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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을 태자로 만들어준 두 여인

by 중은우시 2011. 3. 24.

 

: 월초(越楚)

 

 

 

581, 양견(楊堅)은 북주(北周) 정제(靜帝)의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수()로 고치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 하니, 그가 바로 역사상 유명한 수문제(隋文帝)이다.

 

양견은 등극한 후, 장남 양용(楊勇)을 황태자에 앉힌다. 양용은 꼬박 20년간 태자로 있었는데, 양견의 말년에 태자에서 폐위되고 서인으로 된다. 그를 대체한 것은 나중의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이었다.

 

그렇다면, 양광은 어떻게 황태자의 보좌에 오를 수 있었는가?

 

<<수서>>, <<자치통감>>등에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양광이 형인 양용의 손에서 태자위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이외에, 두 여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두 여인이 양광을 수나라의 황태자로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양광은 양견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수서. 양제기>>에 양광은 용모가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수문제와 황후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특별히 아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양광은 영준한 미남일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양견과 독고황후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양광은 영웅출소년(英雄出少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문무를 겸비했다. 그는 13살 때, 무위대장군에 봉해지고, 18살 때 회남도행대 상서령이 된다. 개황8년 겨울, 나이 겨우 20살의 양광은 행군원수가 되어 50만대군을 이끌고 남방의 진()나라를 공격하여 다음 해에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렇게 하여 남북통일을 완성한다.

 

당연의 영웅소수(英雄少帥)’ 양광은 진나라를 함락시킨 후 창고를 봉쇄하고, 추호도 범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를 현명하다고 칭송한다. 그 해에 양광은 태위(太尉)로 승진하여, 전국의 군대를 통할한다.

 

<<수서>>에는 양광이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썼다…’고 되어 있다. 양광은 문학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글과 시를 잘 썼다. 그는 부하들이 대필한 글을 보고는 문장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자신이 글을 고치곤 했다. 황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재능과 공적으로 본다면, 양광은 양용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양광이 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카페트를 깔아준 것은 바로 독고황후(獨孤皇后)와 선화부인(宣華夫人)이었다.

 

독고황후는 천성적으로 투기심이 강했다. 황제인 수문제에게도 처첩을 많이 두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바람기 있는 남자를 가장 싫어했다. 황족이나 대신들 중에서 첩이 임신을 하였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독고황후는 수문제에게 그를 좌천시키거나 내쫓도록 말하곤 했다.

 

수나라의 명재상인 고경(高熲)은 원래 독고황후 부친 집안의 문객이었고, 일찍이 그를 아주 가깝게 대하였다. 그런데, 고경의 부인이 죽은 후, 수문제와 독고황후는 궁녀 하나를 그의 후실로 주려고 했다. 그런데, 고경은 이를 사양했다. 나중에 고경의 소첩이 사내아이를 낳자, 독고황후를 그를 싫어하게 된다. 게다가 고경이 수문제의 앞에서 독고황후에 대하여 일개부인이라고 칭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고경을 폄하하여 결국은 양견으로 하여금 고경을 파직시키게 만든다.

 

아쉽게도 태자 양용은 모친인 독고황후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궁내에 총애하는 여인을 많이 두었다. 운소훈, 고양제, 왕양제, 성희등이 그와의 사이에 십여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독고씨가 태자비로 뽑아준 원씨는 총애를 받지 못하여, 심장병으로 돌연사한다. 독고황후는 양용의 애첩인 운씨가 해친 것이라고 의심하여,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기도 한다.

 

양광은 독고황후의 뜻을 잘 알고 따랐다. 그저 부인인 소비(蕭妃)와만 어울리고 후궁이 낳은 자식은 아예 부양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양견과 독고황후가 양광의 집으로 찾아갔다. 양광은 여인들을 모조리 숨겨두고, 나이많고 용모가 추한 노부인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한다. 방안의 병풍등도 모두 소박한 것으로 바꾸어 두었다. 악기의 줄은 끊어져 있고, 먼지가 가득 앉도록 놔두었다. 양견과 독고황후는 이를 보고는 양광이 여색과 잡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양광은 양주총관에 임명되어 부임하면서 독고황후의 앞에서 또 한번의 연기를 벌인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호소한다: “나는 형제의 정을 생각하는데, 왠 일인지 태자는 나를 미워한다. 그는 항상 나를 해치려 했다. 집안의 식기, 술잔에 언제 독을 탈 지 모르겠다!”

 

독고황후는 화가나서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마련해준 태자비를 그는 잘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운씨에게 개돼지 같은 자식들을 가득 낳게 했다.”

 

이때부터 독고황후는 양용을 폐위시키고 양광을 태자에 올리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온갖 방법을 써서 양견이 아끼는 신하 양소(楊素)와 함께 양견을 극력 설득한다.

 

당시에 선화부인 진씨는 양견의 총애를 깊이 받고 있었다. 양광은 그녀가 양견에게 끼치는 영향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온갖 방법으로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그녀를 아주 공경할 뿐아니라, 자주 금사, 금타등 진귀한 보물들을 바쳐서, 선화부인이 자신을 도와주도록 만든다.

 

나중에, 선화부인은 과연 양광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양견의 앞에서 양광의 좋은 점과 양용의 나쁜 점을 계속하여 얘기한다. 이렇게 하여 양용을 폐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독고황후와 선화부인의 베갯머리송사에 양용 자신의 실책과 양견이 그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양광이 조정의 인사들을 공경하며 자기 편으로 만든 것등 여러 요소가 결합하여, 결국 600년 수나라의 태자가 교체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