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백년중국, 누가 사상가인가?

중은우시 2011. 12. 23. 23:47

글: 사지호(謝志浩)

 

중국의 백년동안 누가 사상가인가?

 

오랜 시간동안 사상가는 특별히 가리키는 것이 있었다. 즉, 가리키는 것은 바로 그 35년 전에 돌아가신 어르신(모택동)이다. 말하자면, 필자는 위대한 지도자(모택동)과 인연이 있는 셈이다. 대학의 전공이 중국인민대학의 중공당사학과였고, 졸업후에 하북경화공학원 정교실로 배치를 받아서 강의한 과정도 모택동사상개론이었다.

 

전능정치의 생태국면에서 이런 기조가 형성되었다: 1949년이후에 사상가는 모택동 한 사람 뿐이다. 즉, 모택동 이외에는 사상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

 

이런 태도는 중국역사로 보면 진나라와 비슷하다. 관리를 스승으로 삼았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사회주의국가의 개국지도자는 '보편윤리'를 신봉하여 하느님과 시이저의 업무를 모두 자신의 양어깨에 짊어졌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중국의 호사가들이 이런 '보편윤리'를 역사의 종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 사상사상의 손중산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손중산-모택동이 근현대사상사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근현대사상사에 이처럼 중량급의 수퍼맨들이 우뚝 서 있다보니, 노선배에 해당하는 강유위, 엄복, 담사동, 장태염을 제외하고 누가 백년사상사의 사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중앙당교의 이진하(李振霞) 교수는 <당대중국십철(當代中國十哲)>을 편찬출판했다. 이달(李達), 양헌진(楊獻珍), 애사기(艾思奇), 양수명(梁漱溟), 풍우란(馮友蘭), 웅십력(熊十力), 하린(賀麟), 김악림(金岳霖), 장대년(張垈年), 호적(胡適)을 꼽았다. 손중산과 모택동은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너무 중요하여 이미 사상가가 되었으니. 이 열 명의 철학가는 아직 화후가 사상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택후(李澤厚) 선생이 1980년대에 내놓은 <중국근대사상사론>과 <중국현대사상사론>에서 명확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상가와 철학가, 정치가의 '정략결혼'은 여전히 백년중국사상사연구의 주요한 모습이다.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백년중국사에서 일종의 초조함과 컴플렉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중국사회에서 도통(道統), 정통(政統)과 학통(學統)은 상생상극, 상보상성하며, 변화무쌍한 중국사를 만들어왔다. 사상가는 도통의 상징이다, 정치가는 정통을 구성하며, 철학가는 학통에 공헌이 크다. 역사가 명,청에 이르러서는 황권이 이미 독재하는 나라가 된다. 그래도, 유생들이 주원장을 위대한 사상가라고 불렀다면, 아마도 이 명나라의 태조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을 것이고, 쑥스러웠을 것이다.

 

누가 생각했으랴. 황권을 혁명으로 무너뜨린 위대한 혁명선구자와 위대한 지도자가 중국의 전통에 전혀 반대되게도 대단한 사상가로 불릴 줄이야. 그저 우리들이 모두 내시가 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진하교수가 열거한 십철, 이달, 양헌진, 애사기, 양수명, 풍우란, 웅십력, 하린, 김악림, 장대년, 호적중에서, 이달, 양헌진, 애사기는 당의 철학연구자이고, 풍우란, 하린, 김악림, 장대년은 철학가이다. 그러나 이들을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중앙민족대학의 조사림(趙士林) 선생은 일찌기 중국백년의 칠대사상가를 꼽은 적이 있다. 각각 강유위(康有爲), 엄복(嚴復), 담사동(譚嗣同), 장태염(章太炎), 호적(胡適), 노신(魯迅), 이택후(李澤厚)였다. 조사림은 이택후의 입실제자이다. 백년사상가를 열거하면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그냥 꼽았다는 점도 재미있는 일이다.

 

강유위, 엄복, 담사동, 장태염은 백년중국사상사의 제1대에 속한다. 호적, 노신등은 제2대에 속한다. 이택후는 제3대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제4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조사림선생의 생각대로라면 제3대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추풍(秋風) 선생은 백년중국사상사를 정리하면서, 강유위, 손중산, 장군매(張君勱), 모종삼(牟宗三), 장경(蔣慶)의 다섯 명을 꼽았다. 이 명단은 추풍선생의 강렬한 개인적인 취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미도 있다. 추풍은 유가헌정주의의 취향이 아주 강했던 것같다. 추풍이 보기에, 양계초(梁啓超), 장사쇠(章士釗)의 사상도 대단하긴 하지만 위의 다섯명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다는 것이다.

 

서진여(徐晋如) 선생은 고풍을 지니고 있었다. 추풍의 명단에 대응하여 이렇게 열거했다: 강유위, 전목(錢穆), 반광단(潘光旦), 유이징(柳詒徵), 두아천(杜亞泉). 그는 강렬한 고전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필명이 소박한 장입국(張立國) 선생은 일찌기 20세기 중국사상가를 열거하면서 7명을 나열했다. 각각,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장지양(張志揚), 유소풍(劉小楓), 감양(甘陽), 주학근(朱學勤), 왕이(王怡)이다.

 

이 명단은 기묘하기 그지없다. 기묘한 점은 '후금박고(厚今薄古)'에 있다. 1949년이전에는 두 사람만 열거하고, 그 이후의 사람을 5명이나 열거했다. 그리고 이 다섯명은 당대에 활약이 큰 인물들이다.

 

중앙편역국의 부국장인 유가평(兪可平) 선생은 당대중국의 브레인이다. 유선생은 넓은 시야와 개방된 흉금을 지니고 당대중국사상가문고를 주재한 바 있다. 이 문고의 총서에 쓴 서문에서 유가평 선생은 강유위, 양계초, 손중산, 진독수, 노신, 이대쇠, 호적, 모택동의 8명을 현대사상가라고 불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비효통(費孝通), 왕원화(王元化), 우광원(于光遠), 오강(吳江)의 네 사람을 당대사상가문고에 넣어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가동(何家棟) 선생은 "삼리일하(三李一何)": 이신지(李愼之), 이예(李銳), 이보(李普), 하가동을 열거했다. 이 라인은 노장파 공산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가동 선생은 <20세기중국의 '신도통'>이라는 글에서 자유주의 계보를 이렇게 규정한다: 양계초 - 호적 - 고준(顧準) - 이신지. 선생의 논술과 견해는 독특하고 안목이 뛰어나다. 그러나 강렬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누군가 물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누구를 중국백년의 사상가로 보느냐고.

 

필자도 용기를 내서 명단을 내놓아보기로 하자: 엄복, 호적, 양수명, 고준, 이택후, 조정양(趙汀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