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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황제사후 비불발상(秘不發喪)의 비밀

by 중은우시 2012. 4. 12.

글: 대지약(大智若)

 

일세를 풍미하고, 권력을 독단,전횡하며 풍운을 질타했던 황제가 죽은  후에 시체가 썩을 때까지 그냥 놔두고 장례식을 치르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이들 제왕의 시체에는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제환공의 경우

 

공자소백(公子小白)이 계모를 써서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나중에 송환공, 진선공, 위혜공등과 회맹을 맺었고, 제후들이 제환공을 패주로 추대한다. 제환공은 춘추제일패가 된다. 씁쓸한 점은 제환공이 죽은 후 사망사실을 감추고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비불발상)는 점이다.

 

제환공은 10월에 사망한다. 그러나, 왕위쟁탈을 위하여, 제환공의 다섯 아들은 서로 편을 갈라서 싸웠다. 궁중은 비어 있었고, 아무도 제환공이 시신을 염하지 않았다. 제환공의 시신은 침대위에 67일간 방치되어 있었다. 시체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그 구더기가 문 위로 기어올라갔다. 왕위계승인이 되는 자가 제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것이다.

 

나중에 십이월이 되어 공자무궤(公子無詭)가 즉위한다. 그제서야 사망소식을 공표하고, 시신을 염하여 입관시킨다.

 

진시황의 경우

 

중국의 첫번째 황제인 진시황이 죽은 후에도 그러했다.

 

그때, 진시황은 친히 갑옷을 입고 나서서 바다위에서 큰 물고기를 쏘아죽인다. 이렇게 하여 장생불로의 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진시황은 병을 얻고, 그대로 죽는다. 죽기 전에, 진시황은 아들 부소에게 유서를 남긴다. 부소로 하여금 전선에서 돌아와 장례를 주재하도록 한 것이다. 이 유서는 사실 부소를 후계자로 암시한 것이다. 누구든지 후임 황제가 될 사람이 전임황제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다.

 

당시는 칠월이었고, 혹서의 계절이었다. 이 일로 이사는 골머리를 앓는다. 진시황은 황성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므로, 천하에 진시황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면, 원래 들썩들썩하던 제후들이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진시황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황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사는 비불발상을 결정한다.

 

당시, 진시황을 따라 외출한 관리들은 모두 진시황이 죽은 줄을 알지 못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진시황의 수레에 먹을 것도 넣어주고, 공문서도 넣어주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관리들에게 진시황은 건강하게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수행하던 사람에는 조고와 진시황의 어린아들 호해가 있었다. 조고는 진시황의 유서를 찢어보고는 유서를 뜯어고쳐, 호해를 태자로 삼는다.

 

진시황은 사구평대에서 죽었는데, 지금의 하북성 평향이다. 일행은 보무당당하게 함양으로 돌아온다. 당시는 혹서기이고, 평향은 함양에서 수천리 떨어져 있어, 시신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조고는 사람들에게 가마안에 죽은 물고기와 새우를 가져다 놓게 하였다. 사람들에게 썩은 냄새는 물고기와 새우가 썩어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시신을 함양으로 운송해온 후, 장례의식을 거행하고, 진시황을 여산에 묻는다. 이때는 진시황이 죽은 때로부터 이미 2달이 지난 다음이다. 아마도 진시황의 시신은 이미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

 

유방의 경우

 

평민으로서 거병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진시황과 같은 운명이었다. 그도 자신의 시신을 결정하지 못한다. 사월십며칠, 유방은 장락궁에서 사망한다. 사후, 여후는 자신의 애인인 심이기와 협의한다. 장군들은 모두 유방과 마찬가지로 평민에서 거병하였는데, 지금 유방이 죽었고, 그들에게 어린 군왕을 보필하라고 하면 분명히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예 이들 장군들을 모조리 주살하여야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후와 심이기가 장군들을 없애기로 밀모했으므로, 유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대외에 알려서는 안되었다. 4일이 지난 후, 장군 여상이 심이기에게 말한다. 황제가 죽은지 이미 4일이나 되었는데, 여전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군을 주살할 계획을 꾸민다는데, 과연 그러하다면, 천하가 위험해진다. 장군들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고, 자신들이 주살당할 것을 안다면 분명히 정변을 일으킬 것이다. 대신들도 조정내에서 반란에 가담할 것이고, 제후들은 바깥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멸망하지 않겠는가?

 

여후와 심이기는 다시 협의한 후, 사월 이십며칠이 되어서야 장례를 치른다. 제환공이나 진시황과 비교하면 유방은 행운아이다. 그의 시신은 겨우 십여일만 놓여 있었다. 사월은 약간 더워지기 시작한 때이다. 십일을 놔두었다면 분명 부패했을 것이다.

 

비불발상의 원인

 

왜 세명의 제왕이 죽은 후, 시신에서 부패한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생길 때까지 죽은 사실을 감추고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일까?

 

첫째, 독재자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모두 권력을 탐하여, 죽지 않을 줄로만 알았고, 2선으로 물러날 줄 몰랐다.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태자를 세우지 않는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비불발상의 주요원인이다. 이로 인하여 조고는 유조를 뜯어고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둘째, 정치갈등으로 인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다. 진시황과 한고조의 사후에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은 원인이 같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있었고, 만일 바로 장례를 치른다면 각종 정치세력들의 반란이 초래될 수 있었다.

 

셋째, 정계내부투쟁의 결과이다. 내부투쟁은 중국고대정계의 한 특징이다. 만일 궁정에서 이상한 현상이 보이면, 분명히 내부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제환공의 다섯 아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죽고 죽였다. 유방이 살아있을 때,외척의 권력장악을 금지했다. 유방이 죽은 후, 여후는 권력탈취를 위하여, 유방이 죽은 소식을 감추고, 장군들을 죽여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