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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는 왜 대운하를 건설했는가?

by 중은우시 2010. 7. 12.

글: 설봉(薛鋒)

 

608년, 즉 대업3년, 수양제 양광이 막 황제에 오른지 얼마지나지 않아, 대거 수리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먼저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고, 이전에 팠던 광통거(廣通渠)와 연결하여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교통이 뚫리게 되었다. 그후에 그는 다시 한구(溝)와 장강 남부의 운하를 개조하여, 장강, 화하의 여러 지류를 가로지르는 운하시스템을 완성했다.

 

대운하, 경항대운하는 만리장성과 나란이 이름을 떨치고 있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공사로 전세계에 유명하다.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탁군)에서 남으로 항주(여항)까지,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 및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 성을 지나가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관통한다. 전체 길이는 1784킬로미터에 이른다.

 

수양제 양광이 판 대운하는 세계에서 하류운수거리가 가장 길고 공사량이 가장 많으며 역사가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이다. 운하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 물력, 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수양제 양광이 황제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대형운하공사의 건설을 명하였고, 많은 민간의 인력,물력,재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고, 결국은 수나라의 조기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수양제 양광 본인에게도 중국고대제왕사상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수서. 수양제본기상>>(권3)의 기록에 따르면, 대업원년, "하남의 각 군의 남녀 백여만을 보내어 통제거를 파게 하고, 서원에서 곡,낙수를 황하에까지 끌어들였다." 대업4년에는 "정월 을사. 조서를 내려 하북의 여러 군의 남여 백여만에게 영제거를 파게 하여, 심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했다." 수양제 양광은 대운하를 파기 위하여 수백만의 백성을 동원했다. 이같은 인력동원은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놀랄만한 일이다.

 

수양제 양광이 이처럼 대규모로 대운하를 파게 된 것에 관하여, 중국민간에서 전해지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수양제 양광이 자신이 운하의 수로를 따라 양주로 가서 미인들과 즐기는 외에, 양광이 수양(陽)의 지기(地氣)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당나라때 한옥(韓)의 <<개하기(開河記)>>에 따르면, "수양에는 왕기가 나왔다. 하늘에 점을 친 경순신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오백년후에 천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양광의 처남이자 간의대부인 소회정은 운하를 파서 첫째는 광릉까지 가는 길을 열고, 둘째는 왕기를 파버리자고 한다. 양광은 그의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며 대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명나라때의 제동야인도 그의 장회소설 <<수양제염사>>에서 장회의 편명을 '경순신이 천자의 기운을 고하고, 소회정은 운하를 파는 계책을 바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아주 상세하고 그럴듯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들은 야사, 전설이다. 이것으로 역사의 증거를 삼을 수는 없다. 수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이 풍수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역사의 수수께끼가 된 것같다.

 

수양제가 대운하를 판 이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양주에 가서 황음한 일을 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민간전설을 보면, 대운하의 성공적인 건설은 최소한 수양제로 하여금 그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수양제염사>>에서는 대운하가 개통된 후, 양광은 양주경화(揚州瓊花)를 구경한다는 빌미로 여러번 대운하를 따라 강남으로 가서 엽색행각을 벌였다. 매번 대운하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양안에는 오색깃발을 휘두르고, 그 기세가 융중했다. 대운하가 지나는 소북의 민간에는 지금까지도 양광이 당시 양주에서 미녀와 즐겼던 황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수나라때와 수양제에 관련된 여러가지 사서와 서적을 뒤적이다보면, 그중에는 괴이하고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사서와 서적에서는 야사전설의 선입관으로 수양제를 항상 황음무도한 일만 생각하는 후안무치한 인물로 그린다. 유사이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혹하고 가장 황음한 폭군이라고 그린다. 이것은 수양제가 세계에 유명한 대운하공사를 벌이고 여러가지 역사적 업적을 쌓은 것과는 아주 배치된다. 마치 수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그 목적이 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든지, 왕기를 없애기 위함이라고 폄하한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수양제는 양주의 미녀를 모조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즐기면 되지 않았을까? 왕기를 없애는데도 다른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왜 굳이 돈도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동원되는 대운하를 건설했단 말인가?

 

필자는 수양제 양광이 대운하를 건설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히 양주로 미인을 보러 가기 위함도 아니고, 무슨 수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함도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는 어미지향인 강남지역의 많은 물자를 북으로 운송하여 경도와 황궁에서 쓸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순유하고 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예를 들어, 대운하를 판 후에, 강남지역에서 낙양으로 운송되는 쌀, 비단, 진귀이보등이 계속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서적에서 수양제를 너무나 황음하고 너무나 멍청한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수양제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당시의 문인들을 해쳣기 때문에, 나중에 수양제는 요마처럼 그려지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