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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일본의 대만통치역사에 비추어본 신장사태

by 중은우시 2009. 9. 30.

글: 말리(茉莉). <<여명>> 2009년 8월호

 

중국공산당이 신장을 통치한 60년간 아주 공포스러운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바로 유명한 "왕호자(王胡子)"신화이다. "왕호자"는 중공의 장군인 왕진(王震)을 가리킨다. 1949년, 흉악한 왕진은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신장에 들어가서 사람을 수도 없이 죽였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이민족의 통치에 반항하는 것은 피비린내나는 재앙을 불러온다. 이것은 고금중외의 역사에서 드물지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1745년, 청나라군대가 신장을 소탕한 후부터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 이백여년간 국가폭력과 민간폭력은 계속되었다. 금년 7월 5일 우루무치에서는 '유격전'식의 도시폭동이 발생했다. 이것은 깜짝 놀랄만한 유혈비극이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중국의 민족관계와 민족정책문제를 재검토하고 있다. 그 견해에는 취할 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위구르족과 한족의 두 민족은 화해불가능한 깊은 원한이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없다. 그저 민족존엄과 민족자치의 문제일 뿐이다. 한족을 대표하는 중국정부가 위구르족에 얼마나 맣은 구체적인 우대조치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민족의 뿌리깊은 아픔 즉, 자치권의 상실을 보상해줄 수 없다. 자신의 토지에서 남의 말에 따라야 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위구르족으로 하여금 피를 보는 반항을 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다.

 

무력사용은 말을 듣지 않는 약소민족을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큰 후환을 남긴다. 만일 진정한 안정을 원한다면, 다른 방책을 선택해야 한다. 작년에 필자는 대만여행을 하면서 친구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서 아주 재미있는 역사현상을 발견했다. 즉, 일본이 대만을 통치할 때, 평화안정을 창조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아마도 중국인들이 불쾌하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위구르-한족의 충돌을 해결하는데 참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1895년, 청나라조정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다. 대만인민에게는 날벼락이었다. 항일운동은 그리하여 발생한다. 그러나, 대만의 무력항일운동은 20년간 지속되었을 뿐, 1915년의 서래암(西來庵)사건이후 기본적으로 소멸하였다. 당시 대만인들이 무력으로 이민족의 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였는데, 그 원인중 하나는, 그들이 이미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시아의 고아'였기 때문이다. 바다위에 외로이 떠있으면서 어디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원인은 이때 일본본토는 이미 민주화가 시작되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대만도 영향을 받았다. 대만의 지식인들이 합법적으로 항쟁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대만인들은 폭력을 포기하고, 각양각색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정치권리를 쟁취하였다. 식민지의 민주화에 서광이 비친 것이다.

 

20세기의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20년대부터 30년대초기까지 일본에는 역사상 첫번째의 민주정치시기가 나타난다. "대정민주(大正民主)". 이 시기는 하라 다카시(原敬)내각이 주도했고, "정당내각, 보편선거, 특권제한"을 특징으로 했다. 일본국내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분위기가 흘러넘쳤고, 일부 지식인들은 식민지대만의 불공평한 처지에 주목했다.

 

민주사조의 영향과 고무를 받아, 일본에 있던 대만지식인들은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대만의 정치개혁을 추진한다. 그들의 행동중 하나는 "육삼법(六三法)"을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이 법은 대만총독에게 입법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대만에도 일본본토의 법률을 적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원래 차등공민으로 취급되던 대만인들이 일본의 국민대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신민회"의 또 다른 중요한 주장은 일본제국의회에 대만인들이 자신의 의회를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대만의회설치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이 청원운동은 14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주재대만인들이 계속하여 청원을 발의할 때, 대만섬내의 사회단체운동도 유례없이 활발했다. 그중 장위수등이 이끄는 "대만문화협회"는 문화계몽을 종지로 하여, "대만은 대만인의 대만"이라는등 신민통치에 반항하는 구호를 내놓았다. 다른 대표적인 정치단체로는 "대만농민조합" "대만민중당" "대만공우총연맹" "대만공산당"과 "대만지방자치연맹"등이 있었다.

 

각종 사회운동의 항쟁으로, 일본식민당국은 대만인의 자치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만인들의 정서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일본인은 1935년 제도법규를 개정하여, <<대만지방자치제도개정>>을 공포한다. 신법에서는 대만의 주회(州會), 시회(市會) 의원과 가장협(街莊協)의원은 모두 관선에서 반수를 민선으로 전환했다. 이는 대만역사상 첫번재 민선방식의 의원선출이었다. 비록 불완전한 자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작은 한 것이다. 아쉽게도 나중에 일본은 대정민주시대를 끝내고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대만의 점진개량의 의회방식은 그리하여 중단된다.

 

비교하자면, 현재 신장을 점령하여 위구르족을 통치하는 중공당국은 위구르족의 자치요구를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 신장에 민주선거를 도입하려고 해본 적도 없다. 각종 자유로운 정치단체가 자신의 권익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도록 허용해준 적도 없다. 이같은 이민족에 대한 강권압박의 결과는 위구르-한족의 두 민족간의 상호살상이라는 비바다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회유감화정책은 그들이 선전하던 "오봉신화(吳鳳神話)"에 잘 나타나있다. 오봉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대청제국이든 일본식민당국이든 심지어 대만광복의 국민당정권이든, 모두 오봉을 "관대하고 자애스러우며, 스스로를 희생한" 전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35년이후 대만의 소학교 국어교과서에는 모두 오봉의 살신성인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 이야기는 개략 이렇다: 청나라 강희때의 오봉은 아리산에 통사(通事)로 파견된다. 현지 추족(鄒族)인들의 사람의 머리를 제사지내는 악습을 폐지시기키 위하여, 오봉은 붉은 옷, 붉은 모자를 쓰고, 자신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라고 내놓는다. 추족사람들이 이번에 죽은 사람이 그들이 평소에 존경하던 오봉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크게 후회한다. 그리고 오봉의 살신성인의 위대한 인품에 감동받아, 더 이상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제사지내지 않게 되었다.

 

일본통치시기에 일본학자는 대만에서 이 시기의 역사를 상세히 고찰한 후, <<살신성인통사오봉>>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오봉이 야만인을 개화시켰다는 이야기는 예술적인 가공을 곁들였다. 식민당국은 오봉묘를 만들고, 총독이 친히 제사를 주재하고, 편액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가무극으로도 만들고, 영화도 찍었다. 이처럼 융중하게 청나라때 한족관리의 영웅적인 업적을 칭송하는 데에는 일본인들의 숨은 뜻이 있었다. 그들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을 고의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식민당국의 이민족통치정책의 정당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대만에 대하여 정치적인 압박과 경제적인 수탈을 진행하는 동시에,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유연한 문화교화활동을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신화구축동기가 어떠하든간에, 그 수법은 고명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청나ㅏ의 관리 오봉을 모범으로 삼아, 자신의 관리가 대만토착인들에게 관대하고 인자할 수 있다는 것ㅇ르 선전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대만인에 대하여 일본은 중국의 성인지도를 선양할 것이라고 하여, 식민통치에 우호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동시에 일본인들이 오봉전기를 쓰면서, 동시에 청나라관리들이 직무에 소홀히 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부패하며, 간사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이민족통치에 무능했다는 등의 나쁜 점들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교묘하게 대만인들에게 그들 일본인들이 청나라보다 훨씬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한 사회에 어떤 신화가 전해지는가는 그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중공이 신강을 통치한 60년간, 전해지는 것은 가장 공포의 전설이다. 바로 유명한 "왕호자'전설이다. '왕호자'는 공산군장군인 왕진의 별명이다. 1949년, 흉악한 왕진은 10만병력을 이글고 신강으로 들어가서 살인을 밥먹듯 했다. 그는 심지어 대포로 위구르족 마을을 포격하기도 하여, 위구르족들이 대거 사망했다. 나중에 신강사람들이 왕진의 별명을 가지고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데 썼다. 아이들이 울기만 하면, 어른들이 말한다: "왕호자가 온다" 그러면 아이가 놀라서 울음을 멈춘다는 것이다.

 

중공의 역사자료를 보면, 왕진은 신강에서 살인을 많이 저질렀다. 중공중앙 서북국의 습중훈마저도 심하게 느낄 지경이었다. 습중훈은 왕진에게 즉시, 유목지구에서 반란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왕진은 이에 따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심각한 논쟁이 벌어진다. 나중에 왕진이 신강을 떠난다. 그는 말년까지도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장부의 뜻을 세워 배고프면 호로(胡虜)의 살을 먹고, 웃으면서 흉노의 피를 마신다" 이는 북송 악비의 <<만강홍>.이다. 여기서 호로와 흉노는 모두 위구르족을 포함한다. 이런 이민족을 살육하겠다는 장부의 뜻은 수백년동안 한족장군들을 격동시켰다. 왕진이 숭배해 마지 않는 청나라말기의 좌종당이 신강에 들어갈 때도, "좌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정충보국'의 구호하에 비인도적인 살육마저도 영웅적인 애국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일본인들이 대만에서 인자한 오봉을 선전한 것은 설사 위선이라고 하더라도, 중국한족의 이런 살륙신화보다는 피비린내가 적게 난다.

 

위구르족에 관한 희극적인 신화는 "쿠르반(庫爾班) 아저씨가 모주석을 만난" 이야기이다. 1958년, 신강 호텐(和田)의 농민인 쿠르반 투루무는 북경 중남해에서 모택동을 만난다. 나중에 이 이야기는 가공되어 신화가 된다. 중국화의 대가인 황주의 붓아래 이 위구르족 노인은 당나귀를 타고, 동부라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며, 동쪽으로 간다. 중공이 대거 선전하는 내용인 쿠르반 아저씨가 북경으로 모주석을 만나러 가는 행복한 시기에 신강에서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리사건(1962)이 벌어진다. 위구르인민들이 배고픔을 항의하다가 도살을 당한다. 수십만명은 비분에 차서 타향으로 도망친다.

 

이상의 각종 서로 다른 신화를 보면 신강문제의 복잡다단성을 알 수 있다. 역사적인 피의 빚이 있을 뿐아니라, 위루르-한족의 현실적인 충돌도 있다. 더욱 핵심적인 것은 사회제도문제이다. 만일 현행의 일당독재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화해는 허망한 논의이다. 민족정책을 조정하면 골치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현재 중공은 독재를 포기하고 민주를 시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위구르족들에 우대조치를 취하고 재정보조금을 주는 방법으로 위구르족과 정치적교환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현존하는 독재제도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번의 우루무치 유혈비극은 이런 교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세기동안, 오십만 위구르족은 타향으로 도망쳐서 살아야 했다. 완고한 중공당국은 그들의 정치적 요구를 무시해왔다. 1998년, 필자는 유럽의 '동투르키스탄연맹'의 주석인 아이얼컨(艾爾肯)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신강위구르족 망명자중에는 '평화비폭력'을 주장하는 대표인물이다. 당시 아이얼컨은 망명위구르족들이 의회를 하나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 요구는 80년전 일본통치시기에 민주자치주장과 유사하다.

 

아이얼컨 선생은 지금까지고 고향인 신강으로 돌아가서 의회를 건립하지 못하고 있다. 북경에서 민족화해, 반분열반폭력을 부르짖는 위구르학자 이리함무 투허티는 최근 구속되었다. 일당독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중공은 모든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신강해결방안을 부정하고 있다. 당초 일본제국이 대만인들에게 주었던 부분자치권도 위구르족에게는 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에 어린아이까지도 놀라서 울지 못하게 만들었던 "왕호자신화"는 아직도 새로운 버전이 계속 유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