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염(趙炎)
속담에 운이 나쁘면 냉수를 마셔도 체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맞는 말이다. 당헌종(唐憲宗)의 다섯때 딸이 태화공주인데, 당나라에서 네번째 화친공주(和親公主)이자 마지막 공주이다. 재수없는 사람중에서도 가장 재수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짧은 40여년의 인생에 다섯명의 남편을 억지로 맞이해야 했고, 겪은 운나쁜 일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회흘(回紇)에 화친공주로 가는 것은 운나쁜 일이다. 이것은 당나라 공주들 사이에 공인된 일이다. 그 이전의 전철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화공주의 고모할머니인 함안공주(咸安公主)는 회흘에 화친공주로 갔다. 그녀는 정치적인 희생물로 회흘에 가서 808년까지 3명의 칸에게 시집을 갔다. 장경원년(821년)이 되어 당헌종이 막 죽었을 때, 회흘의 보의칸(保義可汗)은 다시 공주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공주들은 모두 기도했다: 절대로 자신이 뽑히지 않기를. 그러나, 공주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었다. 누가 가고 누가 가지 않을 것인지는 오빠 당덕종이 결정하면 그만이다.
원래 당덕종이 고른 것은 태화공주의 아홉째 여동생인 영안공주(永安公主)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채례도 아직 준비를 마치지 않았는데, 보의칸이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이 숭덕칸(崇德可汗)에 오른다. 이 자도 당나라공주를 맞이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다시 사람을 보내어 구혼한다. 당목종은 영안공주는 원래 보의칸에게 보내기로 했었으므로 다시 숭덕칸에게 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섯째 여동생인 태화공주를 숭덕칸에게 시집보낸다. 이를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태화공주부(太和公主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친왕의 예에 따라 배치하며, 읍사인(邑司印)도 하나 주조해주고, 태화공주를 인효단려명지상수가돈(仁孝端麗明智上壽可敦)으로 삼는다. 태화공주의 꽃가마가 출발할 때, 당목종은 통화문까지 가서 그녀를 배웅한다. 그리고 백관을 시켜 성대한 송행의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백관들에게 시를 지어 기념하도록 했다. 당시 온 성의 사람들은 다 보았다. 영안공주도 갔다. 그녀는 운나쁜 언니를 보면서 희비가 엇갈리는 와중에 인생의 도리를 깨치고는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태화공주가 회흘에 도착한 후 아장(牙帳, 황궁)에서 백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을 때였다. 숭덕칸은 먼저 태화공주와 사적으로 만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송친사(送親使)인 호징이 동의하지 않는다. 회흘인들은 "이전에 함안공주도 이렇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호징은 "천자께서 나에게 공주를 칸에게 시집보내도록 명했다. 지금 나는 아직 칸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칸이 먼저 공주를 만나볼 수는 없다." 숭덕칸은 그제서야 포기한다. 아장에 도착한 후, 숭덕칸은 동향으로 누각 위에 앉았고, 아래에 장막을 만들어 태화공주를 거주하게 했고, 태화공주에게 호복(胡服)으로 갈아입으라고 요구한다. 한 나이든 시녀가 그녀를 부축하고 나와서 숭덕칸에게 절을 하게 한다. 그 후에 신하들이 서 있는 자리로 돌아가서 가돈(可敦)의 복장을 입고, 다시 나와서 절을 한다. 그 후에 곡여(曲輿)에 앉아서, 누각을 아홉번 돌고는 가마에서 내려 누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숭덕과 함께 동쪽으로 나란히 앉는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배견(拜見)한다. 그후에 태화공주는 자신의 아장을 건립한다. 두 대신이 보좌한다. 송친사 호징이 돌아갈 때, 태화공주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배웅한다.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였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다.
숭덕칸은 단명했다. 장경4년(824년)에 죽는다. 다음 해, 즉 당경종 보력원년(825년) 육월, 소례칸(昭禮可汗)이 즉위한다. 태화공주는 소례칸에게 개가한다. 당정종은 전무풍(田務豊)에게 명하여 국서와 12수레의 예물을 소례칸과 태화공주에게 보낸다. 832년, 소례칸이 부하에게 피살되고, 창신칸(彰信可汗)이 즉위한다. 태화공주는 다시 창신칸에게 개가한다. 그리고 835년, 마사여자(馬射女子) 7인과 사타소아(沙陀小兒) 2인을 당문종에게 보내며 이 일을 알린다. 839년, 재상 굴라물천공이 사타돌궐(서돌궐 10성부락중 1부족)을 끌어들여 창신칸을 공격한다. 창신칸은 패배하여 자살한다. 재상 굴라물천공이 칸이 된다. 태화공주는 굴라물천공에게 개가한다. 이 혼인시간은 매우 짧았다. 겨우 1년간 유지되었다.
840년 회흘의 장군 말록하가 힐알사(회흘 서부 3천리에 있는 한 부족으로 원래 회흘의 휘하임)의 10만병력이 이끌고 진공하여 굴라물천공을 죽인다. 아장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한때 강성했던 회흘칸 정권은 이렇게 멸망한다. 소례칸으 동생인 오개(烏介)는 나머지 13부락을 이끌고 남하하여 당나라의 변경 착자산(錯子山,. 외몽고 남부)으로 간다. 그리고 841년 스스로 오개칸에 오른다. 혼전중에 태화공주는 힐알사의 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당무종 회창원년(841년) 십일월, 재상 이덕유(李德裕)는 이렇게 말한다: "회흘에 동란이 생겨, 태화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찾지 않으면, 오랑캐들은 공주를 회흘로 시집보낸 것이 원래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주에게 면목이 없을 뿐아니라, 회흘인들의 감정도 상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사람을 보내어 공주를 찾아야 합니다." 당무종이 응락했다. 그러나 그녀를 찾지는 못했다.
태화공주를 붙잡은 힐알사의 장군 아열(阿熱)은 스스로 이릉(李陵)의 후손이며, 당나라와는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태화공주는 당나라의 귀한 여인이니 사신 달간을 시켜 태화공주를 호송하여 당나라조정으로 보내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오개칸이 알게 되어, 사신을 죽이고, 태화공주를 붙잡는다. 그리고 부인으로 삼고 인질로도 삼았다. 남으로 사막으로 가서 주둔한다. 그리고 태화공주를 시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한다. 회흘칸이 이미 세워졌으니 책봉해달라고. 오개칸은 그의 재상 힐간가사등을 시켜 글을 올려, 당나라의 진무성을 태화공주와 오개칸에게 거주하도록 내줄 것을 요청한다.
회창원년(841년) 십이월 십사일, 당무종은 왕회등을 파견하여 회흘을 위문하고, 이만곡의 쌀을 보내고, 오개에게 칙서를 내린다: "진무성을 빌리고자 하나, 이는 전대에 선례가 없던 일이다. 만일 다른 조건이 좋은 지방으로 이주하고자 하고, 우리나라의 성원을 요청한다면, 잠시 막남에 주둔하여야 할 것이다. 짐은 당연히 공주가 경성으로 와서 만나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친히 관련 사항을 물어볼 것이다. 만일 원조가 필요하면, 우리는 반드시 힘을 다해서 도울 것이다."
오개칸은 식량을 보자 당나라정부는 속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나라에 계속 물건을 달라고 요구한다. 회창2년(842년) 당무종은 말한다: "너희는 잘못한 것이 없다. 자신의 국가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여 우리에게 의탁하러 왔고, 우리는 이미 너희를 잘 대해주었다. 너희는 그런데 혼인관계를 가지고 협박하려 한다. 만일 도리를 안다면, 칸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 그리고 자신도 경성으로 와서 황제를 접견해라. 그리고 태화공주를 경성으로 보내어 태황태후를 배견하게 하라. 너희가 진심으로 애원하면, 우리는 너희를 구제해 줄 것이다. 너희가 만일 진심이 아니면 후회하지 말라." 회흘은 아마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태화공주를 경성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중도에 장애를 만나, 장안까지 가지 못한다. 나중에 회흘은 당나라에 손을 벌려도 주지 않으니, 변경에서 소란을 피운다.
당무종은 화가 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태화공주에게 겨울 옷을 보내고, 그 기회에 태화공주에게 서신을 보낸다. "선제가 아픔을 참으면서 공주를 회흘로 보낸 것은 국가안녕을 위한 것이다. 회흘이 우리르 도와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 회흘이 상리에 어긋나게 자주 남하하여 우리 변경을 침략하니, 고모는 고조, 태종의 영령이 두렵지 않은가. 태황태후의 자애를 생각하지 않는가? 회흘의 국모로서,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달라. 만일 회흘이 공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돈관계를 끊겠다. 이제부터 공주는 나의 고모가 아니다." 말이 좀 심했다. 태화공주는 인질인데, 어찌 그녀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회창3년(843년) 정월, 회흘은 진무성으로 접근한다. 이때 당나라제국은 회흘이 이렇게 쇠약해지다, 다시는 한때 불가일세하던 회흘을 더 이상 눈에 두지 않았다. 과감하게 유개, 석웅등을 파견하여 공격한다. 석웅은 진무성에 도착하여, 성루에 올라 회흘의 인마를 관찰한다. 수십량의 수레를 보니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홍의 혹은 녹의를 입고 있어 한인같았다. 석웅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한다.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공주의 장막입니다"라고 한다. 석웅은 사람을 공주에게 보낸다. "공주께서는 이곳이 집입니다. 방법을 강구해서 오십시오. 지금 출병하여 오개를 토벌하려고 합니다. 공주께서 시종들과 서로 보호하고,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당군은 금방 회흘을 물리쳐서 근 백년에 걸쳐 쌓여 있던 원한을 푼다.
오개칸은 화친한지 이렇게 오래된 처가가 배후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칼질할 줄은 몰랐다. 그는 황급히 3천명을 이끌고 도망친다. 나중에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이리하여 회흘은 나라가 망하고, 여러 부족은 흩어진다. 당나라와 회흘 두 나라의 은원은 이로써 끝이 난다. 석웅의 군대는 태화공주를 되찾아서, 그녀를 경성으로 보낸다. 당무종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사람에게 명하여 경릉(당헌종의 묘)에 제사하여 알린다. 태화공주가 태원을 지날 때, 당무종은 사신을 보내어 위문한다. 그리고 힐알사부락이 진공한 백초피(白貂皮), 옥지환을 그녀에게 하사한다. 삼월 초하루, 나라를 떠난지 23년된 태화공주가 경성으로 돌아온다. 당무종은 재상에게 백관을 이끌고 장경사 앞으로 가서 영접하게 한다. 좌우신책에서 각각 이백명을 내놓고, 태상은 의장대를 보낸다. 장락역에서 태화공주를 맞이하여 장안으로 들어온다. 여러 신하들이 열을 지어 환영한다.
그러나, 태화공주의 심정은 희비가 교차하고 처량했다. 그녀는 먼저 궁으로 들어가서 태황태후 곽씨를 만난다. 곧이어 부친 당헌종과 오빠 당목종의 신위에 절을 한다. 그 후에 영순문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비녀와 반지를 벗고 통곡을 한다. 스스로 조정이 맡긴 중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화친의 임무를 완성하지 못했으니, 조정에서 죄를 내려달라고 말한다. 당무종은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안위시킨다. 그리고 그녀를 안정대장공주에 봉한다.
다행히 화친공주로 파견되지 않았던 동부이모의 자매들은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들은 태화공주가 화친의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데 대하여 멸시했다. 그녀는 조정으로부터 이렇게 융중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당무종이 여러 공주들에게 태화공주를 영접하라고 명하였을 때, 당선종의 딸 양안장공주, 당헌종의 딸 선성공주, 의녕공주, 진원공주등 7명의 공주는 명을 따르지 않고, 영접하러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도 고의로 그녀를 보러 가지 않는다. 당무종은 대노한다. 양안장공주에게는 봉견 300필, 선성등 공주에게는 각 100필을 내도록 벌한다. 이 일을 사서에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게 하였다.
태화공주가 궁으로 돌아온 날, 당무종은 대신들에게 시를 써서 기념하게 했다. 그리하여, <전당시>에는 여러 수의 <태화공주환공>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그중 이빈의 시가 가장 뛰어났다.
천교발사범변진(天驕發使犯邊塵), 한장추동수탈친(漢將推動遂奪親)
이란응무초거모(離亂應無初去貌), 사생난유각회신(死生難有却回身)
금화반로증반수(禁花半老曾攀樹), 궁녀다비구식인(宮女多非舊識人)
중상봉루추고사(重上鳳樓追故事), 기다수사향청춘(幾多愁思向靑春)
중간의 몇 구절이 특히 뛰어나다. 태화공주의 각도에서 그녀의 희비가 교차하는 심정을 읊었다. 어렸을 때 기어올라놀던 궁정의 꽃과 나무는 이미 늙었고, 궁중에 그녀를 아는 궁녀도 몇 남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회상하니 그저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간 것같다.
고난을 겪은 태화공주는 떠난지 23년된 고국으로 돌아왔다. 원래 편안하게 지내야할 일이다. 그러나, 여러해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전쟁으로 인하여 놀란 일이 많았고, 귀국후에 자매들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서 그녀의 신심이 모두 지쳤다. 장안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나이는 40살 가량이었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미낭(蕭美娘): 수양제의 황후 (0) | 2012.02.19 |
---|---|
이각(李恪): 당태종이 가장 사랑한 아들 (0) | 2012.02.06 |
누사덕과 적인걸 (0) | 2011.05.25 |
당예종 이단(李旦): 양차계위(兩次繼位) 삼양천하(三讓天下) (0) | 2011.04.07 |
감진(鑒眞)은 실명했을까? (0) | 2011.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