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2012년 양회(兩會)로 본 보시라이와 왕양의 앞날

중은우시 2012. 3. 9. 18:13

글: 미보(未譜)

 

양회는 매년 열린다. 그러나, 매년 형식적으로 지나가고, 에피소드만 잔뜩 남긴다. 이는 네티즌들의 우스개 소재가 되곤 한다. 금년의 양회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충칭대표단과 광동대표단이다. 둘은 국내외매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목을 받는 정도와 방식은 선명하게 차이가 난다.

 

왕리쥔사건으로 충칭시대표단은 국내외매체의 주목을 크게 받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대회는 그들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원치않는 것같다. 그들의 거처를 따로 안배하여, 충칭대표단은 반격리상태로 하여 매체를 피하고 있다. 광동대표단은 우칸촌사건(烏坎村事件)때문에 국내외매체의 인터뷰촛점이 되었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보시라이와 비교하자면, 왕양은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고 있다. 특히 해외매체의 민감한 질문에도 기꺼이 대답하고 있다.

 

왕양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에 우칸사거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중요한 출발점은 바로 우칸의 군중이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인가 하는 것이다. 초보적으로 알아본 후 우칸 민중이 토지등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면서 합법적이었다. 그 촌의 촌서기를 실제 대표로 하는 소집단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칸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는 출발점이 된 기본판단 혹은 기본입장이었다."

 

이런 회답은 우칸사건의 전반부 풍파를 가리킨다. 당시 촌민은 거의 평화의거의 방식으로 나이 사십여세의 당총지부서기를 몰아냈고, 일련의 요구를 제출한다. 광동성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안정유지방식대로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정부측은 촌민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인다. 온 나라가 주목하던 우칸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싸울 때마다 지고 억누르면 다시 일어나는 권익보호운동에서 드물게 보는 성공사례가 되었다. 이것은 후진타오의 어두침침하고 고압적인 안정유지통치에서 실로 특이한 사례였다.

 

그러나, 우칸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촌민들이 1인 1표의 촌지도부선거를 실행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런 민주선거는 중국에서 진정으로 발생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현재 광동의 조산평원에서 발생한 것이다. 막 끝난 우칸촌위원회 선거에서, 촌민대표 린주란(林祖鑾)이 촌주임에 당선되었다. 권익보호항쟁과정에서 체포된 바 있던 3명의 촌민대표들도 역시 성공적으로 촌위원회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항쟁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숨진 촌민대표 쉐진보(薛錦波)의 딸 쉐진완(薛健婉)도 촌위원회 부주임 경선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교직은 아무 이유없이 박탈당한다. 아이가 신청한 장학금도 거절되었다. 결국 그녀는 할 수 없이 경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우칸 촌위원회의 민주선거는 성공적이었다. 중국공산당체제의 일관된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 선거는 기본적으로 매체에 개방했고, 심지어 미국주광주영사관의 부영사도 선거에 참관했다.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민주선거는 우칸항쟁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 기념비적 사건의 더욱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왕양의 처리방식은 국내외에서 적지 않게 호평을 받는다. 양회에서, 한 일본기자가 우칸에서 민주선거의 선례를 열었다는 점을 언급하자. 왕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한 마디 하겠다. 우칸의 민주선거는 촌민위원회의 <조직법> 및 <광동성촌민위원회선거방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그저 우리가 선거법과 조직법의 집행과정을 아주 잘 처리했을 뿐이다. 이 촌에서 과거에는 형식적으로 진행되던 선거를 시정한 것이다. 그 뿐이다." 왕양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만든 촌민위원회 조직법이 지금까지 실행된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더욱 중요한 것은 왕양의 다음 번 말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칸촌이 이 문제에서 많은 계시를 얻었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성위원회 업무소위가 이 촌으로 가기로 결정할 때, 성위부서기를 팀장으로 부성장을 부팀장으로 했다. 그것은 이 마을 자체의 모순이 복잡하여 이런 진용을 갖추어햘 정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참새를 해부하여 경험을 얻고자 함이었다. 촌급조직의 건설을 추진하고, 우리 촌이라는 집정의 기초단위에서 전심전력을 다하여 인민에 봉사한다는 이 이념을 더욱 잘 실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왕양의 말에는 적지 않은 공산당의 상투적인 말이 섞여 있지만, 여전히 그의 집정이념에서의 포부와 웅심을 엿볼 수 있다. 즉 새로은 길을 개척하려는 의지이다. 그게 뭐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기실 자오즈양이 중공13대에서 제기한 정치개혁사상인 것이다. 즉 공산당집정지위를 바꾸지 않고 집정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자오즈양은 만년에 이미 이런 보완적인 생각을 포기하고, 민주정치의 옹호자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왕양의 우칸사건에서의 여러가지 조치는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치국10년동안 보지 못했던 방식이다. 왕양이 양회에서 득의양양한 것도 이해가 된다. 기자들이 왕리쥔사건에 대하여 묻자 그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한다: "대상을 잘못찾았습니다." 비록 그 뒤에 충칭에서의 업무에 대한 몇 마디 칭찬의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왕양의 18대에서의 정치전망은 이미 보시라이를 압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거의 아무런 의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