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서서(吳書書)
조조는 웅재대략의 인물로 지모가 출중했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처첩은 십여명이다: 정부인(丁夫人), 유부인(劉夫人), 변부인, 환부인(環夫人), 두부인, 진부인, 윤부인, 왕소의, 손희, 이희, 주희, 유희, 송희, 조희, 진첩등이 그들이다. 그들 중 가장 총애한 것은 변부인이다.
동한말기,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백성들은 살기 힘들었다. 나이 스물 가까운 변씨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예인(藝人)집안의 직업을 물려받아 가무기(歌舞伎)였다. 그녀는 부모를 따라 낭야 개양(지금의 산동 임기)에서 전전하여 초현(안휘)까지 흘러들어왔다. 조조는 돈구령을 맡고 있던 기간에 매부에 연좌되어 관직을 읽고, 병을 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책을 읽고, 사냥을 하며, 숨어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음률을 아주 좋아했는데, 변씨가 재색을 겸비한 것을 보고 첩으로 들이게 된다. 그후 조조가 낙양에서 북도위로 있는 동아, 변씨는 아이를 낳기 위하여 초현으로 돌아간다. 187년에 그녀는 조비(曹丕)를 낳는다.
189년, 효기교위를 맡고 있던 조조는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미복으로 도망쳐 피난한다. 어떤 사람이 초현으로 와서 조조가 이미 죽었다는 흉보를 전했다. 조씨일가는 상하가 모두 혼란에 휩싸인다. 많은 옛부하들은 짐을 싸서 조씨집안을 떠나려고 준비했다. 이때, 나이 28세의 변씨가 일어나서 말한다: “조조의 길흉은 아직 알지 못한다. 오늘 집으로 돌아갔는데, 내일 조조가 돌아와 있으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얼굴을 보려는가. 화가 닥치면 함께 죽으면 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조씨집안에 남아서 변씨의 지시를 따른다. 변씨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안목이 탁월했으며,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무를 조리있게 처리했다. 그녀는 난세에 남편을 위하여 한 무리의 힘을 비축해준 것이다.
조조의 본처는 정씨인데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씨를 첩으로 들인다. 유씨는 조앙(曹昻)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정씨는 조앙을 정성껏 길렀다. 조앙은 조조를 따라 장수(張綉)를 공격하다가 불행히도 사망하고 만다. 정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한다. 조조는 일시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씨를 고향집으로 돌려보낸다. 이때 아직도 첩으로 있던 변씨는 조조에게 정씨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데려오라고 설득한다. 조조도 옛정을 기억하고 정씨의 집으로 간다. 정씨는 직포기앞에 실의에 빠져 앉아 있었다. 조조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겠는가?” 정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조를 아주 난감하게 만들었다.
216년, 조조는 한헌제로부터 위왕(魏王)에 봉해진다. 219년 조조는 변부인을 왕후(王后)로 올린다. 정씨는 고집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여인이다. 예전에 변부인에게 욕을 하고 못되게 굴며, 변씨부자를 괴롭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변씨는 왕후가 된 후에, 옛날의 원한을 잊고, 자주 사람을 시켜 정씨에게 물건을 보낸다. 어떤 때는 남편이 집에 없을 때, 정씨를 집으로 모셔와서, 정씨를 윗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니, 옛날과 같았다. 정씨는 그녀에게 감사해 했다: “쫓겨난 사람을 부인이 어찌 예전처럼 대해주는가?” 여성으로서 이런 흉금을 지니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번은, 조조가 예쁜 귀걸이를 몇 개 구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변부인에게 먼저 고르라고 하니, 변부인은 잠깐 살펴보고는 중간등급의 귀걸이를 하나 골랐다. 조조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변씨가 대답했다: “좋은 것을 고르면 탐욕스러운 것이고, 나쁜 것을 고르면 가식이다. 그래서 가운데 것으로 고른 것이다.” 궁중투쟁이 치열하여, 조비와 조식이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을 때, 변부인은 모른 척하고 그저 천명에 맡겼다. 조비가 마침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자, 누군가 바로 변부인에게 축하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변부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왕은 (조)비가 나이가 많으니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나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과실이 없게 되었으니 그걸로 다행일 뿐이다. 그게 무슨 크게 기뻐할 일이겠는가?” 조조는 변씨의 이런 말을 듣고, 감탄했다고 한다: “화가 났을 때 얼굴색이 바뀌지 않고, 기뻤을 때 기품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변씨는 허창으로 간 후에, 매번 봄이 되면, 고향의 청매(靑梅)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어지러운 시절에 고향의 청매를 맛볼 기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조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부하를 시켜서 고향의 청매나무를 몇그루 집 근처의 구곡하 변에 옮겨싴게 한다. 매번 청매가 익을 계절이 되면,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변부인은 기뻐서 활짝 웃었다. 조조는 청매나무 가운데 정자를 지어서, “청매정”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곳은 가장 격이 높은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가 된다. 변부인에 있어서 조조는 지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연의>> 제21회의 ‘조조자주논영웅(曹操煮酒論英雄)’을 보면 조조가 허저, 장료등에게 후원에서 야채를 씻고 있는 유비를 매림소정(梅林小亭)으로 불러오게 한다.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나뭇가지끝의 매실이 파란 것을 보니, 작년에 장수를 정벌하러 갔을 때, 길에서 물이 모자라, 장병들이 모두 목말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디어를 내서, 채찍으로 허공을 가리키면서, ‘앞에 매화나무숲이 있다’고 소리쳤다.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입안에 침이 고여서 갈증을 잊게 된다. 오늘 이 매화나무를 보니, 맛보지 않을 수가 없겠다. 마침 술이 따뜻하게 되었으니, 그대를 이 작은 정자로 불러서 잠깐 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삼국연의>>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고, 나관중 선생의 득의의 글이기도 하다.
조조가 허창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스스로 사공이 된 것이 196년의 일이고, 병사를 이끌고 장수를 치러간 것이 197년의 일이다. ‘자주논영웅’은 198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변부인을 위하여 매화숲을 가꾼 것은 여러해전의 일일 것이다. ‘가지끝에 매실이 파랗다’고 하려면, 짧은 3,5년만에 이루러질 수는 없는 것일 것이다.
조조는 220년에 병사한다. 변부인은 조위 태화4년(230년)에 병사한다. “그해 오월, 황후가 붕어하다. 칠월, 고릉에 합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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