하여 요문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쓰도록 요구한다. 요문원은 원래 '공격전문가'이다. 거기에 강청이 부탁까지 하자 더욱 고무된다. 그는 강청이라는 이 큰 나무에 기대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몇 달동안 문을 걸어잠그고, 온갖 머리를 짜내어 부친과 모든 관계를 동원하여, 명사중 해서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한다. 그후 견강부회, 무한상강(無限上綱), 극진무함(極盡誣陷)의 재능을 발휘하여 마침내 <평신편역사극<해서파관>>을 완성한다.  이 글은 <문회보>에 실린 후, 약간의 역사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요문원의 글이 개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오함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이 날의 <문회보>가 배달된 곳마다 욕하는 소리가 넘치고 넘쳤다. 그러나, 강청, 장춘교등은 기뻐했다. 그들은 여기서 그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사인방'이 비판투쟁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요문원의 글은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전국에 이로 인하여 연좌된 사람이 수천수만이었다. 박해당해서 죽은 사람도 수백수천이었다. 그러나 요문원은 세 단계나 뛰어올라 <해방일보> 편집위원에서 상해시위선전부장이 된다. 나중에 강청이 추천하여 '중앙문혁소조'의 위원이 된다. 당시,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은 진백달이고, 강청, 장춘교가 부조장이었다. 요문원이 들어간 후 강청, 장춘교와 '삼인방'을 결성한다. 나중에 왕홍문이 가맹한 후 '사인방'이 된다. 이는 1년후의 일이다.

 

요문원이 북경의 관리가 된 후, 계속하여 붓을 놀리는 장기를 발휘한다. 임표와 강청에게 중용된다. 임표는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제9차전국대표대회의 정치보고에서 요문원의 '역사적 공적'을 언급한다. 그는 말했다: "<해서파관>등 대공업독초에 대한 비판은 직접 수정주의집단의 소굴로 향해야 한다. 유소기가 통제하는 그 바늘도 들어가지 않고, 물도 스며들지 않는 '독립왕국', 즉 북경시위로 향해야 한다." 강청도 여러 장소에서 요문원은 무산계급의 '황금방망이'라고 칭찬했다. 임표, 강청이 뒤를 받쳐주므로, 요문원의 관운은 확 트였다. 1969년 4월, 중공제9기 1중전회에서 요문원은 중앙정치국위원이 되어,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된다. 1970년 8월, 다시 진백달을 대체하여 전국여론총관으로 오른다.

 

"온갖 머리를 짜내어 너무 총명하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 역사는 무정하다. 그리고 공정하다. 요문원이라는 잉크병에서 기어올라온 '대인물'은 결국 역사의 버림을 받는다. 1976년 10월,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1981년 1월 특별법정에서 유기징역 20년형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