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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무죄론

by 중은우시 2010. 10. 13.

: 문재봉(文裁縫)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수왕조의 건립자이다. 그는 남북분열의 국면을 종식시키고, 전국을 통일했다. 그는 재위기간동안 통일을 완성하고 공고히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수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 자신은 웅재대략을 지니고, 정무에 근면하여, 문무의 두 방면에서 모두 큰 공을 세웠다. 수문제는 24년간 재위하다가 인수4(604)에 인수궁에서 급사하니, 향년 64세이다. 수문제의 사인에 관하여는 역사학계에서 계속 논쟁이 있어왔다. 그렇다면, 사실의 진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전통적인 견해는 수문제가 아들 양광(楊廣)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양광은 수문제 양견의 둘째아들로 일명 양영(楊英)이며, 아명은 아마()이다. 부친 양견이 수나라를 건립한 후, 양광은 진왕(晋王)에 오르며, 당시 나이는 13살이었다. 왕위 이외에 양광은 병주(현재의 산서성 태원시)총관의 직도 받는다.

 

나중에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막 스무살이 된 양광은 총사령관의 직을 맡는다. 비록 실제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한 것은 하약필(賀若弼)과 한금호(韓擒虎)등의 장군이었지만, 양광은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도, 양광은 여러 전공을 세운다: 590, 명을 받아 양주총관으로 있을 때 강남 고지혜(高智慧)의 반란을 진압한다; 600, 북상하여 돌궐의 침입을 격퇴한다. 이러한 공로는 다른 황자들은 세우지 못한 것들이다.

 

양광에게는 모두 다섯 형제가 있었다. 형은 양용(楊勇)으로 장남이고, 둘째가 양광이고, 셋째는 양준(楊俊), 넷째는 양수(楊秀), 다섯째는 양량(楊諒)이다. 수문제가 황제에 오른 후, 그는 바로 양용을 태자로 삼는다. 양광은 자신의 전공이 형인 양용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점점 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품는다.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될 꿈을 꾼 것이다. 양광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자신을 위장하기 시작한다. 태자 양용은 어린 양광의 심기를 몰랐다. 그는 사치하고 낭비하였을 뿐아니라 호색했다. 그리고 모친이 고르고 골라서 뽑은 본처 원씨(元氏)를 멀리했다. 이리하여 부모가 모두 그를 싫어하게 된다. 나중에 양용이 지나치게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음에 따라 양견은 더욱 그에 불만을 갖는다. 이것은 양광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상황에다가 대신 양소(楊素)도 도와주어서, 마침내 수문제 양견은 양용을 폐위하고, 양광을 태자로 앉힌다.

 

604 7, 수문제는 병석에 누워있었고, 양광은 자신이 등극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양소에게 서신을 써서 수문제 사후의 후사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를 물어본다. 생각지도 못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실수로 양소의 회신을 수문제에게 보내게 된다. 수문제는 대노하여, 바로 양광을 입궁하도록 명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질책한다. 바로 이때 선화부인 진씨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채 뛰어들어온다. 그리고 양광이 도중에 그를 희롱했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그제서야 수문제는 깨닫고는 책상을 치며 욕을 했다. 급히 사람을 시켜 대신 유술(柳述), 원엄(元嚴)으로 하여금 조서를 초안하게 한다. 내용은 양광을 쫓아내고, 양용을 다시 태자에 앉히는 것이었다. 양광은 이를 듣고는, 양견을 모시던 사람들을 모조리 바꿔버리고, 그날로 양견은 죽는다. 향년 64세이다. 역사상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양광이 죽였다고 생각한다.

 

<<수서.후비열전>>에는 수문제의 사망전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황싱이 인수궁에 병환으로 누워있었다. 부인이 황태자와 함께 병간호를 했다. 평단(여명)에 나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태자가 핍박을 했고, 부인이 거절하여 화를 면하고는 황상의 거소로 돌아온다. 황상은 그녀의 모습이 이상해서 연유를 물었다. 부인은 말했다: 태자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황상은 분노해서 소리쳤다: 짐승에게 어찌 큰 일을 맡기겠는가? 독고부인이 나를 망쳤다. 그 뜻은 헌황후를 가리킨다. 그리고 병부상서 유술, 황문시랑 원엄을 불러 말하기를: 나에게 아들을 불러와라 유술등이 태자를 부르자, 황상은 ()용을 불러라고 말한다. 유술, 원엄은 방을 나와서 조서를 썼고, 좌복야 양소에게 보여준다. 양소는 이 일을 태자에게 아뢴다. 태자는 장형을 보내어 침전에 들어가게 하고, 부인과 후궁등 병시중을 드는 자들을 다른 방으로 쫓아냈다. 곧 황상이 붕어하였다는 말이 들렸다. 그러나 발상(發喪)은 하지 않았다. <<수서>>의 이 기록은 비록 명확히 수문제가 피살되었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이미 후인들이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엇다. , 수문제의 죽음은 모살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정사의 기록에는 여러가지 거리끼고 고려해야할 것이 많다. 야사의 기록은 직접적이다. 가장 먼저 의심을 품고 직접적으로 수문제는 시해당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수말당초의 조의(趙毅)였다. 그는 <<대업약기(大業略記)>>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조가 인수궁에 있었고, 병이 깊었다. 수양제를 따라 병시중을 드는 사람은 고조의 미인중 진, 채 두 사람이었다. 수양제는 채()를 다른 방으로 불렀다가 돌아왔다. 얼굴에 상처가 있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고조가 물으니, 채는 태자가 무례를 했다고 말한다. 고조는 대노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리며, 병부상서 유술, 황문시랑 원음등에게 폐서인 양용을 다시 태자로 세우라고 조서를 쓰게 한다. 수양제는 일이 급박하여 좌복야 양소, 좌서자 장형을 불러 독약을 올리게 한다. 수양제는 건장한 궁노 30명에게 궁녀의 옷을 입히고, 옷 속에는 막대기를 들고, 문과 골목길에 서서 지켰다. 양소등이 들어가고, 고조가 급사한다. 당나라중기의 마총(馬總)은 그의 <<통력(通歷)>>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황상에 병이 있었다. 인수전에서 백관들이 인사를 하고 떠났고, 손을 잡고 기뻐했다. 당시 태자와 선화부인이 병시중을 들었는데, 태자가 무례했다. 선화부인이 이를 말하자, 황제가 대노하여 말하기를 줄일 개자식. 어찌 후사를 맡기겠는가 그리고 양용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양소는 이를 숨기고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좌우를 가리고 장형에게 명하여 황제를 끌게 하였다. 피가 병풍에 뿌려지고, 원통해하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렸다. 황제가 죽었다.

 

여러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수문제가 죽은 후 지금까지, 민간에서는 수양제가 부친을 시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여러 소설 필기에서도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사학계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대업약기>>, <<수서.후비열전>> <<통력>>등 책을 직접증거로 인용할 뿐아니라, 일관된 품성을 살펴보기도 한다. 양견이 죽은 후, 양광은 수문제의 유언을 위조하여, 양용을 자진하도록 명한다. 양용이 답을 하기도 전에, 파견된 사람이 양용을 끌어내서 죽여버린다. 양광은 공공연히 부친의 후비를 강간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형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금수보다 못하다. 그가 어찌 부친을 시해하지 못하겠는가? 특히 수양제가 나중에 이 사건의 가담자 양소, 장형을 죽여버린 태도에서도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양소가 죽은 후, 수양제는 멸족을 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양소는 그를 도와서 태자의 지위를 얻게 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한 주요한 인물인데, 왜 오히려 그의 일족을 멸하려고 했을까? 수양제가 요동정벌에서 돌아온 후, 장형의 첩이 장형이 원망하고, 조정을 비방한다고 밀고하자, 수양제는 장형에게 죽음을 내린다. 장형은 죽을 때 크게 소리쳤다: 나는 그를 위하여 살인멸구등의 일을 했으니, 오래 살고 싶다. 감형자는 놀라서 귀를 막고는 급히 그를 죽여버렸다. 이것들은 모두 수양제가 부친 수문제를 죽였다는 방증이다.

 

그렇지만, 일부 사가들은 수양제 양광이 부친 수문제 양견을 죽였다는데 회의적이다. 그들의 이유는 아래의 세 가지이다.

 

첫째, 수문제는 4월에 병을 얻어 7월에 위중할 때까지, 궁내의 상황이 기본적으로 정상이었다.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다: 옛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하를 아는 것은 군주만한 사람이 없고, 아들을 아는 것은 아비만한 사람이 없다.이제 나쁜 자식은 백성을 위하여 쫓아내고, 좋은 자식은 대업을 짊어질 수 있다. 이는 비록 짐의 집안일이지만, 숨겨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전에 문무대신들에게 자세히 얘기한 바 있다. 황태자 ()광은 그의 행실로 봐서 짐의 뜻을 완성할 수 있다. 내외의 여러 관리들이 합심협력하여 천하를 함께 안정시켜달라. 짐은 비록 눈을 감지만,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양광을 위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을 뿐아니라, 그는 자신의 발병원인이 여색을 밝혀 몸이 상한데 있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양광에 있어서, 즉위는 시간문제였다. 그가 굳이 천하의 금기를 어겨가며 부친을 죽여야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수서>>는 당나라초에 편찬한 것이다. 수양제를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수양제가 부친을 시해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양제를 욕보일 기회를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정현문은 <<수문제사인질의>>라는 글에서, 사서에 기록한 것은 수양제가 선화부인과 간통한 일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립되기 힘들다고 본다. (1) 수문제의 병이 위중한데, 수양제가 궁중에서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선화부인의 기거갱의는 모두 시녀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당시는 아직 수양제가 즉위하기 전이므로, 여전히 위협을 받는 지위에 있었다. 지금까지 근신하기로 유명한 수양제가 이때 후계자의 지위를 위협할 일을 굳이 할 리가 없다. (2) 선화부인은 그때 28살로, 이미 나이가 들었다. 만일 수양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로 무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수양제는 일찌감치 선화부인과 부정당한 관계였다. 그리고 이런 교류를 통해서 두 사람의 감정은 깊었다. 선화부인이 죽은 후에 수양제가 <<신상부>>를 쓴 것을 보면 그것이 입증된다. 수양제와 선화부인이 일찌감치 부정당한 관계에 있었는데, 선화부인이 수문제의 앞에서 양광의 추악한 행동을 얘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수양제와 선화부인의 사랑이야기는 후세인들이 보기에 너무나 황당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주 정상적이었다. 도덕적인 견책을 크게 받을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당왕조의 조상은 선비화된 한인으로, 선비족들과 통혼하면서, 선비족 혈통을 지녔다. 그리고 장기간 선비족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황실에서 선비족들이 계모를 처로 삼고, 과부가 된 형수를 처로 삼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당나라때가 되어, 당태종도 선비족의 습속을 이어받아 제수를 부인으로 거둔다. <<신당서. 태종제자전>>에는 조왕 ()명의 모친은 원래 소왕비였다. 황제가 그녀를 총애하여,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서 소왕은 바로 현무문사변때 살해당한 이원길이다. 소왕비는 바로 이원길의 왕비를 말한다. 나중에 당고종, 당현종의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주희는 말했다: 당나라는 오랑캐 출신이다. 그리하여 규문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들이 있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수나라 당나라는 문화가 일치한다. 이는 수나라의 여러 난륜사건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더욱 심한 경우는 공경의 자손들 중에서 죽은 부친 조부가 남긴 첩을 팔아먹는 경우까지 있었다. <<수서. 이악전>>에는 예의와 교화가 퇴락하여, 공경이 사망하면, 그 애첩과 시비는 자손들이 팔아서 시집보내버렸고, 이것이 풍속이 되었다

 

이상의 세 가지는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문제의 죽음이 양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이미 여러해동안 위장해왔던 양광이므로 양견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급박하게 양소에게 서신을 보내어 처리방안을 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서신을 보내는 사람이 양소의 회신을 수문제에게 잠못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수문제가 보기에 그런 상황하에서, 양광이 양소에게 후사처리를 물은 것은 바로 자신을 빨리 죽으라고 저주하고, 황제위를 하루빨리 빼앗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수문제가 분노하여 태자를 교체하려고 하고,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수문제 양견이 급사하였는데, 양광이 책임을 모조리 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