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가후(賈詡): 동한분열의 최고죄인

중은우시 2012. 2. 27. 21:37

글: 호각조(胡覺照)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陳壽)는 통치계급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가후(賈詡)를 조조의 막료중 가장 중요한 모사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순욱(荀彧), 순유(荀攸)와 나란이 거명했다. 당연히 여기에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고, 가후는 확실히 얻기 힘든 인재이다. 만일 사회발전, 백성의 안거낙업의 각도에서 본다면, 전혀 반대되는 평가를 해야 한다. 가후는 삼국사상 최고의 죄인이라 할 수 있다.

 

가후는 양주(凉州) 무위(武威) 사람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했다. 불행한 점은 그가 관직에 나가자마자 동탁(董卓)의 문하로 잘못 들어간 점이다. 태위연(太尉)에서 평진도위(平津都尉)를 거쳐, 토로교위(討虜校尉)까지 평보청운(平步靑雲)이라 할 만했다. 그후,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中郞將)인 우보(牛輔)의 오른팔이 되어 하남 섬현일대에 주둔하며, 이각(李), 곽사(郭汜), 장제(張濟)등의 장수를 거느렸다. 동탁이 주살된 후, 우보는 군대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놀란 나머지 급히 대량의 금은주보를 가지고 야반도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복인 지호적아(支胡赤兒)등은 견물생심으로 우보를 죽이고, 그의 수급을 장안으로 보내어 황실로부터 상을 받고자 한다.

 

우보가 죽자, 이각, 곽사, 장제등은 우두머리를 잃은 파리떼와도 같이 불안해하는 와중에 군대를 해산하고 비밀리에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바로 이때, 병란에서 도망친 가후를 만난다. 그들의 생각을 들은 후, 가후는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장안성에서는 의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양주출신의 관병은 모조리 주살한다는 말도 있다. 여러분이 군대를 버리고 혼자서 떠난다면, 정장 한 명만 만나도 체포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출발하여, 연도에 양주의 산병을 끌어모아 장안을 공격하여, 동태사의 복수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만일 성공하면 황제의 뜻에 따라 천하를 토벌한 것이고, 실패하면 그때가 되어 도망쳐도 늦지 않다."

 

가후의 책동과 교사에 따라, 이각, 곽사, 장제등은 무리를 이끌고 관중으로 쳐들어간다. 연도에서 동탁의 부하였던 번조(樊稠), 이몽(李蒙), 왕방(王方)등이 통솔하는 서량의 병사를 거두니, 총수가 십여만에 달한다. 정세가 아주 위급해졌지만, 왕윤(王允)은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영향력이 크게 있던 호문재(胡文才), 양정수(楊整修)를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함곡관 동쪽에 주둔하는 양주 쥐새끼들이 뭘 어떡하겠다는 거냐? 너희 둘이 그들을 불러와라." 이 두 사람은 왕윤이 평소에 자신들을 소홀히 대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이제서야 그에게 보복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문제를 해소시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실제로는 이각등이 장안으로 진공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왕윤은 영웅본색을 잃지 않았다. 여포가 패퇴하면서 왕윤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했으나, 그는 큰 소리로 말한다: "만일 선황들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면, 위로는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만일 할 수 없으면, 나는 죽음으로써 보답하겠다. 황제가 나이어리니 나에게 의존한다. 만일 위기에 처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다면 내가 차마 하지 못할 짓이다. 너는 힘을 다하여  포위망을 뚫어라. 빠져나간 후 나를 대신하여 관동의 원소(袁紹)등에게 감사하다고 말해달라. 그들이 국가를 중하게 여기도록 격려해달라."

 

장안은 포위 십일만에 함락된다. 이각, 곽사등은 병사들이 살육약탈을 저지르도록 놔두었다. 재물이 모조리 강탈당했을 뿐아니라, 전체 장안성의 남녀노소가 거의 모조리 죽음을 당한다. 한헌제도 선평문의 성루에 올라서 잠시 피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궁지에 몰리자, 왕윤은 겁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성루에서 내려와 이각등을 만난다. 이각은 그와 세 아들 및 종족 10여명을 모조리 죽인다. 이각등은 장안으로 들어와 국가의 권력을 좌지우지한다. 이로써 국가는 군벌혼란의 난세로 접어든다. 가장 먼저 마등(馬騰), 한수(韓遂)등이 양주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보자, 즉시 서량에서 장안으로 와서 투항한다. 얼마후 마등은 다시 장안을 급습할 것을 모의한다. 음모가 새어나가고 혼란중에 마등이 패주한다. 이각은 다시 병사들이 살인방화약탈을 하도록 놔두어 각 현을 공격한다. 이리하여 수십만호구의 전체 관중도의 백십만민중은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게 된다. 이년간 사람이 사람을 먹다가 거의 다 먹어버려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른다. 곧이어 이각등은 권력과 이익을 놓고 다투어 곽사와 함께 번조를 죽이고 그의 부대와 재산을 나눠가진다. 얼마후 이각은 곽사와 반목한다. 장안성내에서 서로 죽고 죽인다. 이각은 한헌제를 군영에 인질로 붙잡아 놓고, 궁전의 성문에 불을 지른다.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가마와 의복, 기물을 자신의 집으로 옮긴다. 곽사는 마음이 급해져서 조정하러 찾아온 대신들을 붙잡아 인질로 삼는다. 기실 상방은 자신을 제외하고 인질들을 신경이나 썼겠는가?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개가 개를 물듯이 서로 몇 달간 공격한다. 전사한 사병만 몇 만이 넘는다. 이각, 곽사가 서로 싸울 때, 이각의 부하장수인 양봉(楊奉)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이각의 세력이 약화된다. 장제의 조정을 거쳐 이각은 한헌제를 풀어주고, 곽사는 문무백관을 풀어준다. 그리고 다시 황제를 붙잡아 미현(眉縣)으로 간다. 급박한 와중에 한헌제는 양봉의 군영으로 도망친다. 양봉은 부대를 내보내 곽사의 부대를 격파하고, 동승(董承)과 함께 천자를 맞이하여 낙양으로 가고자 한다. 이익만 알고 의리는 없는 이각, 곽사는 이때 서로 싸우다가 돌연 연합한다. 둘 다 인질을 풀어준 것을 후회했다. 다시 병력을 파병하여 헌헌제와 문무백관을 추격한다. 홍농일대에서 양봉, 한섬(韓暹)등과 교전을 벌이는데, 양봉이 패배하고, 이각, 곽사는 그 틈을 타서 문무백관을 살해하고 궁녀환관등을 약탈한다. 한헌제는 겨우 몸만 빠져나와 도망치고, 나중에 조조가 맞이하여 허창으로 간다.

 

동탁이 난을 일으킬 때, 소위 십팔로제후는 원술(袁術)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제후(즉 군벌)의 특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즉, 근왕(勤王)의 군대였다. 그때 비록 유대(劉垈)가 교모(橋冒)를 죽이고 동군을 탈취하고, 원소가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내전의 개별적인 현상이었고, 규모도 아주 작았다. 이각, 곽사등이 조정을 휘어잡고 관중을 혼란에 몰아넣을 때, 황제 및 문무백관의 존엄과 체면은 땅바닥에 떨어진다. 중원의 군사우두머리들은 그제서야 점차 탈각환우(脫殼換羽)하여 한 지방에 할거한다.

 

이를 보면, 가후는 동한말기 군벌혼전, 국가분열을 가져온 민족죄인이다. 이각, 곽사등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왕윤은 일처리가 부적절하여 군벌혼전에 대하여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후세의 존경을 받을만한 영웅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