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의 의심으로 인한 3차례 살인

중은우시 2013. 2. 8. 19:15

글: 염호강(閻浩崗) 

 

<삼국연의>의 조조는 "휼(譎, 속이다)"과 "폭(暴)"으로 유명하다. "휼"에 관하여는 다른 글에서 적었고, "폭"은 살인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기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조조가 천성적으로 살인을 좋아하는 심리적 변태이기 때문은 아니다. 한가지 상황은 극도의 분노이다. 예를 들어 서주를 정벌하는 도중의 도살은 복수시의 분노때문이었다. 그 심리는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하러 떠난 것이나, 무송의 "혈전원앙루(血濺鴛鴦樓)" 때와 상황이 유사하다. 또 다른 상황은 사업을 성공하는데 필요해서이다. 예를 들어, 창관(倉官) 왕후(王垕)의 수급을 가지고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병의 원망과 분노를 평정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황은 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다. 

 

조조의 의심으로 인한 살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3번이 있다. 제1차는, 동탁을 모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하는 중에 여백사(呂伯奢)의 일가 8명을 오인하여 죽인 것이고, 제2차는, 소위 "몽중살인(夢中殺人)"이고, 제3차는 그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화타(華佗)를 죽인 것이다.

 

여백사 일가를 죽일 때, 조조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상태였다.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심리상태하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보통 보통의 도주중인 살인범의 심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머문 곳은 부친의 결의형제 집이다. 당연히 안심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친구이지, 자신의 친구가 아니다. 그 자신도 여백사에 대하여 따로 잘 알지 못했다. 본인의 친구라고 하더라도 오래 헤어져 있게 되면, 상대방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유비,관우,장비가 흩어진 후에 장비도 관우를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관우와 죽기살기로 싸우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날 저녁,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하에서, 여백사의 거동은 확실히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전에 이미 조조가 수배된 것을 알고 있었다. 조조와 진궁(陳宮)을 안심시킨 후에, 그는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가 나갔다. 이 '한참'을 있었다는 것은 집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에게 조조가 도망범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행동방안을 미리 준비해둔 것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술을 가지러 간다고 말하면서 총총 떠나버린다. 만일 우리가 무슨 미스테리영화를 본다면 여기에서 분명히 도망자는 우려를 하게 될 것이다. 여씨노인은 아마도 관군에 고발하려 간 것일 것이다.

 

만일 단순히 이렇다면 조조는 기다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진궁이 자리에 앉은지 한참이 지난 후, 돌연 집뒤에서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는 몰래 진궁에게 말한다. 자신은 여백사의 집안과 무슨 가까운 친척도 아닌데, 여백사의 행위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초당으로 가서 몰래 듣는다. 마침 바깥에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묶어놓고 죽이는게 어떨까?" 이때 진궁조차도 자신들이 암산에 당했다고 느꼈다. 조조와 함께 검을 들고 뛰어들어갔다. 여씨집안 사람들을 멸문시킨다. 당시 조사연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여씨집안은 사람이 많아서 조조,진궁 두 사람만으로는 열세에 처했다. 반드시 여씨집안사람들이 준비하고 있지 않은 틈을 노려 기습해야 했다. 당연히 냉정한 상태하였다면 자신들의 논리에 '헛점'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손님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왜 하필 지금 칼을 갈고, 그렇게 큰 소리를 내야 했을까?

 

어찌되었건, 이런 사근은 아주 비극적이고, 유감스럽지만, 그다지 정상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최소한 진궁도 그렇다고 여긴 것이다. 곧이어 발생한 일은 완전히 조조의 도덕문제이다. 그는 진상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술을 사러갔다가 돌아오는 여백사 본인까지 죽여버린다. 이에 대한 진궁의 평가는 "알면서도 죽이는 것은 너무 불의하다." 진궁은 이로 인하여 조조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정치가 조조를 보면, 그가 한 일은 정리에 맞는다. 여백사가 돌아와서 온집안 식구들이 살해된 것을 보면, 반드시 사람들을 이끌고 추격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체 삼국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그의 '대업'을 위하여 그는 억울한 백성 한두명을 죽이는 것은 별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여백사 본인을 죽인 것은, 왕후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위의 두번째 상황에 속하는 것이다.

 

소위 "몽중살인"은 기실 조조의 자아방어조치이다. 사업이 전성기에 도달한 후, 그는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이 너무 많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서 항상 대비를 해야 했다. 장비처럼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자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나중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장비처럼 눈을 뜨고 자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는 일찌기 동탁이 낮잠을 잘 때 암살을 시도했다. 이 방식에 대하여 그는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근신시위 하나를 먼저 죽이는 것은 야간에 그의 침상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당연히 이렇게 한 후에 조조는 저녁에 잠잘때 스스로 조심해야 했다. 잠이 든 후에 이불을 함부로 차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불을 차더라도 아무도 다시 덮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감기에 감기약이 없고, 열이 나도 해열제가 없었다. 고열은 당시에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화타가 병치료를 빙자하여 자신을 해친다고 의심한 것은 더욱 정리에 맞는다. 길평(吉平)이 바로 그에게 병을 치료하는 척하며 독을 쓰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서, 이 화타는 관우의 상처를 치료해준 바 있다. 그래서 관우의 팬이 되었다. 관우는 또한 막 살해되었다. 그 때 두개골을 여는 수술은 신의라 하더라도 100%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두개골을 여는 수술은 가족에게 동의서를 받고 하지 않는가. 화타가 조비, 조식 혹은 조조의 대부인, 둘째부인을 찾아서 서명하게 할 것인가. 화타는 관우가 팔뚝을 치료하면서 아픔을 겁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조조에게 격장계를 쓴다.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침을 놓으면서, "옆집의 어린 친구는 주사를 맞으면서 한마디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는 조조에게 하는 수술이 "소가지질(小可之疾)"이라고 하였다. 그 말투는 마치 감기, 기침 혹은 치통을 치료하는 것과 같았다. 누가 믿겠는가. 그가 내놓은 임상경험은 관우의 팔뚝을 치료한 것인데 그건 더욱 관계가 없다. 조조의 질문은 정확했다: "팔뚝의 살을 자르는 것과, 도끼로 머리를 깨는 것을 어찌 같이 논할 수 있는가" 만일 화타가 조금만 잘못하면, 조조의 머리는 장작처럼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조조가 두려워한 것도 이치에 맞고, 의심한 것도 이치에 맞는다.

 

다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의사가 자신을 모살하려고 한다고 단정한 것은 법률에 따라 처리한 것이 아닌 점이 있다. 그는 단지 치료방안을 내놓았을 뿐인데, 설사 네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설사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그를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되고, 죽여서는 안된다. 조조 네가 이렇게 권력으로 사람을 핍박하고, 권세로 압박하는 것은 바로 의료스캔들이다.

 

조조의 의심은 이치에 맞지만, 그의 의심은 개인적인 품성과 관계가 있다. 유사한 사건과 비교해보면, 조조가 장수(張繡)를 토벌하다가 실패했을 때, 누군가 그에게 우금(于禁)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한다. 조조는 한때 이를 빋었다; 유비의 부대가 장판파에서 궤멸하고 패퇴했을 때, 누군가 조운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이때는 장비까지도 믿었다. 그러나, 유비는 끝까지 믿지 않았다.

 

의심을 좋아하는 사람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 자신도 그렇게 해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리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이기탁인(以己度人,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도둑의 눈에는 도둑만 보인다는 말이다.

 

이 이치는 앞에서도 얘기한 바 있다. 충후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충후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