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홍수전(洪秀全)과 여인들

by 중은우시 2007. 12. 6.

글: 미상

 

홍수전은 도광23년(1843)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한 때로부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뻘이고, 천하의 여자들은 모두 자매뻘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들고 나와서, 농촌의 가난한 부녀들이 많이 참가했다. 광서 계평현 붕애산지구에는 양운교(楊雲嬌)를 두령으로 하여 많은 부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홍수전은 또한 "사람을 한 명 죽이는 것은 내 아비를 죽이는 것과 같이 처리하고, 여인을 한 명 간음하면, 내 처를 간음한 것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있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난 초기에는 태평군내에 부녀들로만 구성된 여군이 있었다. 이들은 남자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남녀는 모두 같이 직위를 받고 같이 관리를 지냈다. 남경을 함락시킨 후, 태평군이 동쪽으로 향할 때도 여군은 여전히 선봉에 섰다. 여장군 소삼랑(蘇三娘)은 일찌기 여군을 이끌고 진강성(鎭江城)을 앞장서서 점령한 바 있다. 당시 소삼랑과 그녀가 이끌던 여군을 찬양한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팔백여병도적각(八百女兵都赤脚) 팔백명의 여자병사들은 모두 맨발인데

만금찰고주여풍(蠻衿走如風) 오랑캐 옷에 바지는 묶고 바람처럼 달린다.

 

그러나, 자그마한 승리를 얻은 후 홍수전은 이미 강산의 절반은 손에 넣었고,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문을 닫아걸고 태평천자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차지한 지역의 여인들을 그의 노리개로 삼고자 하였다.

 

남경을 함락시키기전 17일일전에 홍수전은 무호(蕪湖)의 강위에서 돌연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조서를 내린다: "여자는 안의 일을 처리하고, 바깥 일에 대하여는 간여하지 말라" 그리고 네 가지 "참불사(斬不赦, 무조건 참하며 용서가 없다)"에 해당하는 죄를 만들어 신변의 부녀들이 외부와 연락을 끊도록 하였다. 남경을 함락시킨 후, 천왕을 따르는 부녀들은 모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게 되었으며, 천왕부에 한번 들어가면 바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하게 되었다.

 

홍수전은 일찌감치 후궁을 가득 둔 제왕의 궁정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그가 배상제회를 창립할 때, 스스로 하늘에 "정월궁낭낭(正月宮娘娘)"이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처는 "우정월궁(又正月宮)"이라고 불렀다. 금전기의(金田起義)때, 그는 이미 비(妃)를 열 다섯이나 두고 있었다. 1년후 광서의 영안에서 포위전을 벌일때, 홍수전에게는 이미 36명의 여인이 있었다. 광서를 얻고, 호남 도주에 도착했을 때, 현지의 공생이 헌납한 미녀 4명을 받아들였다. 무창을 점령한 후, 홍수전은 첫번째 후궁선발(選妃)을 통해서 민간여자중 자색(姿色)이 뛰어난 60명을 뽑았다.

 

남경에 도착한 후, 홍수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을 거느렸는가?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 <<강남춘몽필기>>라는 책에 따르면 왕후낭낭은 그 밑에 애낭(愛娘), 희낭(嬉娘), 묘녀(妙女), 교녀(嬌女)등 16등급의 총 208명이 있었다고 한다. 24명의 왕비(王妃)에게는 각각 차녀(女), 원녀(元女)등 7개등급의 총 960명이 있었다고 한다. 양자를 합하면 모두 1,169명이 된다. 이상의 여인들은 모두 후궁에 속하여 홍수전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인들이었다. 천왕부에는 환관을 두지 아니하여 여러가지 잡일을 하는 여관(女官)이 있었다. 2품관 60명이 각각 여사 20명을 두었으므로 합계 1200명이다. 각종 사람을 다 합치면 모두 2300여명의 부녀들이 천왕부에서 홍수전 한 사람을 모셨다는 것이 된다.

 

홍수전이 모두 얼마나 많은 여인을 가졌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천왕부에는 2,3천명의 미녀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홍수전 1 명이 살았다. 그리고, 이들 미녀들은 모두 홍수전을 모시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고대의 군왕이 삼천궁녀를 둔다는 것과 비슷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홍수전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이 1864년 10월 25일 강서 석성황산에서 포로로 잡혀서 쓴 진술서를 보면, 앞부분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현재 나이는 16세이고, 노천왕이 나의 부친이다. 그는 88명의 모후를 두었고, 내가 9살때 4명의 처를 주었다..."이것이 아마도 믿을만한 기록일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호색하기로 유명했던 함풍제도 겨우 18명의 비빈만을 두었으므로, 홍수전에는 미치지 못한다.

 

홍수전이 41세때 남경에 들어가서, 52세때 자결할 때까지 미녀들만으로 둘러싸인 천왕부에서 11년을 보냈고, 천경의 성문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전투를 지휘한 적도 없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물어본 적도 없다. 그 당시 그는 장년이었고,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11년동안 겨우 25편의 조서만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함풍4년부터 함풍8년(1854-1848)까지는 비어있다. 이 5년간 단 1편의 조서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이 동안 그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비빈낭낭'들과 술마시고 시를 짓고 놀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홍수전은 글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다. 그가 지었다는 소위 "부시(賦詩)"는 그저 말나오는대로 쓴 것에 불과하다. 함풍7년(1857년)에 태평천국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관서(官書)"중의 하나인 <<천부시(天父詩)>>에 수록된 500수의 시를 보면, 대부분이 홍수전이 천경에 진입한 초기 3년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보라고 쓴 남자와 남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비빈, 여관들은 아침마다 천왕을 위하여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머리칼을 다듬으며, 주인의 고민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주인이 존엄이 높고 바르게 지켜지면, 강산에서 영원히 위엄을 누릴 수 있다", 그 후에 천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아침마다 옷을 입고 종을 울리며, 종소리는 태양을 향해야 하고, 후전은 이때 함께 모여서 문안인사를 하고, 전전의 문이 열리면 햇볕을 받는다":  이어서 금연(金輦)이 천왕을 따라 어원에서 놀게 된다: "어원내에서 노는 것은 정말 즐겁다. 백 가지 새가 노래불러 가마소리와 어울린다" 그리고 천왕에게 차와 가래침 뱉는 통을 올린다: "차를 바칠 때는 바르게 해야 한다. 침뱉는 통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이런 시들을 보더라도, 홍수전의 위엄과 황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 할 것이다. 그가 4번이나 과거를 보았음에도 합격하지 못한 원인도 쉽게 알 수 있다.

 

남경에 온 천왕 홍수전은 처음에는 광서에서 그를 따라온 옛날 여인들의 거칠고 더러운 점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떤 여인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듣고는 바로 시를 지어 질책했다: "아름다운 여인의 가는 목소리가 귀한 것이다. 어찌 개가 짖는 것같은 소리를 내느뇨?" 어떤 여인이 이빨을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릴 줄 모르는 것을 보고는 그는 아주 심하게 이를 놀렸다: "주인을 따라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태양을 볼 수 없다. 얼굴은 튀어나와 시커멓고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입에서는 유황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홍수전은 거리낌없이 새 여자를 좋아하고 옛 여인을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치니 마음 속이 즐거워진다. 복있는 낭낭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눈을 마주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재수없는 낭낭은 때려죽여 마땅하다" 그의 재수없는 낭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할 지도 규정했다: "모시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맞아야 하는 첫번째이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맞아야 하는 두번째이고, 눈을 들어 주군, 남편을 바로 처다보는 것은 맞아야 하는 세번째이고, 천왕에게 경건하지 못하게 물어보는 것이 맞아야 하는 네번째이고, 기가 바르지 못한 것이 맞아야 하는 다섯번째이고,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이 맞아야 하는 여섯번째이고, 입이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는 것이 맞아야 하는 일곱번째이고,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맞아야 하는 여덟번째이고, 눈을 좌우로 돌리는 것이 맞아야 하는 아홉번째이고, 말하는 것이 침착하지 못한 것이 맞아야 하는 열번째이다"

 

이외에 또 하나의 기괴한 규정이 있다. "주군을 쳐다볼 때는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가슴 앞을 보는 것이다; 감히 눈을 위로 드는 것은 왕을 태만히 한 것이고 하늘을 태만히 한 것이다" 부녀들이 형벌을 받을 때, 억울하더라도 변명해서는 안된다. 그저 때리는대로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가는 처벌이 배가된다. "때리면 잘못을 아는 것은 한 죄이고, 때려도 잘못을 모르는 것은 두 죄이다; 한 죄는 맞음으로써 소멸되지만, 두 죄는 설하(雪下)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여기서 설하라 함은 "도하(刀下)"의 태평천국식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한 3명의 여인이 천왕부에서 처벌받을 때 억울하다고 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다가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사람중에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홍수전에게까지 대들었다가 결국 오마분시의 혹형을 당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먼저 동왕 양수청의 명령을 받아, 주민들은 "군영을 따를 사람은 군영으로, 군영을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각자 민가로 복귀"했다. 나중에 북왕 위창휘가 병이 든 양수청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는데, 일체의 공상업을 몰수하고, 남녀를 분리거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자들은 군영에 들어가 병사가 되고, 부녀들은 여관에 들어가 노동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당시 천경에는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켰는데, 부녀들은 모두 천왕부의 건축에 참가했다. 천왕부 주위의 높은 담장은 2장높이로 4척너비였다. 성벽의 위에는 갈라진 도자기조각을 추가했고, 성밖에는 붙잡혀온 부녀들이 도랑을 팠으며,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이 점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평군이 민심을 얻어 남경을 점령하였다가, 민심을 잃어 민중들이 대거 떠나게 되는데까지 겨우 몇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평군이 성에 진입하기 전에, 남경에는 원래 80만이 살았는데, 봄에 태평군이 들어온 후 9개월만에, 등기인구를 조사해보니 15만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노약자인 남자가 4만명, 부녀가 11만명이었다. 홍수전이 스스로 "작은 천당"이라고 부른 천경이, 사실은 인간지옥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야에서 가장 강력히 요구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시급했던 문제는 부녀문제였다. 홍수전이 수천수만의 부녀를 동원해서, 집을 짓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만드는데, 비바람이 불거나 한설이 내려도 계속되었으며,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비등했다. 당시 천경성내에, 후(侯)이하 일반백성들까지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집안가족들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남영과 여관에 나뉘어 거주했고, 일부는 천왕부에 붙잡혀 와서 일을 했다. 특히 천왕부에서 일을 하게 되면 영원히 헤어진 것이고 다시 만날 기약은 없었다.

 

천경의 내분이후에도 홍수전은 여전히 오른팔 왼팔에 미녀를 끼고 살았고, 생활은 극히 추잡했다. 함풍11년(1861) 태평군이 강소절강을 들어왔을 때, 홍수전은 다시 이수성으로부터 받은 천경의 3천미녀중에서 180명을 뽑아 천왕부에 편입시켰다. 바로 이해에 50세도 되지 아니한 홍수전은 마침내 마지막 "짐명유주사조서(朕命幼主寫詔書)"의 성지를 내린다. 이리하여 나이는 13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친에게 황음함은 그대로 배운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홍수전은 천왕부의 미녀들 틈에서 11년을 지냈고, 동치3년(1864년)까지 살았다. 그가 52세되어서, 마침내 증국전의 상군(湘軍)의 대포소리와 미녀들의 원망성을 들으면서, 부득이 그의 수천미녀를 놔두고 자결하게 된다. 그가 죽은지 48일후에 천경은 함락되고, 태평천국은 멸망한다.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혀서 결국 능치처참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