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만일 부부 두명이 모두 나이가 어리다면, 유정밀의(柔情蜜意), 남환여애(男歡女愛)를 마음껏 즐길 것이다. 수나라는 양광(楊廣)을 위하여 아주 마음에 드는 "소비(蕭妃)"와 혼인을 시켰으니, 자연히 희사영문(喜事盈門)이라 할 것이다. 그 지위가 높은 '소비'는 비록 구중궁궐에서 자라지는 않았고, 특수한 인생경력을 지니고 있지만, 민간에서 근언신행(謹言愼行), 각수부도(恪守婦道)를 배웠다. '소비'는 우아하게 꼬리를 갑추고 살았다. 남편은 '하늘'로 여기고, 그녀는 온순하게 숭배하며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이런 부부생활은 당연히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나라의 진황(晋王) 양광과 소비라는 이 아름다운 한쌍은 조야가 주목하는 '금동옥녀'였다. 양견(수문제)과 독고황후는 더더욱 그들을 좋아했다. 둘째아들이 더욱 마음에 들게 행동하자, 독고황후는 갈수록 장남 양용(楊勇)을 멀리하게 된다. 양용은 화천주지(花天酒地), 처첩성군(妻妾成群)의 도련님이다. 그녀는 이런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핑계를 찾아서, 양용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양용을 폐위시키면 누구를 태자로 삼을 것인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대로 진왕 양광이다. 소비는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너죽고 나살기식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든다. 이 사태의 총감독은 독고황후이고, 총사령관은 당연히 나이는 어리지만 노련한 진왕전하이다.
양광이 이 싸움을 위하여 한 준비를 보면 실로 천고에 보기 드물 정도이다. 수나라의 역사사료를 보면, 양광이 부친,모친을 위하여 제조한 '미혼탕'이 곳곳에 들어 있다. 그는 모자란듯히 가장하기도 하고, 부친을 모방하기도 하고, 모친이 좋아할 일을 하기도 했다. 그들 둘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는 뭐든지 했다. 그들 둘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그는 그것을 멀리했다. 양광은 모든 것을 '교정식행(矯情飾行)'의 전략에 걸었다. 양견과 독고황후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양광은 황위를 노렸기 때문에 이렇게 노력을 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십년을 하루같이, 힘을 다하여 자신을 가장하고, 마음을 다하여 위장하였다. 그는 천하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판단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형인 태자를 끌어내리기 위하여, 양광은 소리소문없이 형의 담장 밑바닥을 파냈다. 등불의 그림자가 깊이 비치는 곳에서, 소비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같은 침대에서 같은 베개를 베고 자는 남편을 생각해본다.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풍도가 비범한 남자인데, 심기가 깊고, 권모술수가 뛰어나다. 부인으로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바가지를 계속하여 긁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보니 가장 좋은 선택은 남편의 뒤에서 착실하게 그를 따르는 것일 것이다.
<수서.열전>은 소비를 위하여 변명해주고있다. 사관은 "소후가 처음에 번저로 왔을 때, 군자를 보좌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양제는 도리에 어긋났고, 사람됨이 충성과 신의가 없었다. 부자지간에도 항상 의심을 품었는데, 부부간에는 또 어떠했겠는가?" 사실, 미친 듯이 권력을 쫓고, 지위에 완전히 취한 남편이 있으면, 처가 아무리 두뇌가 뛰어나도 속수무책이다 그저 가만히 따르는 수밖에 없다.
남편이 귀해지면, 부인도 따라서 귀해진다. 모두 하나의 밧줄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저 서로 도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양광은 거짓으로 인의군자인척 했다. 소비는 그를 따라 18년간 힘든 세월을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청고(淸苦)한 생활은 어쨌든 외삼촌집에 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물며, '군자양광'은 소비에게 많은 정감을 남겼다: 첫째, 일부일처이다. 양광은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삼처사첩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소비의 곁에는 질투를 느낄 다른 여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청심과욕(淸心寡慾)이다. 진왕은 성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표방하여, 그의 집에는 먹고마시고 놀고 즐기는 난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양광과 소비는 매일 꼬리를 숨기고 바쁘게 살아갔지만, 심지어 꿈에도 마음을 써야 했지만, 어쨌든 '후계자를 노리기' 위하여 그들은 도광양회하면서 부부가 한 마음이었다.
<자치통감.수기>에는 양광, 양용 형제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 양용은 총애를 다투려고 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고의로 부모와 기싸움을 벌였다. 부모가 싫어하는 일이라면 그는 다 했다. 원래 태자의 자리에 잘 앉아 있을텐데, 여러번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정치적 자본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다.
양용은 총애하는 여자를 많이 두었다. 부인이 막 병사하자마자, 그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여러 첩들과 놀아났다. 독고황후는 이런 박정과의(薄情寡義)한 행동을 가장 미워했다. 그외에 양용은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있는 가운데, "스스로를 배우로 비교하면서 음탕한 소리를 하고, 음탕한 모습을 보였다." 완전히 플레이보이의 모습이다. 어디 동궁의 황위후계자의 모습인가? 황실의 위엄은 반푼어치도 없다. 수나라를 이런 사람에게 넘긴다면, 누가 받아들이겠고, 누가 안심하겠는가?
양광은 마치 뛰어난 배우와 같았다. 착실하게 부인 1명과만 살았으며, 심지어 추하고 늙은 여인을 집에 남겨두고, 낡은 커튼으로 집을 장식했다. 양광은 아주 천부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대청에 오래된 금(琴)을 하나 놔두는데, 금의 줄은 이미 끊겨져 있었다 .그리고 금을 둔 탁자에는 먼지가 가득 앉았다. 그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거동을 하려면, 장기간 자신의 성격을 누르고 생활의 즐거움을 포기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에도 형제 둘은 큰 차이를 보였다. 양용은 아주 오만했다. "나는 태자이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라는 태도였다. 양광은 극히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사묘는 모두 찾아가고, 모두 향불을 태웠다. 노비, 시종이 오더라도 그들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가 보낸 궁녀, 태감들과도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황상과 후가 매번 좌우를 양광의 거소에 보내면, 귀천에 관계없이, 양광은 반드시 소비와 함께 문에서 맞이하여 이끌고 좋은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고, 두터운 선물을 주었다; 노비로 오가는 자들 중에서 그가 인자하고 효셩스럽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이것은 진왕, 소비가 일부러 가장한 것이라고. 아마도 한두번 그럴 수도 있고, 십여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18년을 계속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이를 보면, 양광부부의 ''인효'는 그래도 역시 성격과 인품이 그러해서일 것이다.
아래와 위에서 모두 엄지손가락을 내밀 정도라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범부속자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양광과 소비는 신중하게 자잘한 일들까지 제대로 해냈다. 전전긍긍하면서 안팎의 살마들에게 영합했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보답을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여론을 이끌었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힘으로써 명망을 얻었다. 만일 양광이 간웅의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소비는 충성스러운 짝이다. 그녀는 여성의 은인과 인내를 지녔다.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손자가 내일은 할아버지가 된다. 아마도 이렇게 굴욕적으로 일평생을 살면서 평생동안 뜻을 얻지 못하는 '꼬리를 만 개'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보통 여인이라면 누가 허영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환상도 버리고, 배우같은 남자를 따라서 함께 앞으로 달려나가겠는가? 소비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묵묵히 남편의 곁을 지켰다. 밝은 눈동자는 물과도 같고, 복숭아빛 뺨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양광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표정은 절대로 일부러 위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녀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어렸을 때, 그녀는 다른 사람과 잘 지냈고, 역경도 받아들였다. 이런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소비는 '조강지처'이다. 나중에 양광이 그녀의 황후자리를 그대로 둔 것이 이해가 된다. 이것은 부부 둘이서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간 정인 것이다.
소비의 묵시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온유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양광은 철저히 승리할 수 있었다. 수나라 개황20년, 즉 600년, 32세의 양광은 원하던대로 동궁태자가 된다. 그후 그는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여 생사여탈권을 쥐고 유아독존이 된다. 권력은 너무나 재미있다. 그는 기쁜 얼굴로 소비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좋은 닐이 올 것이다. 소비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신태자의 약속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녀는 마치 떨어진 꽃과 같았고, 운명이라는 강에서 가라앉고 뜨면서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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