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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마답비연(馬踏飛燕): 중국관광로고를 둘러싼 4가지 논쟁

by 중은우시 2011. 9. 22.

 

 

: 예방육(倪方六)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리의 말이다. 중국관광로고인 마답비연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잘 모를 수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말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주인은 누구인지. 지금까지도 고고학계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답비연은 감숙성 무위(武威)의 뇌대고묘(雷臺古墓)에서 출토되었다. 뇌대고묘는 중국고고학계에서 아주 유명하다. 곽말약, 하내(夏鼐)등의 고고학계의 원로들이 관심을 기울인 바 있다.

 

<고고학보>(1974년 제2)에 발표된 고고간보 <무위뇌대한묘>라는 글에 따르면, 당시, 이 묘는 무위현 북쪽 약 2리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신선인민공사의 신선대대 제12생산대의 소재지였다. 이 발견은 아주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69 9 10, 중공당사상 80구의 유명한 구호중 하나인, “비전(備戰), 비황(備荒), 위인민(爲人民)”의 독려하에 대륙에서는 보기 드물게 구멍을 깊이 하는운동이 벌어진다. 이번 운동은 많은 고적을 파괴했지만, 여러 고묘도 발견하게 된다. 저명한 마왕퇴한묘도 이 운동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당시 신선공사는 현의 배치에 따라 전쟁을 대비한 지하도를 파고 있었다. 지하도의 입구는 당시에 아주 큰 흙무더기인 뇌대의 남쪽이었다. 지하도를 파는데 참가한 것은 신선대대의 전체 사원(빈하중농)이었다. 파는 과정에서 한 농민이 호미를 찍었는데, 손에 진동이 느껴졌다. 벽돌을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몇번을 쳐서 큰 구멍을 발견한다. 이렇게 하여 1천여년이나 매장되어 있던 고묘가 발견되고, 이 묘에서는 231건의 문화재가 쏟아져 나온다.

 

중국관광의 로고인 마답비연도 이 출토문화재중 하나이다.

 

뇌대고묘가 발견된 후, 논쟁은 시작된다. 안양의 가짜 조조묘논쟁보다도 훨씬 복잡했다. 종합해보면 4대논쟁이 가장 전형적이다. 진상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첫번째 논쟁: 도대체 어느 시대의 고묘인가?

 

뇌대라는 지명은 뇌조관(雷祖觀)이라는 한 도관(道觀)에서 비롯되었다. 이 도관은 명나라때 건설되었고, 고묘의 봉토를 기초로 하여 세워졌다. 흙을 쌓은 것을 대()라고 했기 때문에, ‘뇌대라고 불렀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이전에 현지인들은 이곳을 장가대분(張家大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지의 대성인 장씨집안의 선영이었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풍수길지이다. 민간의 풍수길지에 대한 형상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금우와면(金牛臥眠)’, ‘금계탁미(金鷄啄米)’등이 있다. 이 곳은 금지양리(金池養鯉)’라는 곳이다. 현지인들은 금지양잉어라고 부른다.

 

묘실에는 두 개의 도굴동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도굴된 것이다. 묘실은 지하를 판 것이 아니라 평지에 집을 만든 것처럼 만들었다. 원래, 무위는 서북에서 메마른지역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하수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곁에는 갈대가 가득 자라는 작은 강이 흐른다. 강남수향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당시에 지하수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부러 묘를 지면위에 만든 것같다. 그후에 묘위에 흙을 덮고, 작은 언덕처럼 쌓은 것이다. 흙을 파낸 곳은 물이 모여 저수지가 되었고, ‘풍수당(風水塘)’을 이룬다.

 

동분마(銅奔馬)가 출토된 묘장에서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중에 연대가 비슷한 묘장이 또 발견된다. 관련있는 가족묘로 생각된다.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이곳에는 고묘군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두개의 묘는 각각 ‘1호묘’ ‘2호묘로 불린다.

 

이것은 대형 전실묘이다. 고고학적 보고에 따르면 동한말기로 연대를 추정했다. ‘한영제 중평3년에서 한헌제시대로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86-220년까지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공식적으로 뇌대한묘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감숙성의 고고학자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 연대에 의문을 나타낸다. 이 묘는 한나라때 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시대의 묘라는 것이다. 그중 한나라때 전폐(錢幣)를 연구한 오영증(吳榮曾)이 대표적이다. 뇌대고묘에서는 직경 1.6센티미터의 소오수전이 발견되었다. 이런 돈은 위진의 묘에서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서안 전왕진묘, 돈황기가만321호묘에서도 모두 이런 소오수전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뇌대고묘는 서진에 가깝다고 본다. 생각해보라 전왕조의 묘에 어찌 후왕조의 돈이 발견될 수 있겠는가? 또 한가지가 있다. 서역에는 위진이전에는 대형묘장이 없었다. 묘실의 형식이나 부장품을 보더라도 한나라때 묘와는 다르다.

 

종합해보면, 현재 뇌대고묘의 시기에 대하여는 아래의 다섯 가지 주장이 있다.

 

1.     한묘설(이는 고고보고의 견해이다)’

2.     한위(漢魏)묘설

3.     ()묘설

4.     진말 전량(前凉)초기설

5.     전량설

 

이상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하여 여기서 중언부언하지는 않겠다. 흥미있는 독자들은 자료를 뒤져보기 바란다.

 

두번째 논쟁: 묘의 주인은 누구인가?

 

묘의 연대를 확정하기 어려운데, 묘의 주인이 누군지는 확정할 수 있겠는가? 안된다. 현재 기본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묘의 주인이 장()씨이며 관리라는 것이다. 출토된 명문에 분명하게 장군(張君)’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기 때문이다.

 

묘주인의 신분을 확정하는 가장 주요한 것은 묘지(墓誌)이다. 그러나 묘지는 묘안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외에 인장, 명문이 있는 물건도 묘주인을 확정하는 근거이다. 비록 묘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뇌대고묘에는 4개의 은제인장이 발견되었고, 출토된 적지 않은 문물에 명문이 있다. 이치대로라면 신분을 확인하는게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출토된 4개의 인장중에서 1개는 이미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고, 나머지 3개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빠진 글자가 많다: “XX장군장” “XX군장” “XXXX이다. 출토된 동마에 수장액장장군랑아담기마일필, 견마노일인(守張掖長張君郞阿聃騎馬一匹, 牽馬奴一人)”이라는 명문을 보고, 후실의 2구의 관구 흔적을 감안하면, 이 묘의 주인은 장씨성의 장군부부의 합장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비한 장장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역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동한초 무위태수, 남양석후를 지낸 장강(張江)

2.     좌기천인관 장군(張君), 이 사람은 한양기현 사람이다. 관직은 무위군 장액현장, 무위군좌기천인관에 올랐다. 그러나, 이름은 모른다.

3.     삼국시대의 장수(). 장수는 무위현 조력사람이고 귀족출신이다. 선위후에 봉해진 적이 있다. 동한말기에 사망했고, 뇌대묘의 연대와 일치한다.

4.     전량의 장모(張某), 혹은 전량의 국왕 장궤(張軌)의 묘. 혹은 장궤의 손자 장준(張駿)

 

세번째 논쟁: 동분마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위의 두 가지 논쟁과 비교하면 뇌대고묘에서 출토된 말이 도대체 어떤 말인지 하는 것이 가장 크게 다투고 있다.

 

동분마는 국가여유국에서 확정한 국가관광의 로고이다. 시기는 개략 1983년이다. 10여년후인 1996, 동분마는 다시 국가문물국에 의하여 국보로 지정된다. 공식적으로 동분마를 국가관광의 로고로 정한 것이 중국관과업이 비등(飛騰)’하고 빨리 달려서 성장하라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정한 후 동분마에 대한 논쟁은 더욱 커졌다.

 

 

 

동분마는 정규고고학적발굴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도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지하도를 파는 사람들이 먼저 파낸 것은 전묘실의 남측실이다. 이 곳으로 묘실로 들어간 후, 이 묘가 아주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안에는 정렬된 동인, 동차, 동마등이 배열되어 있었다. 가장 뒤에 있는 묘실(후실)에는 관상(棺床)이 있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시골가(屍骨架)가 있었고, 시골가의 아래에는 몇 개의 도관(陶罐)이 있었다. 당시 왕홍상이라는 생산대장은 머리를 썼다. 그는 보물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원들에게 양식을 담는 마대를 가져오도록 하여, 묘안에서 동분마를 포함한 값나가는 물건을 모조리 가지고 나간다. 그 후에 이를 대대의 창고에 숨겨두었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 입구를 봉쇄한다.

 

비록 당시사람들이 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약하기는 했지만, ‘뇌대에서 보물이 나왔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나간다. 금방 무위현에서 사람을 보내어 조사를 시작한다. 인식이 있던 사람들은 속속 숨겨둔 보물을 꺼내놓았다. 대대창고에 숨겨놓았던 문화재가 마지막으로 꺼내진다. 이는 문묘(지금의 무위시박물관)로 가져가서 보관하게 된다. 그후 11, 감숙성은 고고학적 발굴을 실시한다.

 

출토문화재중에서, 가치가 가장 높은 것은 동차마의장용(銅車馬儀杖俑) 세트였다. 99개인데, 그중 동마가 39, 동차가 14, 용이 45개이고, 동우가 1마리이다. 99개의 문화재는 하나하나 정교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경탄한 것은 지금 중국국가관광의 로고가 된 가장 큰 그 동분마이다. 형체는 이 동마의장용에서 그 어떤 말보다 컸다. 높이는 34.5센티미터, 너비는 10.1센티미터, 무게는 약 7.15킬로그램이다.

 

동분마가 출토된 후 이름을 갖지 못하다가. 나중에 곽말약이 이 말의 오른쪽 뒷발의 아래에 제비가 짓밟혀 있는 것을 보고는 마답비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때부터 멋있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국고대인들은 말을 숭상했다. 특히 한나라때는 그러했다. 이 대동마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현재 개략 5가지 견해가 있다.

 

1.     천마(天馬)’. 전설에 따르면 천마는 구름을 밟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말이 비연을 밟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을 나르는 천마의 이미지와 같다.

2.     천사(天駟)’. 천사는 원래 하늘의 28성수(星宿)중 동방 창룡칠수중 네번째 별이다. 이름은 ()’이며 마조신(馬祖神)’이라 칭한다.

3.     비연류(飛燕)’ 어떤 학자는 말이 비연을 밟고 있는데 착안하여, 남조 양의 간문제 소강의 좋은 말이 9필이 있는데, 하나의 이름이 비연류이다라고 한 것에서 비연류일 것이라고 본다.

4.     체오아(逮烏鴉)’ 이는 일종의 천리마이다. 마왕퇴백서 <상마경>에 나온다.

5.     한혈마(汗血馬)’ 이 말의 원산지는 투르크만스탄이다. 서한시대에 장건이 서역에서 돌아와서 서역에는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이 피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혈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묘주인은 장군이고, 배장한 말도 사실대로 만들었다. 그가 탄 말은 자연히 당시에 가장 좋은 한혈보마일 것이다.

 

네번째 논쟁: 동분마가 밟고 있는 것은 무슨 새인가?

 

동분마의 가장 신비로운 것은 발 아래 밟혀 있는 그 이다. 말의 신분을 확정하기 어렵지만, 에 대한 주장도 어지럽기 그지없다.

 

뇌대의 진열관에는 무위에서 출토된 위진시기의 회도분마가 전시되어 있다. 전체 말을 지탱하는 것은 제비 모양의 이다. 이 문화재의 예술가치는 아주 낮다. 아름다움이라고 얘기할 것은 없다. ‘의 위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다리모양의 기둥이 있다. 이것이 전체 말을 받쳐준다. 구조상으로 예술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이것이 드러내보여주는 민속가치는 크다. 당시 사람들은 말과 새를 결합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역량이나 상징을 나타냈다. 이 도자기말은 위진시대의 것이다. 이는 측면에서 뇌대고묘의 연대가 동한시대보다 뒤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에 관한 첫번째 주장은 곽말약이 말한 제비라는 것이다. 곽말약은 마답비연에 대하여 아주 애정이 있었다. 동분마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곽말약 덕분이다. 1971 9, 곽말약은 캄보디아의 시하누크친왕을 모시고 난주로 왔다. 감숙박물관에서 이 동마를 보고, 대단한 천마행공(天馬行空)’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가문물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기간동안 출토된 문화재 전람을 기획했다. 곽말약은 이 동마를 전시하도록 얘기한다. 그리고 이 동마에 마답비연이라는이름까지 친히 지어준다. 이때부터 천마는 정말 천마행공하게 되고, 운이 따랐다. 외교부장을 역임한 진의는 문화재외교활동을 주창했는데, 동분마는 영광스럽게도 국보들과 함께 세계각지에 전시된다. 1968년 하북 만성 중산정왕 유승의 묘에서 출토된 금루옥의와 함께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곽말약의 말로 하자면 사해에서 동분마를 크게 칭찬한다. 사람들마다 금루옥의를 말한다” 2002년 미국대통령 부시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국가주석인 강택민이 부시에게 보낸 선물이 바로 24k도금한 청동 마답비연 복제품이었다. 이를 보면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니다.

2.     두번째 의견은 용작(龍雀)’이라는 것이다. 곽말약이 제비라는 견해를 낸 이후로 학술계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왔다. 모양으로 보면 제비같지 않다는 것이다. 용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동마는 마답비연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국관광의 로고는 마답비연이 아니라 마답용작 혹은 마초용작(馬超龍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3.     세번째 의견은 준()이라는 것이다. 준은 나는 능력이 뛰어난 맹금이다. 감숙, 청해 일대에는 자주 볼 수 있다. 용작은 풍신(風神) 즉 비렴(飛廉)이다. 이런 신조를 어찌 말이 밟을 수 있겠는가? 용작은 새의 몸에 사슴머리를 하였다. 말의 발아래에 있는 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이다.

4.     네번째 의견은 까마귀라는 것이다. ‘설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이 새와 말과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이다. 민속상으로 논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분마가 어찌 들새의 등을 밟겠는가? 그래서 어떤 학자는 까마귀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까마귀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강용유석굴의 천마행공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천마의 앞발이 바로 까마귀의 등 위쪽이다. 마치 까마귀를 쫓아가는 것과 같다. 무위뇌대의 동분마는 까마귀의 등 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까마귀를 따라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중국국가관공로고는 천마체오(天馬逮烏)’라는 이름도 하나 더 얻게 된다.

 

중국관광로고인 동분마와 관련한 논쟁은 이외에도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논쟁이 이렇게 많은데, 중국관광로고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성, 태산등 인문,자연경관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어느 것이든 부장품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동분마는 무덤에 들어간 저승의 물건이다. 이 물건이 로고인 관광은 관광객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저승인가? 중국관광업에 사고가 많은 것은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로고를 바꾸는 문제는 학술문제는 아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