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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의 태상황(太上皇) - 송,명,청

by 중은우시 2012. 3. 14.

글: 소가노대(蘇家老大)

 

중국역사상 당왕조의 태상황과 수량이 같은 것은 송왕조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태상황은 대부분 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나타난 것과는 달리, 송나라의 태상황은 기본적으로, "강적이 국경으로 압박해 들어오자 황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 경우와 정무에 염증을 느껴서 황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 경우이다.

 

송나라의 첫번째 태상황은 송휘종 조길(趙佶)이다. 그는 그저 예술가에 불과하지 황제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조길이 황제로 있던 25년간, 그는 간사하고 아부하는 무리를 가까이 하고 정의로운 선비들을 멀리했다. 토목공사를 대거 벌이고, 놀고 즐기는데만 주력했다. 그래서, 채경, 동관, 고구등의 간신들이 조길의 흥취에 영합하여 국력을 소모하고 국정을 태만히 하여 국내에서는 백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국외에서는 강적이 국경을 압박하게 된다. 내외적으로 힘든 상황하에서 금나라의 병사들이 2로로 나누어 공격해 들어오자, 선화7년(1125년) 송휘종은 어쩔 수 없이 "죄기조(罪己詔)"를 내린다. 그러나, 부패정치는 이미 뼛속까지 썩어서, 이러한 조치로 해결될 수가 없었다. 매일 불안에 떨던 송휘종은 책임을 떠넘기는 마지막 선택으로 북제의 고담, 고위부자에게 배워서, 엉망진창인 정국을 아들에게 떠넘긴다. 황태자 조환은 이때 황위는 그저 화산에 앉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사양해도 어쩔 수 없게되어, 조환은 선화7년 십이월 황제위에 오른다. 다음해 연호를 정강(靖康)으로 고친다. 송회종은 교주도군태상황제(敎主道君太上皇帝)로 모신다. 조환은 역사상 송흠종으로 불린다.

 

송흠종 조환이 즉위한 후, 정치를 쇄신하여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한다. 반년동안, 전조의 총신 채경등이 모조리 주살당한다. 태상황의 체면은 전혀 봐주지 않는다. 그의 정돈노력은 크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정치수완도 강력했다. 그러나 국가의 적폐는 이미 그 어떤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절대로 몇 사람을 바꾼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금나라군대가 밀려오자, 조환은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정강2년(1127년) 사월, 송휘종 조길의 태상황제로서의 아름다운 꿈은 악몽으로 바뀐다. 태상황 조길, 황제 조환, 황후, 황태자, 그리고 귀족관리, 내시궁녀, 공장창우(工匠唱優)등 수천명이 금나라의 포로가 된다. 황궁과 국고의 모든 부물과 함께 금나라군대에 의하여 북으로 압송된다. 이것이 바로 후세인들이 안타까워하는 '정강지치'이다. 북송168년의 국운은 이로서 태상황 조길의 손에서 망쳐진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태상황은 금나라사람들에 의하여 모욕적인 "혼덕공(昏德公)"이라는 칭호를 받고, 굴욕적인 여생을 지낸다. 소흥오년(1135년) 오월, 오국성(지금의 흑룡강성 의란현 서북부)에서 객사한다. 향년 54세이다. 기실 태상황 조길의 이런 말로는 완전히 그 자신의 잘못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잘못한 것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다.

 

조길은 태상황에서 포로로 되었다. 조환은 포로수용소에서 태상황이 된다. 건염원년(1127년) 오월, 금나라병사의 추격에서 도망친 강왕 조구(趙構)는 여러 신하의 옹립으로 응천부(하남성 상구)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건염으로 바꾼다. 역사는 조구를 송고종이라 칭한다. 황제가 된 조구는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형님인 송흠종 조환을 "효자연성황제(孝慈淵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이런 태상황에 유사한 명예칭호는 조구의 정치쇼이다. 금나라군영에서 하루를 일년처럼 보내는 황제 조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소흥3년(1373년) 오월, 6년을 고생한 "효자연성황제"는 포로수용소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친보다 2년 먼저 사망한다.

 

송고종 조구는 여러번 금나라병사에 추격을 당한다. 전반생의 대부분은 놀람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다. 금나라사람에게 놀란 그는 일생동안 금나라와 강화(講和)하는데 썼다. 바로 그는 강화후에 황제의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기 위하여 십이도 금패로 이미 주선진(하남 개봉현 서남부)을 차지한 악가군을 불러들인다. 이로써 중원강산을 수복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후 그는 간신 진회로 하여금 '막수유'의 죄명으로 소흥41년(1142년) 십이월 악비부자를 대리사옥중에서 죽인다. 금나라와의 평화회담이 성공하였지만, 아들황제는 처신이 어렵다. 갈기갈기 찢어진 강산을 보고 그는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36년간 황제를 지낸 후, 소흥32년(1163년) 육월 황테자 조신(趙)을 황제위에 즉위시킨다. 그 자신은 태상황제가 된다. 이선에 물러난 이 태상황은 아주 장수한다. 태상황을 27년간 지낸다. 순희14년(1190년) 십월에 비로소 덕수전에서 붕어한다. 향년 81세이다.

 

조신은 소흥32년에 즉위하였고, 역사상 송효종으로 불린다. 이 송효종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다. 송태조 조광윤의 칠대손이다. 조신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구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신을 후계자로 삼아서 자신의 후사를 잇게 한 것이다. 조광윤은 아마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200년이나 지나서, 그의 칠대손이 다시 그의 동생 조광의의 일맥으로부터 황위를 받아올 줄은. 그러나, 조신은 황제로 편하게 있지 못했다. 그는 비록 28년간이나 황제로 있었지만, 27년을 태상황의 그림자 아래에서 지내야 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순희16년(1192년) 이월, 송효종은 황태자에게 황제위를 양위하는 조서를 내린다. 그날 황태자 조돈(趙惇)이 즉위하니 그가 송광종이다. 송광종은 효종을 지존수황성제(至尊壽皇聖帝)로 존칭을 바친다. 지존수황성제는 소희5년(1197년) 육월 중화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68세이다.

 

송광종 조돈은 송효종의 셋째아들이다. 처음에 즉위한 후 조세를 경감시키고 형벌은 완화했다. 나라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공처가였다. 황후 이씨는 질투심이 많고 발호앴다. 황제는 황후를 통제하지 못했다. 송광종은 이로 인하여 병이 들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정무는 다수가 황후 이씨에 의하여 결정된다. 태상황이 병사했는데, 송광종은 병약하여 장례를 집전할 수 없었다. 조정신하들은 태황태후에게 조서를 내려 황제위를 황태자 조확에게 전하도록 요청한다. 소희5년 칠월, 태황태후는 송광종이 질병으로 장례를 집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황태자에게 황제위에 오르도록 한다. 그가 송녕종이다. 그는 송광종을 성안수인태상황제로 존칭한다. 6년이 지난 후, 태상황은 수강궁에서 붕어하니 향년 54세이다.

 

명나라때는 단지 1명의 특수한 "태상황"이 나타난다. 바로 명영종 주기진이다. 명나라 정통14년(1449년) 칠월, 북방몽골의 와라(瓦剌)부락이 4로로 나누어 진격해왔다. 젊은 명영종은 그가 총애하는 환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정을 결정한다. 그 결과 토목보(하북성 회래)에서 패배하고, 영종은 와라의 포로가 된다.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나 조정은 깜짝 놀라고, 혼란에 빠진다. 위기의 순간에, 대신 우겸 등은 명영종의 동생인 주기옥을 등극시킨다. 그가 명경제이다. 이 비상조치는 과연 효과가 있었다. 혼란된 정국을 안정시키고, 흩어진 인심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군민은 모두 적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우겸의 지도하에 와라인들의 경성에 대한 포위공격을 막아낸다. 포로수용소의 명영종은 태상황으로 존칭을 받는다. 다음 해, 아무런 가치도 없어진 태상황을 와라인들은 명나라로 돌려보낸다. 명경제가 친히 맞이한다. 곧이어 권력투쟁이 벌어져서, 형제간에 서로를 공격한다. 결국 명영종이 복권하고, 명경제가 실권한다. 실권후의 주기옥은 우울증에 빠져서 죽는다. 이를 보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황권은 쉽게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이 목숨줄이다.

 

마지막으로 명실상부한 태상황은 청왕조의 건륭제이다. 건륭은 바로 청고종 홍력이다. 홍력은 25세에 즉위하고, 꼬박 60년간 황제로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건륭은 성조 강희제가 61년간 재위하였던 것을 추월하지 않으려고, 꼬박 60년간 황제위에 있은 후, 건륭60년(1795년) 홍력은 2선으로 물러나고, 황태자 우염에게 양위한다. 그리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표면적으로 건륭이 이선으로 물러나 태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대권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큰 일은 여전히 그가 결정하며, 가경제 우염은 착실하게 몇년간 아들황제로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태상황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그가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의 태상황현상을 이해하면, 중국의 황권정치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신해혁명후, 황권은 타도되었다. 국체도 공화국으로 바뀐다. 그러나, 황권의 그림자는 여전히 중국의 상공에 떠다닌다. 존재한다. 태상황의 그림자는 황권의 그림자가 존재함에 따라 존재한다. 이는 중국이 황제제도를 타도한지 10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깊은 반성이 필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