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명(張鳴)
고대중국은 어느 왕조이건 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관학(官學)도 있고, 사학(私學)도 있다. 그러나, 환관을 위하여 전문적으로 설립한 학교가 있다는 말은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있었다. 명나라때부터.
명나라때의 환관은 태감(太監)이라고 불렀다. 태감의 학교는 태감들에게 어떻게 태감이 될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교와 별 차이가 없었다. 문화를 배웠다. 유약우의 <명관사>에 따르면, 명나라의 내궁에는 내서당(內書堂)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환관학교이다. 학교는 선덕(宣德) 연간부터 시작하였다. 즉, 영락제가 죽은 후, 궁안에서는 태감을 교육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은 10살가량의 어린 태감이다. 외부의 학교와 마찬가지로, 문을 들어서면 공자에게 절을 한다. 선생은 사신(詞臣), 즉 한림(翰林)들이 담당했고, 교육을 하는 동안에는 북안문(北安門)으로 드나들었다.
교재는 수준에 따라 여러가지였다: 백가성(百家姓), 천자문(千字文), 천가시(千家詩), 신동시(神童詩), 효경(孝經), 사서(四書)가 있었다. 외부의 학교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수업때는 매일 숙제를 내주었다. 공부에 관심이 있으면 별도로 책을 읽었고, 범위는 매우 넓었다. 이런 학교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학교와 차이가 없다. 선생은 모두 한림이었는데, 이는 가까운데서 찾은 까닭일 것이다. 외부의 학교는 국자감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수준의 선생을 모실 수 없었다.
유일하게 외부의 학교와 다른 점이라면, 태감학교의 법도가 아주 엄했다는 것이다. 징벌도 아주 가혹했다. 학교는 대태감이 제독을 맡고, 여섯 내지 여덟명의 아나 많은 태감이 학장을 맡는다. 숙제를 잘 못하거나 외우라는 글을 외우지 못하거나, 법도를 어기거나, 윗사람의 뜻을 거역한 경우에는 가벼울 때는 계척으로 손바닥을 때리고, 무거우면 성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받았다. 더욱 중하면 성인의 앞에서 똑바로 서서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어야 했다. 두 손은 두 다리에 놓아야 하고, 조금만 몸을 굽힐 수도 없었다. 이를 어기면 계척으로 마구 두드려 맞았다. 이렇게 어려운 동작을 향불 하나 탈 시간동안 지속해야 한다. 몸이 이를 버티지 못하면 어러가지 벌이 따라오게 되고, 반나절은 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엄격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 팔고문은 필요없었지만, 시는 지을 줄 알아야 했다. 운이나 평측을 잘못하면 모두 불합격이다. 궁안에서 환관학생들은 대우를 잘 받았다. 학생들이 열을 지어서 가면 각 아문의 태감들은 두 손을 맞잡고 모두 길을 피해주었다. 권력이 조야를 뒤흔드는 사례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때가 되면서, 대부분의 제도는 명나라를 답습했지만, 태감학교는 많이 바뀐다. 더 이상 사신을 보내어 선생으로 삼지 않았다. 그저 필첩식(筆帖式)이나 서수(書手)와 같은 하급관리들이 담당했다. 태감들에게는 그저 글자 몇 자만 알려주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태감학교는 그 후에 흐지부지되고 만다.
명나라때 황제는 주원장(명태조), 주체(명성조, 영락제)이래로 어찌된 일인지, 현명한 군주이건 불초한 군주이건 약간은 자폐적인 성격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잘 만나려 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만든 좋은 제도에 재상은 없었다. 황제는 국가원수이며 정부수반이다. 큰 일도 관장하지만, 작은 일도 관장했다. 부담이 아주 컸다. 부담은 큰데, 자폐적인 황제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원래 황제가 글을 쓸 때 붓이나 먹을 갈아주는 사례태감이 사실상 황제의 곁에서 공문서를 모조리 담당하게 되었다. 황제의 주비(朱批)는 사실상 태감의 태감비로 변모한다.
명무종 시대에, 태감인 유근은 "입황제(立皇帝, 서 있는 황제)"라고 불리웠다. 황제는 용상에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태감은 곁에 서서, 뭐든지 했다. 황제는 기분이 좋으면 궁에서 빠져나갔고, 궁안에는 태감이 모두 처리했다. 해야할 일은 모두 처리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결정하기 힘들면 서류를 들고 집으로 가서 잘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처리했다.
태감은 원래 황제를 모시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모시는 사람이 정계의 큰 인물이라면, 약간의 글자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명나라때의 태감들은 임무가 무거웠다. 황제을 대신하여 황제의 역할을 해야 했다. 험난한 객관적인 형세는 그들에게 더욱 높은 자질을 요구했다. 왕진과 같이, 지방의 작은 관리를 지내다가 스스로 거세한 후 궁으로 들어와 환관이 된 후, 황제를 직접 보게 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에게 황제는 친부모보다도 가깝게 느꼈다. 그러나, 이런 사대부는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때 환관으로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높은 수준의 환관학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명나라 이백년은 환관들이 나라를 다스린 시대이다. 최소한 절반이상은 그랬다. 모든 사료는 환관들이 학식이 없다고 폄하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러 경우에 태감들이 결재한 공문은 대체로 문제가 없었다. 문리가 통하지 않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환관들을 그렇게 많이 지방으로 내보내서 이것도 감독하고, 저것도 감독하게 하였는데, 재능이 없다면 어찌 감독할 수 있겠는가? 동창, 서창에서 특무를 맡더라도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거꾸로 당할 수밖에 없다.
각 왕조들, 특히 환관의 폐해가 심했던 동한의 경우에도 실제로 명나라때의 환관들처럼 그렇게 기세등등하지 않았다. 명희종때 위충현은 구천세가 되고, 온 천지에 사당을 만든다. 그 연유를 따지면, 명나라가 실제로는 태감정치이기 때문이다. 황권은 태감이 대리한다. 즉, 한무리의 태감이 대리한다. 이런 태감정치는 학식이 없는 태감들이 맡을 수는 없다. 만일 학식이 없으면, 일상적인 정무조차도 처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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