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육기(陸棄)
역사상 제갈량만이 원래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라고, 제후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천고일상(千古一相)에 오르고 유방백세(流芳百世)하게 된다. 역사상 오직 유비만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삼고초려를 통하여 군신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삼국시대라는 이 격정적이고, 투지넘치는 시대에 ‘제갈량식’의 인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은 혹은 명성을 낚고 역사에서 잊혀지거나, 성격이 기괴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혹은 충신불사이군의 뜻에 따라 퇴장하였다. 어쨌든 이들 은사들과 재주를 겨룰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경세지재이고 보국지지(報國之志)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유비와 같은 주공을 만나지 못하여 혹은 평생 산에서 나오지 않거나, 농부가 되었고, 일대의 은사가 되었다.
동한말기의 당고(黨錮)의 화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기울어가는 동한왕조에 대한 마지막 믿음마저 버리게 된다. 동착이 입경한 후, 많은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일부 나이가 젊은 사람은 아예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시에 풍조로 되어 은거하는 것이 유행하게 된다.
이런 배경하에서, 삼국의 은사들이 대거 출현한다. 이 4명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형양명사 수경선생 사마휘일 것이다.
사마휘(司馬徽)는 호가 덕조(德操)이고 형양 양적(지금의 하남 우주)사람이다. 방덕공은 그에게 수경선생이라는 아호를 붙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명사를 추천하면, 그는 항상 ‘좋다. 좋다. 좋다.’라는 말만 하여 ‘호호선생(好好先生)’이라고 불리웠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비가 형주에 들어올 때 일찍이 사마휘에게 관직을 주고 부르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마휘는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비에게 “와룡” “봉추” 두 사람을 추천한다. 건안13년,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사마덕조를 청한다. 그러나, 아쉬운 일은 이때 사마휘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사마휘는 재주가 뛰어났지만, 그의 재능은 시종 펼쳐지지 못했다. 일생동안 은거로 마친다. 그러나, 사마휘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서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향랑, 유이, 이인, 윤묵등이 그들이다.
또 한명 방덕공(龐德公)이 있는데, 역시 형주의 명사이다. 당시 형주자사이던 유표가 그에게 관직을 주고 불렀을 때, 그는 받지 않는다. 유포는 할 수 없이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유표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 자신은 보전할 수 있지만, 천하는 보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방덕공은 이렇게 말한다. “홍곡이라고 부르는 새가 있는데, 높은 나무위에 집을 짓고, 저녁이 되면 그 곳으로 가서 쉰다; 원귀라는 동물이 있는데 깊은 연목 속에 구멍을 짓고 산다. 저녁이 되면 그곳으로 돌아가서 쉰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핻동거지는 사람의 집이다. 각자 자신이 가서 쉴 곳이 있는 것이다.” 방덕공이 이렇게 거절하는데도 유표는 꿋꿋이 계속 권한다: “선생은 논밭에서 힘들게 일을 하면서도 관직에 나가려 하지 않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렵니까.” 방덕공은 이어서 답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위험을 자손에게 물려줄 뿐이다. 나는 근로와 선량한 풍성과 안빈낙도의 마음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 이렇게 하면 남겨진 물건이 서로 다를 뿐이다. 내가 아무 것도 남겨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표는 그의 뜻이 굳어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탄식하고 돌아간다. 비록 방덕공은 산 속에 은거하며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은 제갈량의 둘째누나와 결혼하고, 그의 조카는 바로 유명한 방통이다. 방통은 바로 방덕공이 친히 교육시켰다. 비록 후세인들이 방덕공의 재능은 볼 수 없지만, 제갈량과 방통의 재증을 보면 방덕공의 수준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호소(胡昭). 자는 공명(孔明)이고 영천(지금의 하남성 우주)사람이다. 그는 제갈량보다 스무살이 많고 89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호소는 깊은 산 속에 은거하여 살았고,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유명한 제자가 한 사람 있다. 바로 야심가 사마의(司馬懿)이다. 사마의는 장남의 이름을 “사(師)”, 차남의 이름을 “소(昭)”라고 지었는데, 호소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관녕(管寧). 자는 유안(幼安)이며, 북해군 주허(산동성 임구)사람이다. 삼국시대 유명한 은사이다. 평원사람인 화흠(華歆)이 관녕의 이름을 흠모하여, 천리먼길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가까워지고 곧 좋은 친구가 된다.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호미로 농사를 짓다가 금을 발견한다. 관녕은 이를 기왓장보듯이 하며 한켠에 버려둔다. 또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자리에 앉아 글을 읽는데, 한 고관대작이 호화로운 가마에 앉아서 곁으로 지나갔다.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책에 정신을 쏟았다. 화흠은 얼굴에 선망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뛰어나가서 쳐다보았다. 화흠이 돌아온 후, 관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흠과 다른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대는 내 친구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할석단교(割席斷交)”, “서원득금(鋤園得金)”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삼국시대는 시대가 어지러워 많은 ‘은사’들이 나타나게 된다. “소은은어야, 중은은어시, 대은은어조(小隱隱於野, 中隱隱於市, 大隱隱於朝)”라는 말이 있다. 사마휘, 방덕공은 바로 유명한 “소은”이다. 유파, 완적은 “대은”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고담준론을 즐겼다. 이들은 세외은사로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은거하지 않은 ‘대은’들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고 후세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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