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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위무자손(魏武子孫)"과 "조만유종(曹瞞遺種)"

by 중은우시 2012. 1. 31.

글: 갈검웅(葛劍雄)

 

"장군위무지자손(將軍魏武之子孫), 어금위서위청문(於今爲庶爲淸門)"

장군은 위무제 즉, 조조의 자손인데, 지금은 평범한 백성집안이 되었네.

 

이것은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가 유명화가인 조패(曹覇)에게 써준 시 <단청인(丹靑引)>의 첫부분이다. 비록 당시에 조패는 이미 평민이 되었지만, 두보는 여전히 가가 일찌기 좌무위장군의 영광스러운 직위에 있었다는 점과 출신이 고귀하여 위무제 조조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곧이어 두보는 이렇게 쓴다.

 

"영웅할거수이의(英雄割據雖已矣), 문채풍류금상존(文采風流今尙存)"

영웅이 할거하던 시대는 이미 흘러갔지만, 글과 풍류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네.

 

더더욱 직접적으로 조조가 문무를 겸비하였다는 것을 찬양한다. 영웅으로 할거하던 성취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렸지만, 그가 남긴 시와 글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1919년 5월 4일, 북경의 학생시위대는 천안문을 지나간다. 여러개의 횡폭 표어들 중에서 하얀 색의 큰 깃발이 있었고, 그 위에는 만련(挽聯)이 쓰여 있었다.

 

"매국구영(賣國求榮), 조지조만유종비무자(早知曹瞞遺種碑無字)

경심미외(傾心媚外), 불기장돈여얼사유두(不期章惇餘孼死有頭)"

 

위는 조여림(曹汝霖)이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욕하는 것이다. 그의 성이 '조(曹)'이므로, 그를 조조의 후인이라고 한 것이고, 조조의 아명인 '조만'으로 불러 멸시를 나타냈다. 이를 보면, 5.4시기에 조조는 이미 역사의 간웅으로 자리잡았고, 조여림의 매국까지도 그의 이 '조상'과 관련시키게 되었다.

 

역사의 일부 명인에 대하여 왕왕 전혀 다른 평가가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시기에 그러기도 한다. 조조는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1958년, 곽말약(郭沫若)등은 조조를 명예회복시킬 것을 제안한다. 과거에 통치계급이 봉건정통관념을 위하여 조조를 폄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사실을 근거로 반박했다. 예를 들어, 서진(西晋)의 육기(陸機)는 조조에 대하여 "비록 공적은 있지만, 포학이 심했고,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한편으로 그를 "비상지인(非常之人),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고 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를 "교정임산(矯情任算)" "학역심의(虐亦深矣)", "기민원의(其民怨矣)"라고 평가하였다. 동진(東晋)의 습착치(習鑿齒)는 자신이 쓴 <한진춘추>에서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아 조조를 '찬역(纂逆)'이라 하였다. 같은 시대의 매진(梅晋)은 대신 도간(陶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기명신감여위무(機明神鑒如魏武)

충순근로사공명(忠順勤勞似孔明)

 

여기서 조조를 제갈공명과 나란히 언급했을 뿐아니라, 그를 더 높은 모범으로 내세웠다.

 

당나라의 역사학자 유지궤(劉知几)는 조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적살모후(賊殺母后), 유박주상(幽迫主上), 죄백전상(罪百田常), 화천왕망(禍千王莽)"

도적(조조)는 모후를 죽이고, 주상을 핍박하였으니, 그 죄가 백명의 전상과 같고, 그 화는 천명의 왕망과 같다.

 

이는 온갖 나쁜 짓은 다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 "위무" "문채풍류"와 완전히 반대된다.

 

북송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삼아, 조조를 극찬한다: "삼예군웅(芟刈群雄), 기평해내(幾平海內)", "지인선찰(知人善察), 난현이위(難眩以僞), 식발기재(識拔奇才), 불구미천(不拘微賤)" "공로의상(功勞宜賞), 불린천금(不吝千金), 무공망시(無功望施), 분호불여(分毫不餘)", "아성절검(雅性節儉), 불호화려(不好華麗)".

 

그러나, 남송의 주희가 쓴 <통감강목>에서는 다시 촉한을 정통으로 삼는다. 조조는 "참위(僭僞)"가 된다. 이를 보면 조조에 대한 평가는 계급입장과도 무관하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늦어도 북송때부터, 조조는 거의 계속 '악인'으로 비친다. <삼국연의>가 세상에 나오고 전해지면서 조조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있게 된다. 가면갈수록 뿌리가 깊어진다. 5.4시대의 대학생들은 혹은 이미 역사상 진정한 조조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비록 알더라도 민간의 호오(好惡)에 연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