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의 태상황(太上皇) - 당이전

by 중은우시 2012. 3. 14.

글: 소가노대(蘇家老大)

 

중국의 태상황은 중국황권정치의 특산이다. '가천하(家天下)'의 특유한 현상이다. 사서(辭書)에는 '태상황'을 이렇게 해석한다: "제의 부친, 태상황제(太上皇帝)도 한다. 약칭하여 상황(上皇)이라고도 한다." 황제에서 태상황이 되는 것은 현대의 정치술어로 말하자면 '일선'에서 '이선'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유혹력이 있고, 무수한 영웅들이목숨을 잃었고, 원래 한번 자리에 앉으면 죽을 때까지 있는 자리인 황제의 보좌를 구가 자신의 아들 혹은 관계없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이선으로 물러나 있으려 할 것인가? 거기에는 분명히 부득이하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혹은 향락을 즐기고 싶어서이거나 막후로 물러나서 지시하고픈 것이라는 등등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옛것을 살펴 현재를 보기 위하여 우리는 사적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역사상의 태상황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상 최초로 '태상황'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진장양왕(秦莊襄王), 즉 자초(子楚)이다. 그러나, 그의 이 '태상황'은 그가 죽은 후 26년만에 얻는다. 즉 기원전 221년, 막 황제로 칭하기 시작한 진시황이 추존한 것이다. 또 다른 태상황은 한고조 유방의 부친인 유태공(劉太公)이다. 유태공의 이 태상황은 자초보다는 낫다. 그는 살아있을 때 막 황제에 오른 아들 유방이 붙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태공이 최소한 태상황이라는 행세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초기에 태상황으로 불린 사람들은 성격한 나중의 태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첫번째로 출현한 '정규' 태상황은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이다. 그는 중국역사상 유명한 '백치'황제이다. 그가 즉위한 후, 금방 '팔왕의 난'이 일어난다. 영녕원년(301년) 정월, 조왕 사마륜이 연호를 건시로 바꾸고 진혜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아마도 저능아인 사마충이 그의 황제자리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황제찬탈을 더욱 명분있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마륜은 사마충을 죽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를 '태상황'으로 모셔서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기게 하고, 이름을 "영창궁(永昌宮)"이라 한다. 배분으로 따지면, 사마륜은 사마충의 숙조부이다. 이를 보면 태상황이 황제의 부친이라는 설은 아주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마충의 이야기는 바로 조카손자가 숙조부의 '태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정치권력의 각축은 통상 필요가 우선한다. 사마륜이 황제의 보좌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른 왕들이 연합하여 무장반항을 벌인다. 2개월의 혈투끝에 쌍방은 근 10만명이 죽는다. 마지막에는 사마륜이 용상에서 쫓겨났을 뿐아니라,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한다. 사마충은 다시 사람들에 의하여 황제에 옹립된다. 그리고 계속하여 허수아비황제로 남는다.

 

북위 헌문제(獻文帝)는 진혜제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태상황'에 오른 것과 전혀 유형이 다르다. 그는 '정치에 염증을 느낀' 전형적인 사례이다. 북위 헌문제 탁발홍(拓拔弘)은 12살때 북위황제에 오른다. <위서.현조기제6>에는 그를 총명하고 과감했으며 남북으로 정복을 하여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서 세상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있었다. 20세경에 그는 은퇴를 준비했고, 황제위를 숙부인 경조왕 탁발자추에게 양위한다. 다섯살된 그의 아들 탁발굉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조정상하를 경악케 했을 뿐아니라,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어떤 대신은 심지어 '조정에서 목을 베어 자결하겠다'고 결사반대하기도 했다. 은퇴를 하기로 마음을 굳힌 탁발홍은 숙부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생각은 바꾸었지만, 5살된 태자 탁발굉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연흥으로 고친다. 군신의 뜻에 따라: "당금 황제의 나이가 어리니, 국정을 관장하는 것은 역시 폐하가 맡아야 하므로, 감히 태상황제라는 존호를 바친다." 아쉽게도 이 태상황제는 오래 살지 못했고, 23세때 영안전에서 붕어한다.

 

북제의 고담(高湛), 고위(高緯) 부자는 국가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향락만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향락을 위하여 '태상황'이 된다.

 

고담은 북제의 제4대 황제이다. 역사에서는 무성제(武成帝)라 부른다. 고담은 일생동안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간신 화사개(和士介)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정무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지 말고, 젊을 때 많이 놀고 즐기라고 권했다. "일일취락, 가적천년(一日取樂, 可敵千年)". 그러나, 당시 외부환경은 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북주는 돌궐과 연합하여 연이어 북제를 공격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골치가 아팠다. 그리하여 고담은 아예 황제위를 태자 고위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태상황'이 되어 놀고 즐기는데만 신경쓴다.

 

고위는 역사상 후주(後主)라고 불리는 인물인데, 그도 놀고 즐기는 것이 부친에 못지 않았다.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이때 북주는 날로 강대해지고 호시탐탐 북제를 병합하려고 노르고 있었으며, 강남의 진나라도 수시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고위는 여전히 '걱정없는 천자(無愁天子)"였다. 스스로 <무수>라는 곡을 만들어 불렀다. 북주의 군대가 밀고 들어와서 제나라의 수도인 업성을 포위하자, 이 '무수천자'는 더 이상 '무수'곡을 멋지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방법을 찾았다. 유일하게 생각한 방법이 부친을 본받는 것이었다. 자신이 태상황이 되고, 황제위를 나이 겨우 8살인 아들 고항(高恒)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국난이 닥쳐서 모조리 미뤄버리는 것은 '무수천자'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고명한 수단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나중에 멍청한 황제들이 하나하나 본받는 선례가 되었다. 사실상 고위는 겨우 1달간 태상황으로 있었다. 그리고는 포로가 된다. 곧이어 목이 잘린다. 황제에 오르면 책임을 미루고 싶어도 미룰 수가 없는 일이다.

 

남북조시대는 난세라 할 수 있다. 각 할거소숙의 천자들도 엉뚱한 일을 많이 벌였다. 북제의 고담, 고위는 향락을 위하여 책임을 미루고 태상황에 올랐다. 북주의 선제 우문윤(宇文贇)은 음탕한 일에 빠져서 태상황제가 된다.

 

연부역강한 북주 무제 우문옹은 북방통일대업을 완성한 후, 남쪽으로 발전하려고 할 때, 불행히도 붕어하고 만다. 나이 겨우 36세였다. 나이가 어린 태자 우문윤이 즉위하니 북주선제이다. 부친의 사망으로 장례기간동안 그는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도 않고 두눈에는 음탕한 빛이 돌았다. 그는 선황을 모신 궁녀들중에서 골라서 강제로 음란한 일을 벌인다. 그리고 천하의 미녀를 골라서 후궁을 채운다. 그는 오로지 음락만을 생각했고, 황제위에 오른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우문윤은 북제의 부자 태상황을 본받아, 나이어린 태자 우문연(宇文衍)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천원황제(天元皇帝)가 된다. 천원황제가 된 후에는 하루종일 여색에 빠져서 후궁에서 술과 여색을 즐기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후궁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우문윤은 하늘(天)이라는 글자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천원황제'라 부를 뿐아니라, 자신이 거주하는 거처를 천대(天臺)라 불렀고, 황태후는 천원황태후로 부르고, 면류관은 천원관(天元冠)이라 불렀다.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몽둥이를 '천장(天杖)'이라 불렀다. 아마도 너무 음란하여 벌을 벋아서인지 천원황제는 태상황이 된지 1년여만에 천덕전에서 급사한다. 당시 나이 22살이다.

 

우문윤이 죽은 후 1년도 되지 않아, 고아과부가 나라를 통치하는 북주는 양견에게 가볍게 나라를 빼앗긴다. 양견은 국호를 수(隋)로 바꾼다. 양견이 바로 수문제이다. 수나라 개황원년(581년) 오월 나이 9살된 북주정제 우문연(나중에 이름을 宇文闡으로 바꿈)은 원인불명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