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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왕리쥔의 초기 내부투쟁사

by 중은우시 2012. 2. 28.

책임편집: 임혜심(林慧心)

 

충칭의 전 공안국장이자 '창홍타흑'의 주요 간장(干將)인 왕리쥔이 보시라이와 반목하여, 보시라이의 정치생명은 끝장나게 되었다. 왕리쥔은 보시라이와의 내부투쟁과정에서 변장을 하고 도망치고,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가 기밀자료를 건네주었다. 그의 행동은 중국정부당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홍콩잡지는 왕리쥔이 랴오닝에서 설공한 배경과 왕리쥔의 초기 내부투쟁사를 공개했다. 그 글에 따르면, 왕리쥔은 충칭으로 가기 전에 이미 풍부한 내부투쟁경험을 쌓았다.

 

1987년, 28세의 왕리쥔은 테파(鐵法)시 샤오난전(曉南鎭)파출소 소장으로 부임한다. 그후 왕리쥔은 현지의 치안을 정돈하는 일련의 행동을 취한다. 하루는 왕리쥔이 당직을 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네가 새로온 왕리쥔이냐? 너는 왕타오(王濤)를 아느냐? 그의 최후가 바로 너의 최후이다. 네가 사내대장부라면 기차역으로 한번 와라" 왕리쥔은 그 말을 듣고 두 말도 하지 않고, 권총을 들고 바로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전화건 자를 찾아다녔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전화건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왕리쥔의 '대담'함은 현지에서 유명해진다.

 

왕리쥔이 테파시에서 경찰로 있으면서 파출소장을 할 때, 테파시 공안국 부국장 왕하이저우(王海洲)의 총애를 받는다. 왕하이저우는 왕리쥔을 자기 손으로 키워주고 끌어올려준다. 왕리쥔은 당시 왕하이저우를 양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테링(鐵嶺) 현지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왕리쥔이 왕하이저우의 도움하에 승진을 거듭하여 관직이 높아지자, 그들 둘의 관계가 예전처럼 좋지 않았다고 한다. 테링의 공안계통의 인사에 따르면, 공안국에서 사건을 토론할 때, 왕리쥔이 왕하이저우의 반대편에 섰다고 한다. 그때부터 왕하이저우와 왕리쥔은 결별한다.

 

1993년, 왕하이저우는 테링시 교통경찰지대로 가서 지대장을 맡는다. 이때 왕리쥔은 이미 테링시 공안국 부국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얼마후 왕하이저우는 테링시 공안국 부국장이 된다. 같은 해 12월, 왕하이저우는 테링시 공안국 부서기, 부국장이 된다. 이때부터 왕리쥔과 왕하이저우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어떤 글에 따르면, "1995년이래 왕하이저우는 익명서신, 고발장등을 보내어, 왕리쥔이 4번이나 조사를 받는다. 두번은 관련부서에서 입건하여 수사까지 했다."

 

테링 공안계통의 인사에 따르면, 왕하이저우는 선양이 호텔에서 옛날 친구와 만났을 때, 왕리쥔이 의리가 없고 백안낭(白眼狼)이라고 욕한다. 1주후 왕하이저우는 조사를 받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왕리쥔이 왕하어지우를 공장위조, 공문위조로 고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92년초, 왕하이저우는 자신의 딸이 부대에 복귀할 때 좋은 일자리를 갖게 하기 위하여, 허위 간부인사자료를 만든 바 있다. 여러해후, 왕하이저우가 기소당하자 법정에서 당시 그와 관계가 아주 좋았던 왕리쥔도 허위공문위조사건에 가담했다고 털어놓는다.

 

1996년, 랴오닝성은 '10대걸출한 집법자'를 선정하는데, 왕리쥔이 최다득표로 당선된다. 심사비준하기 전에 왕하이저우는 테링공안국 부서기의 신분으로 "당조직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테링시위 고위간부의 지지하에 왕리쥔은 그 칭호를 얻어낸다.

 

1998년 4월, 왕하이저우는 테링시 사법국 국장의 직무를 맡는다. 이때 왕리쥔은 전국에서 타흑(打黑)에 특출한 공로를 세워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된다. 두 사람의 싸움에서 왕리쥔의 지위가 상승하고 명성이 커지면서, 왕하이저우에게 확실히 불리하게 돌아갔다.

 

1999년 6월 8일 <중국청년보>에서는 <공안국장에게 치이고 얻어맞고 구속되었다>라는 내용을 보도한다. 1998년 10월 14일,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시 실직노동자인 장구이청(張貴成)은 삼륜차를 몰고 임산부 한 명과 어린아이 한 명을 태우고 갔다. 십자로에서 백색 벤츠 경찰차량에 치어서 뒤집힌다. 서로 말다툼 하던 중에 장구이청은 벤츠주인으로부터 주먹으로 세 대를 맞았다. 차량주인은 바로 테링시 공안국 부국장인 왕리쥔이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주요책임자는 차를 몰고 가버리고, 부차적 책임이 있는 자는 피범벅이 되어 '반방(班房, 감옥)'에 들어갔다" 나중에 장구이청은 왕리쥔을 법정에 고소한다. 이 사건은 한때 논쟁거리였다. <중국청년보>는 연말에 다시 한번 보도를 냈다. 일반적으로 <중국청년보>는 이 보도로 왕리쥔과 원한을 맺었다고 알려진다. 마지막에는 왕리쥔이 소송을 이겼다.

 

몇개월후, 왕리쥔은 다시 법정에 제소된다. 1999년 6월 중순, 랴오닝성 공안청은 중앙기율검사위 류리잉(劉麗英)에게 보낸 고발서신을 받는다. 그 서신에서는 테링시 공안국 부국장 왕리쥔등이 고문을 하고, 사람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친척인 장펑잉(張鳳英)을 때려죽였다고 적었다. 고발서신에서는 1998년 12월 24일, "장펑잉을 고발인의 집에서 구타했고, 왕리쥔은 때리다 지쳐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장펑잉을 데리고 가서 심문하라고 명령한다. 장펑잉은 이미 목숨이 위험했다. 병원에 보내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테링시와 랴오닝성 공안청 기율검사위원회는 연합조사팀을 구성하여, 왕리쥔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는 '고발서신에서 주장한 문제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랴오닝 공안계통에 왕리쥔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왕리쥔을 고발, 고소하는 정부관리만 이십여명이었다. 당시 왕리쥔은 이미 공안부장 자춘왕(賈春旺)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랴오닝성 공안청도 적극적으로 왕리쥔을 전국 '1급영웅모범"으로 선전했다. 그러다보니, 왕리쥔을 고발한 사람들이 오히려 체포되고 기소된다. 그중에는 왕하이저우도 포함된다. 왕하이저우가 기소된 죄명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자금지원 및 고발서신 대리작성등을 통하여, 장구이청, 장펑잉 가족을 선동하여 왕리쥔을 고발하게 했다.

 

1999년 9월 30일, 이미 테링시 공안국부국장에서 사법국국장으로 전보되었던 왕하이저우가 체포된다. 그는 왕리쥔이 당한 여러번의 무고의 막후인물로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