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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曹操) 삼부자의 이름풀이

by 중은우시 2012. 5. 15.

글: 왕굉화(王宏華)

 

많은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삼조(三曹)'는 '삼사마(三司馬)'만큼 능력이 있거나 힘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의 각도가 아니라, 시간의 각도에서 보자면, 조조 삼부자가 더욱 성공적이다. 문학적으로 건안풍골을 공동으로 개창하였을 뿐아니라, 고대 선비들이 꿈에도 그리던 "삼불후(三不朽)"의 영원한 가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좌전. 양공24년>의 기록에 따르면,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숙손표(叔孫豹)와 진(晋)나라의 범선자(范宣子)는 일찌기 어떻게 해야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지(死而不朽)"에 대하여 토론을 전개한다. 범선자는 그의 조상은 우, 하, 상, 주 이래 대대로 귀족이었고, 집안이 혁혁하고, 제사도 끊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불후"라고 하였다. 숙손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은 "세록(世祿)"이라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불후"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불후는 바로: "최고는 입덕(立德)이고, 그 다음이 입공(立功)이며, 그 다음이 입언(立言)이다.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야 말로 삼불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마가족이 추구한 것은 바로 현실의 '세록'이고, 조조가족이 추구한 것은 정신의 '불후'이다.

 

통상적으로 말해서, '입덕'은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을 말하고, "입공"은 커다란 업적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입언"은 언어문자로 진리를 기록하는 것 저서입설(著書立說)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 항간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역대이래로 2명반이 "삼립"을 이루었다고: 바로 공자(孔子), 왕양명(王陽明), 그리고 증국번(曾國藩, 절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삼립'의 최고경지는 조조삼부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본다

 

왜 조조의 삼부자가 입덕, 입공, 입언에 뜻을 세우고 또한 이루었다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의 최초의 이름에 '삼립'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조는 이름(名)과 자(字)가 사람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았다. 그가 어떻게 이름을 지었는지를 살펴보자.

 

조조의 이름은 조(操)이고, 자는 맹덕(孟德)이다. 둘을 결합해서 보면, '조'는 바로 절조(節操), 조수(操守)이다; 맹덕은 바로 '맹자의 덕'을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맹자의 덕이지 공자의 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의 덕의 정수는 인정(仁政)이다. 관을 덮어야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조조는 비록 천자를 옆구리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법가의 수단을 썼지만, 어쨌든 그는 한나라를 찬탈하지는 않았고, 만년의 절개를 보전했다. 손숙이 그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자 그는 말한다: "이 녀석은 노부를 화로에 밀어넣으려고 하는구나"; 여러 신하들이 그에게 황위에 오를 것을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周文王)이다" 조조가 이렇게 사양하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찌감치 그는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임무는 시인입덕(施仁立德)이지, 아들로 하여금 황제위에 오르는 공을 달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조의 이름과 자는 모두 명사이다.

 

조비의 이름은 비(丕)이고, 자는 자환(子桓)이다. 그중 '비'는 크다는 의미이고; '환'의 본뜻은 표주(表柱)이다. 고대에 역참, 관청등의 건축물 곁에 표시를 하는 나무기둥을 세우는데 후세에 이를 화표(華表)라고 불렀다. 이것은 큰 업적, 높은 관직을 상징한다. 조비는 나중에 과연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한나라의 황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조위의 개국황제에 등극하여, 위문제(魏文帝)가 된다. 그의 업적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비와 환은 모두 형용사로 볼 수 있다.

 

조식(曹植)의 이름은 식이고 자는 자건(子建)이다. <예기.단궁>에 "사식위지환(四植謂之桓)"이라는 말이 있고, <주례.대종백>에는 "쌍식위지환(雙植謂之桓), 환궁실지상(桓宮室之象), 소이안기상야(所以安其上也)."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조식의 '식'은 환(桓)을 지탱하는 나무기둥이다. 그러나, 자건의 '건'과 결합하면, '식'은 동사인 심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뜻은 형들을 도와서 패업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조는 조식에게 그저 태자를 곁에서 도와서 같이 책을 읽고, 조비를 따르도록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의 '건'은 간(諫)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간의(諫議), 간언(諫言). 이와 같이 조식은 신하인 동시에 독립된 '입언'의 사명도 지니고있는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조조가 일찌감치 두 아들에게 직업계획을 마련해 두었는데, 왜 나중에 그들간에 세자의 자리를 다투는 일이 발생했을까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성공하게 만들어 조비가 정치에 전념하도록 만들고, 실패하게 만들어 조식은 문학에 전념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조는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싸움을 그치도록 하고, 조비를 도와 조식의 심복인 양수등을 제거한다. 조조는 혼자서 '삼립'을 모두 이룰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삼립'중에서 '입덕'이 최고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의 자리를 지키면서 맹자지덕을 지미켠서 후계자를 기른 것이다. 유비를 생각해보라. 유비도 이름을 보면 그 자신은 입덕(立德, 자가 玄德임)하고, 아들 유선(劉禪)으로 하여금 '선양(禪讓)'을 받아 입공을 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만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넘치면 손해보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다(滿招損, 謙受益). 조조의 자제는 결국 큰 보답을 받는다. 아들 조비는 북방을 통일한 황제가 되었을 뿐아니라, 치국의 면에서는 부친도 미치지 못하는 웅재대략을 보인다. 짧은 6년만에 국부민강을 이루었다. 그외에 조비는 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보인다. 중국의 첫번재 칠언시 <연가행>을 지었고, 첫번재 문학비평서인 <전론>도 썼다.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문장이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며 불후의 성사이다" 그러나 조비는 부친처럼 이성적이었다. 시종 건공입업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고, 입언과 입덕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늘이 큰 임무를 세 사람에게 내렸다. 조식은 입공의 기회는 놓쳤지만, 입언에 필요한 무한한 적막과 우울을 얻었다. 그는 뛰어나게 조조와 조비가 모두 열중하였지만 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불후의 문장을 완성했다. 삼조(三曹) 중에서, 조식의 시문은 가장 뛰어나다. <낙신부> 하나만 하더라도 후세인들이 감탄하며 우러러 보는 것이다.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일은 그의 <칠보시>가 입언중의 간언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제가 서로 싸우는 배후에는 간신의 이간질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조비는 즉시 그 뜻을 이해하고 조식을 풀어준다.

 

이를 보면, 삼립간에는 상호의존성이 있을 뿐아니라, 물고기와 곰발바닥은 둘 다 가질 수 없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조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뿌리는 같았지만, 잎은 각자 무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