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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의 양부, 양자.

by 중은우시 2012. 3. 28.

글: 도단방(陶短房)

 

언제부터인지 '양부'는 오락계, 특히 홍콩 대만이 오락계에서 '잠문화(潛文化)'였다. 그런데 지금은 본토에 상륙하였고, 소리소문없이 오락계뿐아니라 반오락계까지 만연되었다. '양자'가 되는 것은 오락권 혹은 반오락권의 인사이고, '양부'가 되는 것은 더욱 유명한 인물들이다. 사실 이러한 기풍을 개혁개방의 부산품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복고(復古) 혹은 반조(返祖)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초에는 대부분 양부가 주동하고 상호이익을 얻는 거래였다.

 

지금 문자로 고증해볼 수 있는 최초의 양부양자조합은 주문왕 희창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아들이 100명인데, 그중 99명은 친아들이고 100번째 1명이 양아들이다. 그러나, 역사상 고증가능한 주문왕의 아들은 겨우 18명에 불과하고 그중 10명이 같은 모친소생이다. "100명아들"이라는 말은 <시경>의 문학적 창작이다. 100번째 양아들은 더더구나 괴이소설이 유행한 후에 나온 이야기이다. 그 소설에 따르면 이 양아들은 날개가 나서,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말도안되는 이야기를 진실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서주시대에 이미 나타난 <시경. 소아. 소원>에는 "명령유자(螟蛉有子), 과라부지(蜾蠃負之)"라는 싯구가 나온다. 이것이 처음으로 양부-양자관계를 묘사한 문자라고 한다. 중국고대인들은 과라(나나니벌)의 집에서 명령(배추벌레)의 유충이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과라가 명령을 입양하여 양아들로 들인 것이라고생각했다. 그래서 '명령'은 양아들을 칭하는 말이 된다. 사실 과라는 자신에게도 생육능력이 있고, 명령의 유충을 들인 것은 자신의 아들에게 먹을 거리를 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부권사회로 접어들면서,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라는 말이 생긴다. 집안을 잇는 것이 지고무상의 큰 일이 된 것이다. 일부 자식을 두지 못한 명문거족은 가업을 잇기 위하여, 부득이 집안내, 모친일족 혹은 처가일족에서 적합한 청소년을 찾아서 양자로 삼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것이다.이러한 '양부자'관계는 자연히 양부가 주도하는 것이다. 양자는 어떤 경우 아직 강보에 쌓여 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만일 양부에게 아들이 없게 되면, 양아들이 가업을 그대로 잇게 된다. 이 가업은 어떤 경우는 주택 하나일 수도 있고, 성 하나일 수도 있고, 심지어 국가 하나일 수도 있다. 중국역사상 양아들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서한왕조에만도 15명의 황제중에서 양아들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한 경우는 전소제 유홍, 후소제 유공, 창읍왕 유하, 선제 유병이, 애제 유흔, 평제 유간, 유자 유영등 모두 7명에 달한다.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북송인종, 남송고종, 영종, 이종도 혹은 아들이 없거나 혹은 아들이 요절하여, 부득이 친척주에서 적합한 아이를 양아들로 삼았고, 황제위를 넘겨주었다. 명나라때도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인 가정제는 양자의 신분이었고, 청나라의 마지막 두 황제인 광서제와 선통제도 양자의 신분이었다.

 

이런 순수하게 대를 잇기 위한 양부자관계에서 양부와 양자간에 반드시 가족의 정이 있게 되지는 않는다. 서한의 두 소제는 내력이 불분명했다. 양부인 유영의 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떨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서, 선통 두 황제의 양부는 병이 골수에까지 퍼진 후에 궁안으로 안아 들어온 것이다. 어떤 경우는 양부가 죽은 후, 태후, 대신이 황제의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억지로 양자로 삼게 했다. 유하, 유병이, 유흔,유간등이 모두 이런 경우이다. 어떤 '양부자'는 심지어 생전에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다. 명나라 가정제 주후총은 '양부'인 정통제 주후조를 만나본 적이 없다. 당연히 양자를 친아들처럼 길러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송고종 조구는 송효종 조신을 사랑했고, 생전에 황위를 이 양아들에게 양위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양부가 양자를 들이는 것은 좋은 이리다. 양부로서는 자신의 가업을 이을 사람이 생겨 후사를 이을 수 있는 것이고, 아들은 졸지에 신분이 상승하고 성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일단 다른 사람을 양부로 받아들이고 나면 자신의 친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한나라때 창읍왕 유하는 황제가 된 후에 아들의 신분으로 친부인 유박의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27일만에 황제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론상 그의 '부친'은 그저 양부인 한소제 유불릉 뿐인 것이다; 한애제 유흔도 같은 문제에 부닥친다. 그러나 머리를 써서 '양부병존'의 방식을 찾아낸다.친부인 유강을 황제보다 반등급낮은 '정도공황(定陶恭皇)'에 봉한다. 그러나 이처럼 고심한 방식도 많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흔이 살아있을 때는 모두 참았지만, 유흔이 죽고 난 후 시신이 식기도 전에, '정도공황'은 원래의 지위로 되돌아가고, '황부'의 행렬에서 이름을 빼버린다; 명나라 가정제는 친부인 주우원을 '친부로 명명'하기 위하여 조정의 대신들과 여러해동안 싸운다. 마지막에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루었지만, 원래 생기넘치던 명왕조는 당쟁이 격심해지고 나라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게 된다.

 

이런 대를 잇기 위한 양자의 가치는 양부가 아들을 낳지 못하기 때문이므로, 일단 상황이 바뀌면 양자의 처지가 난감해진다.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풍신수길이 이런 경우를 만났다. 원래 이미 '관백'의 지위를 계승한 양자 겸 친외조카인 풍신수차를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친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자와 친자가 병존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촉한 유비의 양아들 유봉(劉封)은 실제로 황위를 다툴 야심도 없었지만, 유비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제갈량은 그가 강맹하여 다스리기 힘들다는 이유로 핑계거리를 찾아서 죽여버린다. 후량의 태조인 주온은 친아들이 7명, 양아들이 4명이었다. 서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은 모종의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양아들인 주우문을 편애했다. 그 결과 불만을 품게된 친아들 주우규는 친부와 양동생까지 모조리 죽여버린다. 바로 이런 난감한 경우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친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송인종은 양자를 들이는 것을 계속 늦춰왔다. 당시 송인종에게 양자를 들이라고 극력 권하던 구양수, 범중엄등은 양아들을 먼저 들이고, 만일 친아들이 출생하면 다시 그에게 '적극적으로양보'하게 시키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나 간단하게 본 것이다.

 

이런 류의 가업계승형 양자는 어떤 때는 두 부친을 갖게 된다. 선통제를 예로 들면, 당당하게 이미 죽은 동치, 광서의 두 황제의 양자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두 황제가 모두 후손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자가 어느 한 황제를 양부로 하면, 다른 황제는 후손이 없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양자는 모두 '가장(家長)' 혹은 '관가(管家)'가 찾는다. 양부는 당연히 전임 혹은 현임 '가장'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항생 새로운 일을 벌이기 좋아한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은 다른 사람등에게 양자를 많이 들이도록 했다. 예를 들어, 그에게 피살당한 동왕 양수청은 친아들마저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가 나중에 양수청의 명예를 회복시킨 후 양수청의 친척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주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홍천우를 양천우로 개명시킨 후, 양수청의 양아들로 삼게 해주고, '유동왕(幼東王)'으로 한다; 자신의 장남인 혼천귀복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유천왕(幼天王)인데, 그를 다시 '천형(天兄)' 예수의 양자가 되게 하여 자신과 예수를 모두 잇는 '천명유주(天命幼主)'가 되었다. 이것들은 정교하게 기획된 정치놀음이다. 권신의 가업, 신선의 가업을 모두 홍씨가 계승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양아들이지만, 자신에게는 친아들이다. 하늘아래 이것보다 더 대단한 장사가 있을까?

 

어떤 경우 양부가 주도하는 양자에서 인원수가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인 경우까지 있다. 그들은 가업을 잇게 하기 위하여 양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가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양자로 삼는 것이다.

 

이런 유형이 "양자"는 대체로 신체건장하고 전투를 잘한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성을 고치지만, 어떤 사람은 성을 고치지도 않는다. 최초의 이런 '조수형 양아들'에 대한 기록은 오월쟁패시기이다. 월왕 구천의 휘하에 '군자지사(君子之士)' 6천이 있었다; 수당교체기에 할거자인 고개도는 이런 양아들이 수백명 있었다. 고개도가 자살한 후 이들은 속속 자살하여 순장된다; 당태종 시기에 형부상서 장량은 양자가 오백이었다; 당나라말기 번진 전승사는 '외택남(外宅男)'이라 불리는 양아들이 삼천명이었다, 대서예가 안진경을 죽게 한 군벌 이희열은 양자가 천여명이었다; 당나라말기의 태감 양복공은 '외택랑군'인 양자가 육백명에 이르렀다; 전촉황제 왕건은 139명의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실제 친아들은 9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양아들이었다.

 

'조수형 양아들'이 가장 많은 것은 하마터면 당나라의 운명을 끊을 뻔했던 안록산이다. 그는 "예락하(曳落河)"라 불리는 '의아군(義兒軍)" 팔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수량이 너무 많아서, 엄격한 성격의 사마광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재미있는 것은 안록산 자신도 양자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유주절도사 장수규의 양자였다.

 

'조수형 양아들'은 등급이 나뉜다. 구천, 안록산과 같은 경우는 거의 사단의 절반을 이룰 정도이다. 통상적으로 '양부'는 양아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구천이 오나라를 정벌할 때의 총병력이 어떤 기록에 따르면, "습류 이천, 교사 사만, 군자 육천, 제어 천인"이라고 한다. 즉 수군 이천, 육군 4만, 거병(車兵) 1천, 그리고 양아들 6천인 것이다. 양아들의 대군이 전체 군대 병사수의 1/8을 차지한다. 안록산의 "예락하"는 바로 그의 주력부대였다. 이런 '건제화 양아들'은 개략 현대의 '특전병'이라 할 것이다. 소위 '부자'라는 것은 기실 근대 군벌혼전시 대장이 부하들에게 '형제여러븐' '아이들아'라고 소리친 것과 마찬가지이다.

 

편제가 비교적 적은 양자부대는 양복공, 왕건과 같은 경우, 양아들들이 모두 성을 고쳤다. 예를 들어, 당소종은 양복공에게 "왜 양아들을 모두 양씨로 하고, 이씨로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양복공은 육백의 '외택랑군'을 모두 양씨로 고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기록에는 그들을 모조리 "양수X"(楊守X)"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왕건의 120명의 양아들은 모두 성을 '왕'으로 고쳐서 "왕종X(王宗X)"로 하였다고 한다. 이들 양아들은 내력이 복잡하다. 예를 들어, 왕건의 120명 양자중에서 자신의 친척도 있고, 인척도 있고, 심복도있고, 투항한 장수도 있고, 포로도 있으며, 난민도 있다. 공통된 특색이라면, 전투를 잘하거나 아니면 다른 분야의 특기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엘리트형 양아들"은 능력이 앞에서 말한 '조수형'보다 낫다. 왕왕 모두 중용된다. 양복공의 양아들은 대부분 감군, 자사가 되었고, 왕건의 양아들은 절도사, 태사, 재상 심지어 왕에 봉해진 경우까지 있다.

 

당연히 고위직에 오른 양아들은 이들 "엘리트형 양아들' 중에서도 뽑힌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왕건의 120명 양아들 중에서 왕에 봉해진 것은 겨우 몇 명에 불과하다. 당나라말기 대군벌 이극용은 많은 양아들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린 사람은 9명에 불과하다.

 

이런 양아들은 능력이 있고, 두뇌가 있고, 실력이 있다. 왕왕 자신이 원래는 다른 성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잊어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왕건의 양아들 왕종길(王宗佶)은 왕건이 가장 먼저 받아들인 양아들이다. 그가 양자가 될 때는 친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래서 왕건의 말년에 그는 "관으로는 대신이오, 친하기로는 장남이다. 국가대사와 기쁨과 불행을 같이 한다" 그는 스스로를 합법적인 후계자로 자처했다. 왕건에게 그를 태자로 책봉해달라고 요구하고 대원수에 봉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예상가능할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왕건의 양아들들은 비록 같은 성이지만, '혼인관계를 맺는데 회피하지 않았다'. 이는 확실히 '양부'가 그들은 진정한 아들로 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왕종길은 스스로 너무 나간 것이다. 그의 양동생인 왕종필은 훨씬 교묘했다. 그저 권력만 가졌지, '가족의 정'까지요구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 왕건의 양아들은 한 때 또 다른 군벌인 고언휘(顧彦暉)에게 생포되어 이름을 고침(顧琛)으로 고치고 한동안 고씨집안의 양아들로 있었다. 나중에 고언휘 양부가 왕건에게 멸망당해서, 그는 다시 왕건 양부의 슬하로 돌아간다.  <삼국연의>에서 여포를 "삼성가노(三姓家奴)'라 불렀다. 그러나 정사에는 여포가 정원, 동탁을 의부로 모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왕종필은 확실히 삼성가노이다.

 

당연히 양아들이 능력이 있고, 야심이 있으면, 반은 진짜이고 반은 가짜인 신분을 가지고 대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이극용이 죽은 후, 그의 친아들 이존욱이 계위한다. 나중에 천하를 얻어서 당장종이 된다. 그는 오만하고 마음대로 하는 성격이어서 결국 병변으로 죽는다. 이 혼란을 틈타서 정권을 장악한 것은 바로 이극용의 나이가 가장 많은 양아들인 이사원이다. 이사원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변이 발생하여 양아들 이종가가 후당 마지막 황제에 오른다. 이극용은 당나라의 국성을 쓴 '양아들'이다. 그는 원래 사타족 탁발씨이다. 이사원도 사타족이다. 출신이 한미하므로 성씨도 없었다; 이종가는 한족이다. 원래 이름이 왕아삼(王阿三)이다. 그의 모친인 위씨는 그가 10여세때 이사원의 첩이 된다. 왕아삼은 이때부터 이사원의 양아들 이종가가 된 것이다.

 

양부주도형이 있다면 양아들주도형도 있다.

 

최초로 기록된 양아들주도형의 양아들은 동한의 환관전권시기이다. 십상시는 대부분 이런 양아들을 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조의 부친 조숭은 바로 이러한 양아들주도형의 양아들이다. 그의 원래 성은 하후인데, 대태감 조등을 양부로 모셨다는 것이다.

 

그후 역대왕조에서 이런 '양아들주도형 양자'가 역사서에 끊이지 않는다. 남조때, 양나라 대장군 하후기(夏侯夔)에게는 아들 하후파(夏侯譒)가 있었는데, 반란장수 후경(侯景)에 잘보이기 위하여, "하후'의 '하'를 떼어버리고 자칭 '후파'라 한다. 그가 주도하여 후경의 양아들이 된 것이다. 조금 뒤에, 북조의 권신 화사개(和士開)는 많은 양아들주도형의 양아들을 갖게 된다. 한번은 화사개가 괴이한 병에 걸렸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대변즙을 먹으면 낫는다고 한다. 화사개가 마시지 못하자, 어느 양아들이 몸소 나서서 한번에 마셔버린다. 감동한 양부는 변기통을 들어 대변즙을 한꺼번에 마셔버린다. 과연 괴병이 낳았다. 이 양아들은 당연히 나중에 잘 대우받았다; 명나라말기의 대태감 위충현에게는 양아들이 부지기수였다. 많은 사람들은 현직관리, 장수였다. 이들은 위충현의 손발이 되어 활동력이 컸다. 세상에서는 "오표, 오구, 십해아, 사십손(五彪, 五狗, 十孩兒, 四十孫)"이라고 불렀다.

 

'양아들주도형'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대 후진의 개국황제 석경당이다. 이 후단명종 이사원의 부마이자 후당말주 이종가의 매부인 그는 거란황제 야율덕광을 양부로 모신다. 자칭 '아황제(兒皇帝)'가 된다. 그리고 연운십육주를 예물로 바친다. 그 자신은 원하는대로 황제가 된다. 그후 수백년간 북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

 

이런 양부자관계는 희생이 크다. 사람들이 통상 멸시하기 때문이다.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않지만, 배후에서는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 중국은 종족사회이고, 양아들, 데릴사위같은 류는 지위가 낮다. 한무제가 대완을 정복할 때, 병력이 모자라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양아들, 데릴사위와 형사범 중에서 장정을 뽑았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일을 사람들이 기꺼이 할 리가 없다. 일부러 양자가 되는 것은 자연히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과 이익이다.

 

조조일가처럼, 원래 '어디 출신인지도 모를'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지만, 대태감의 덕을 입어, 명성은 조금 좋지 않지만, 어쨌든 이를 통해서 고관대작의 행열에 들어섰다. (조등 자신의 관작은 조상이 서한승상 조참과 친척관계인 연고이다). 조조는 젊은 나이에 겨우 20살에 낭군(위수사령부 장교에 상당함)이 된다. 얼마후에는 낙양북부위(수도의 한 지방 경찰국장에 상당함)이 된다. 그의 친부가 양자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한나라의 황숙'이라는 유비가 전투에서 기껏 공을 세워서 얻은 첫번째 관직이 겨우 안희현위(지금의 파출소장에 상당)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위충현의 양아들을 보자. 어떤 사람은 원래 관직이 한미했다. 이번, 이노생과 같은 경우는 원래 현령에 불과했다. 그러나 위충현의 양자가 된 후에 관운이 틔어서 어사와 급사중이 된다; 어떤 사람은 원래 관직이 높았다. '오구'중 하나인 주응추는 진사출신이다. 양자가 되기 전에 공부시랑이었다. 그리고 고병겸은 원래 각로(閣老)였다. 그들이 양자가 되려던 이유는 양부의 힘을 이용하여 한단계 더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최소한 동료들과 경쟁할 때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주응추는 돼지족발을 잘 요리했다. 이 재주를 이용하여 위충현의 조카인 위량경에게 잘보인다. 그리고 위량경을 통하여 위충현의 양자가 되는데 성공한다. 비록 이것때문에 놀림은 받았지만, 이부상서라는 좋은 보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양부를 이용하여 황제에 오른 석경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누구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변을 먹는 경우도있고, 돼지족발을 삶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양아들은 난감한 경우에 처하는 일이 많다. '아황제' 석경당은 892년에 태어났다. '양부'인 야율덕광은 902년에 태어났다. 부친보다 아들이 10살이나 많은 것이다. 아들은 이를 악물고 참는다. 그러나 '손자'인 석중귀에 이르러는 더 참지 못한다. 결국은 비극을 불러온다. 바로 이때문에 일단 양아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우게 되면 왕왕 이 부끄러운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예를 들어, 석경당 대장으로 나중에 후한 고조가 되는 유지원은 거병초기에 거란세종 야율완의 양아들이 된다. 이는 문자로 증거까지 있다. 그러나 그는 즉위후에 흔적을 없애버리고 이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뿐아니라, 양자들은 모두 얼굴이 두껍다. 총애를 받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황제' 석경당은 강대한 경쟁상대인 조덕균(趙德鈞)이 있었다. 만일 그의 부하인 상유한이 말을 잘하지 않았더라면 아황제는 석씨일지 조씨일지 모를 일이었다. 위충현의 문하에 있는 그들 '표(彪)', '구(狗)'는 하나같이 흉악한 인물들이었다. 위충현이 돌연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어떤 국면을 만들어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