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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왕리쥔은 왜 보시라이와 반목하게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2. 21.

글: 강유평(姜維平)

 

2012년 2월 6일, 충칭시 부시장 왕리쥔이 돌연 청두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황소가 도자기점으로 뛰어든 것과 같이 난리를 치고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 미국측에서 먼저 확인해주었을 뿐아니라, 중국외교부도 신중하게 답변했다. 충칭지방매체는 '휴가식 치료'라는 말을 했다. 다른 점이라면, 북경의 고위층에 따르면,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에 보시라이는 왕리쥔 부시장을 '정신병'으로 몰아가고 싶었던 것같고, 중남해는 이것을 잠정적으로 '독립사건'으로 보고자 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모아서 일치하는 것은  왕리쥔이 더 이상 그들의 '동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부시장'이라는 직함을 쓸 뿐이다. 즉, 그는 사사로이 미국영사관으로 뛰어들어서 이미 적아(敵我)의 모순이 생긴 것이다. 그 성격은 조국을 배신하고 미국에 투항한 것과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타흑(打黑)의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시진핑의 방미를 앞두고, 보시라이가 아끼는 심복중 하나인 왕리쥔은 왜 돌연 자신을 망치는 일을 저질렀을까? '타흑영웅'에서 반도로 되고, 보시라이의 오른팔에서 반목하여 원수로 되었을까?

 

보시라이의 "이기획선(以己劃線)"

 

보시라이가 중국정계에서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0년대초, 그는 북경에서 다롄의 작은 현인 진허우(金州)로 갔다. 그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그는 리샹난(李向南)을 배우고자 한다는 말은 겉모습이고, 그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했다는 것이 실제내용이다. 그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즈양(趙紫陽)은 비교적 정파(正派)이어서, 기층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보시라이가 그의 부친 보이보의 권력을 이어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진현에서 4년간 있으면서 적지 않게 고생을 한다. 그리고 유익한 일도 조금 했다. 그러나 그는 어쨌던 궁정의 도광검영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감옥도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권모술수에 능하고, 음모에 뛰어나며 성격이 강인하고 나대기 좋아한다. 나중에 권력이 올라가면서, 그의 정치수완도 더욱 노화순청(爐火純靑)이 된다. 하는 일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지자천려필유일실(智者千慮必有一失)"이라고 했다. 그의 '일실(一失)'은 사람을 잘못봤다는 것이다.

 

승진을 하면서 그는 그를 따르는 심복들을 기르고 선발한다. 그러나, 북대와 사회과학원 신문연구소 연구생이라는 학력과는 달리 그가 중용한 다롄의 사람들은 샤더런(夏德仁)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문맹이다. 예를 들어, 시장비서장인 쑨스쥐(孫世菊)는 진현의 '나이든 아줌마'이다. 공안국장인 쑨광텐(孫廣田)은 삼십리보의 마차꾼이었다. 안전국당위서기인 처커민(車克民)은 요리사, 운전기사였고, 중학교 졸업학력이다. 개략 세무국장인 류센루(劉憲茹)가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대련일보>의 부간에 글을 썼고, 문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된 대학졸업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보시라이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른다. 이것이 바로 정치에 열심인 중공관리의 내심세계이다. 수준도 없고, 능력도 없어도 괜찮다. 그러나, 반드시 무조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용인표준은 보시라이의 정치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고, 불길한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또 다른 인격결함을 드러낸다. '이기획선' 즉 자신을 기준으로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 나를 따르면 살고, 나를 거스르면 죽는다. 상술한 추종자들과는 달리, 많은 랴오닝의 사람들은 보시라이의 정책부실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다른 관리라면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을 중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달랐다. 수단이 악독했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조리 명단을 만들어, 하자를 찾기만 하면, 최대한의 힘을 들여서 공안, 검찰, 법원을 동원헤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그의 심복들은 법을 무시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부들이 된다. 한편으로 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에 대한 허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백성들을 우롱하고, 다른 한편으로 독재도구를 이용하여 반대자를 제거하고, 정적을 공격하며, 다른 의견을 억누른다. 사법을 아이들 장난으로 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처커민과 왕리쥔과 같은 문맹이다. 보시라이는 그들이 말을 잘듣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역사는 보시라이와 왕리쥔에게 연분과 무대를 마련해준다.

 

왕리쥔은 배경을 찾았다.

 

처커민과는 달리, 보시라이는 자신의 관직이 올라갈 때 왕리쥔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왕리쥔은 곤경에 처해 있어서 배경을 필요로 했을 때, 존경의 눈빛을 랴오닝성 성장인 보시라이에게 보냈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결별하는데 복선이 된다. 당시 보시라이는 랴오닝에서 소위 "모마대안(募馬大案)"을 신경써서 운영했다. 그 칼끝은 성위서기인 원스전(聞世震)에게로 향했다. 그가 탐관오리를 단속하고 검은세력을 치는 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핑계이다. 실제로는 장쩌민의 세력에 의지하여 ,선택적으로 집행하는 것이다. 랴오닝성에서 반대자를 제거하고, 원스전과 장궈광(張國光)의 곁을 맴도는 적계들을 제거하고, 지방대권을 움켜쥔다. 그래서 다롄에서 먼저 중급인민법원 부원장 류샤오빈(劉曉濱)을 체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랴오닝성 고급법원의 부원장 텐펑치(田鳳岐)를 체포한다. '일인자'를 붙잡지 않은 것은 그가 법원으로 하여금 대문을 활짝 열어서, 그에 반대하거나 그를 따르지 않는 관리들 및 기업주를 감옥에 쉽게 집어넣게 하기 위함이다. 이후의 "류용(劉涌)사건"은 일부 관리를 숙청하는 바둑돌인 셈이고, "모마사건"은 인사변동의 중요한 단계이다. 장궈광등으로 하여금 원스전을 타도하게 하는 것이 클라이막스이다. 보시라이는 이를 꿈에도 바랐고, 새로운 사람들과 부하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왕리쥔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왕리쥔의 개인이력을 들춰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는 처커민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문맹이다. 그는 몽골족이고, 초망양웅의 혈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동북사람의 사투리로 말하자면, '표호호(飆乎乎)'하다. 무슨 사상이나 문화도 없다. 그러나 사회경력은 적지 않다. 인생의 경험도 얕지 않다. 그는 70년대에 지식청년이었고, 군대에도 갔다. 임업국과 상업국의 직원도 지낸다. 1984년에야 현급 테파(鐵法)시의 한 민경이 된다. 파출소 부소장의 직위에 오르기 위하여, 그는 부득이 전 철령시 사법국장이었던 왕리저우(王立洲)와 관계를 맺는다. 느끼하게도 그를 '양아버지'로 부른다. 나중에 그가 보시라이를 '큰형'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왕리저우의 도움하에, 그는 80년대말과 90년대초, 샤오난파출소와 다밍파출소소장 및 테파시공안국 부국장이 된다. 그러나 나중에 권력이 커지자, 여러가지 이유로, '양아버지'인 왕리저우와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고발하고 법원까지 간다. 게다가 수수께끼인 '삼륜차를 끄는 장꾸이청이 왕리쥔을 고발한 사건"이 <중국청년보>에서까지 떠들게 된다. 이 테링의 '타흑'으로 유명한 경찰은 체면이 다 깍이고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다.

 

다만, 권모술수에 능한 보시라이는 다른 관리들보다 대담했고, 장기적 안목이 있었다. 그는 왕리쥔과 같이 대담하게 일처리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중에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20세기말, 21세기초에 왕리쥔의 사건은 논쟁거리가 된다. 카이위안현의 한 보통 백성이 왕리쥔 국장을 고소한다. 그의 말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이것은 테링에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다시 중복하지는 않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백성이 관리를 고발하고 백성의 말이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왕리쥔이 승소한다. 바로 보시라이등 랴오닝성의 관리들이 그를 위하여 좋은 말을 해주엇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초망영웅'은 일거에 야심가의 품에 안긴다. 그리하여 보시라이는 랴오닝에서 반탐타흑(反貪打黑)을 위하여 왕리쥔을 기용한다. 들리는 바로는,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류용을 친히 왕리쥔에게 넘겨서 가두어 놓는다. 랴오닝의 언론계인사에 따르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손을 잡고 게다가 원스전에게 무슨 부패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보시라이는 허탕을 치고 만다. 그는 성위서기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왕리쥔이 얻기 힘든 인재라는 것을 발견한다.

 

초망영웅과 실의관리의 야심

 

보시라이가 없었더라면, 왕리쥔은 기껏해야 랴오닝성 진저우시의 부청장급 하급관리로 끝났을 것이다. 이전에 그는 테링에서 조폭을 단속할 때, 리펑과 지방관리의 지지하에서 한 것이다. 그의 치명적 약점은 처음부터 동기가 불순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권리를 빼앗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관리의 내부투쟁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테링에서건 판진에서건 진저우에서건, 그는 모두 엉터리사건들을 만들어 냈다. '흑사회'를 체포한다고 했지만 실은 상대방측 관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작이 많고, 고문이 있었으며, 엉뚱한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이렇게 법을 농락했고, 잘못된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박해를 받거나 억울한 사람들은 계속 그를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왕리쥔은 양아버지보다 센 큰형 보시라이를 모시고 있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고압적으로 안정을 유지한다는 통치심리가 사법부서로 하여금 그런 점은 눈감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왕리쥔의 법집행에서 야심과 악행을 조장하게 된다.

 

랴오닝의 언론계인사에 따르면, 일찌기 2001년에 그들은 서로 알았다. 그들은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지경이었다. 보시라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절대로 원스전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랴오닝성 제1인자의 자리를 우회하여 국가상무부로 갔다. 아마도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 2007년, 부친 보이보가 죽은 후, 그는 여전히 부친의 그늘에서 위세를 부리던 것을 계속했다. 자신의 인맥과 경력을 가지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다녀, 원한은 많이 산다. 그래서 더 올라가지 못한다. 정치국의 말석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충칭으로 좌천된다. 왕리쥔은 이것들을 꿰뚫어 보았다. 아마도 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쓸모를 너무 높에 평가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보시라이에게 기대를 한다.

 

확실히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손을 잡고 보시라이를 내려보내자, 보시라이는 일처리에 있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통상적인 방식대로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동료와 정적의 약점을 찾았다. 전임관리인 왕양은 그에게 눈엣가시였다. 허궈창도 마찬가지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그를 조사하지 못하도록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조상묘를 파헤치는 것이다. 그래서 중경에서 운동을 벌인다. 구카이라이등이 정교하게 계획한 후, 보시라이는 '창홍타흑'을 결정한다. 다롄에서 내놓았던, '북방홍콩'의 구호와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그저 허풍을 떨고 토지가격을 끌어올려서 구카이라이가 변호사사무소의 명의로 해외에서 투자를 유치하여 돈을 대량으로 긁어모으는 것이었다; 지금은, 충칭의 백성들이 부자와 관리를 미워하는 심리를 이용하여, 사회의 빈부격차와 양극화의 심각한 문제를 겨냥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력혁명의식을 일깨워 중국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이렇게 어지러운 가운데 본인의 승진을 노린 것이다. '타흑'은 바로 돈을 뺏어 관직을 사는 것이다. 국내외매체를 매수할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랴오닝의 자신의 기득이익을 보호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미 예순이 된 지방관리로서, 앞에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손을 잡고있고, 시진핑과 리커창이 길을 막고, 뒤에는 랴오인의 억울한 백성들이 고발을 하고, 해외매체는 협공을 하고 있다. 보시라이로서는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밀려나는 것이다. 밀려나면 바로 죽는다. 그러므로 , 그는 도박을 걸 수밖에 없었다. 왕리쥔은 정치도박꾼 보시라이가 쥔 마지막 에이스카드인 셈이다. 2008년 그는 '타흑영웅'을 진저우에서 충칭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중임을 맡긴다. 먼저 부국장을 주었다가 곧이어 국장을 준다. 그후에는 부시장까지 오른다. 삼단뛰기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보시라이는 조직절차를 파괴하여 사람을 썼고 그 영향이 컸다. 아쉽게도 그가 쓴 것은 법도 하늘도 없는 나쁜 놈이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왕리쥔은 자신의 정치생명에 봄바람이 불어왔다고 느꼈다. 감지덕지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일을 벌였다. 동북에서 수십명을 데려와서, 공안국의 모든 중상층 직위를 차지한다. 이들도 원래는 관직도 낮고 발언권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왕리쥔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다. 보시라이의 뜻을 받들어 이들은 공안,검찰,법원을 파괴한다. 270개의 전문사건팀을 만들어, 7000여명을 조사한다. 1천여개의 '타흑기지'를 찾아냈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일을 저질렀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허궈창과 왕양의 옛 부하들은 모조리 조폭의 보호세력으로 만들었다. 반대파의 관리와 관계가 밀접하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는 민영기업은 모조리 흑사회로 몰았다. 2300만명의 도시에 533개의 흑사회조직을 만들어낸다. 수천수만명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다. 수백명이 극형이나 중형을 받았다. 수십만명이 사방으로 도망친다. 이것은 운동식의 타흑일 뿐아니라, 기존의 사법절차를 파괴한 것이다.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도망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래 30여년간의 경제성과를 모조리 무너뜨린다. 그리하여 전국에 '도망'붐이 만연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체포된 관리와 기업주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원창은 확실히 탐관이다. 그가 '쌍규'로부터 사형을 판결받기까지 11개월동안 기존의 '이지재판'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법제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왕리쥔은 '법치'가 아닌 '인치'에 봉사하는 살인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원창이 죽기 전에 왕리쥔과 담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이 대거 보도된다. 원창의 제수인 세차이핑이 28명의 남자정부를 두었다고 흑칠을 하는 것처럼 여기에도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 왕리쥔이 미국영사관에 들어간 후 미국인들에게 제공한 정보중에서, 녹음과 글이 있다. 예를 들어, 중남해의 고위층이 보시라이와 왕리쥔을 갈라놓고, 보시라이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렇지 않다면, 왕리쥔이 전임관리의 임종전에 비밀리에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 왜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얘기를 들었을까? 만일 보시라이가 이미 원창의 진술자료를 보과과를 통하여 미국으로 내보냈다면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어사망파'하겠다고 말한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왕리쥔이 너무나 많은 엉터리사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리고 보시라이가 얼마나 마음이 독하고 손속이 매운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잘 알기 대문에, 군중의 제보로 테링공안의 부패사건이 왕리쥔에게까지 번져오자,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보시라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 씹은 껌을 버리듯이 왕리쥔을 따르던 심복들을 체포해버린다. 이들 심복은 왕리쥔의 그늘에서 행세한 사람들이다. 일찌기 '타흑'을 핑계로 대거 돈을 긁어모았다. 지금은 감옥에 갇혔고, 마찬가지로 고문을 받고 있다. 그리고 왕리쥔도 면직당하고,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는 왕리쥔의 성격에서 원수로 여기는 고질병이 다시 도지게 만들었다. 과거의 양아버지 왕리저우, 지금은 큰형 보시라이이다. 큰형이 의리를 지키지 않고, 배신하였다. 그렇다면 몽골족 동북사나이는 극단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기심과 광망이 반목의 근원이다.

 

왕리쥔과 보시라이의 행적을 살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유효한 감독매커니즘이 없었다. 관리, 특히 공안검찰법원의 사법대권을 장악한 지도자급 간부에게 있어서 개인의 이익과 목숨을 위해서라면 정산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아마도 반도의 마지막 순간에 왕리쥔은 과거를 반성했는지 모른다. 과거에 보시라이등이 그를 도와서 '인력거꾼사건'을 잠재웠다. 당시에는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오인했지만, 실제로는 평생을 해친 것이다. 관리가 득세할 때 법을 어지럽히면, 나중에 법이 만든 시한폭탄을 묻는 것과 같다. 왕리쥔은 생각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몸에 칼까지 맞았고, 지록위마했으며, 3.19총격사건도 날조하고, 판기항을 마구 때려서 죄를 불게 만들어 형장으로 보냈고, 리좡을 억울하게 감옥에 가두기도 했으며, 리쥔을 추격하여 중국을 떠나게 하기도 했다. 이들 엉터리사건의 책임은 보시라이가 그에게 죄책을 떠넘길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상부에 고발할 것인가? 그에게는 당중앙에 직접 통하는 통로가 없다. 공개적으로 발표할 것인가? 언론자유가 없다. 아마도 만일 숙청된다면 보시라이는 반드시 그를 우샤오칭처럼 비밀리에 죽이려고 할 것이다.아마도 타흑영웅의 속편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의 시신에 당기를 덮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유일하게 선택가능한 것이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진퇴에 모두 살 길이 있다. '진'은 정치망명을 하는 것이고, '퇴'는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그를 국가안전부에 넘길 것이다. 전자의 고려는 그가 문맹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동북재경대학의 공상석사학위를 가졌다고 하여 학력이 그렇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보시라이의 전화 한통에 그는 28만위안을 주고 산 것이다. 그가 수십개의 발명특허가 있다는 것을 믿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는 <국제법>을 전혀 모른다. 미국인들이 그를 조롱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후자는 그가 보시라이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권리와 목숨에 탐욕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듣기좋은 말을 하지만, 그들은 관건적인 순간에는 국가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매국노들이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든 또 하나는 광망(狂妄)이다. 보시라이는 부친의 음덕에 의존한다. 20세기, 다롄에서부터, 수백의 엉터리사건을 만들어내고, 수천의 사람들이 불행과 고통을 당했다. 충칭에 온 후에는 더더욱 죄악이 극치에 달한다. 수만의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왕리쥔은 관리의 발걸음을 뒤쫓아가며, 20세기부터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충칭에 오자 자신이 권력이 커졌고, 횡행패도적이 된다. 먼저 작년 국경절에 장갑차를 도로와 상업가로 끌고 나가서 백성들을 놀라게 했다. 그다음에는 황치판이 2월 7일 70대의 경찰차와 몇 대의 장갑차를 끌고 청두시까지 간다. 미국인과 자신의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하마터면 무장충돌이 일어나고 정변이 발생할 뻔했다. 이는 중공건국이래로 드물게 보는 괴이한 일이다.

 

이를 보면, 왕리쥔이 발명한 경화(警花) '홍우의(紅雨衣)의 선혈은 이미 자신의 몸에 튀었고, 그가 일찌기 즐겨 얘기하던 장갑차는 자신을 둘러쌌다. 그가 배양했던 새로운 경찰복을 입은 동료들이 그를 추격해왔고, 그가 친히 서명하여 구매한 경찰차량은 자신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과거에 여러 명의 정상인을 정신병자로 몰았는데, 지금은 그가 그 주인공이 된다. 보시라이는 그에게 '휴가식 치료'를 시키고자 했다. 보기에 이기심이건 광망이건, 모두 관리를 망친다.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근원이다. 왕리쥔의 이야기는 끝났다.'보시라이는 계속 공연해야 한다. 그러나 린뱌오가 외국으로 도망치고나서 마오쩌둥이 6년을 더 산 것처럼, 그들의 명예는 이미 붕괴되었다. '중경모델'도 이미 파산났다. 중국인들은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2012년 2월 13일 터론토 메이시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