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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예종 이단(李旦): 양차계위(兩次繼位) 삼양천하(三讓天下)

by 중은우시 2011. 4. 7.

 

: 진령신(陳令申)

 

역사상 두번 황위에 등극하고, 세번 천하를 양보한황제가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잘 모를지는 몰라도, 그는 바로 당나라의 제5대황제 당예종 이단이다.

 

당예종 이단(662-716)은 당고종 이치의 여덟째 아들이며, 막내아들이다. 무측천이 낳은 4명의 아들중 가장 어린 아들이기도 하다. 예종은 용삭2(662) 유월 초하루에 장안의 봉래궁 함량전에서 태어난다. 그해 십일월 십팔일에 은왕(殷王)에 봉해진다. 나중에 그는 여러 왕위에 봉해지는데, 예왕, 기왕, 상왕등이 있다. 당예종의 초명은 욱륜(旭輪)이었다. 나중에는 자를 떼어내고 ()’이라고 불렸다. 영륭2(681) 다시 예왕으로 고쳐서 봉해질 때 이름을 으로 바꾼다. 나중에 그의 이름은 의 사이를 여러 번 오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의 여러 번 개명에서, 그가 이름을 으로 바꾸었을 때는 운이 좋지 않았을 때이고, 이름을 으로 바꾸었을 때는 운이 좋아진 때라는 것이다. 사서에서는 그를 겸손하고 공경하며 효성이 있고, 친구들과 잘 사귀었다. 공부를 좋아하고, 초서, 예서에 능했다. 특히 문자훈고에 관한 책을 좋아했다.” 예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받았고, 그후에 두번이나 황제에 오른다. 이러한 경력은 그의 동부동모형제인 당중종(唐中宗)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당황실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황사(皇嗣)도 되고, 황태제가 되도록 건의받기도 하고, 태상황도 해본 사람은 아마도 그 한 명뿐일 것이다. 이뿐 아니라, 모든 제왕들 중에서, 황제인 부친을 둔 경우는 기이할 것도 없지만, 황제인 모친을 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모가 모두 황제를 지낸 황제는 역사상 당예종과 당중종 형제둘뿐이다. 당예종의 남다른 점은 그의 세 형님(모두 무측천의 소생)이 모두 황태자를 지낸 바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두 형은 즉위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의 아들중에서도 장남은 황제의 자리와 인연이 없었고, 나중에 셋째아들이 황제에 오른다. 즉 그가 바로 당현종 이융기이다. 종실에서는 살신지화를 많이 당하던 험난한 시기에, 예종은 스스로의 몸을 잘 지키며 선종한다. <구당서. 예종기>의 말을 빌리자면, “무측천이 임조칭제하고 혁명을 일으킨 때로부터, 왕실에는 계속하여 변고가 있었다. 황제(예종)은 마번 겸손하고 양보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당예종은 과연 남다른 데가 있다.

 

당예종은 일생동안 두번 등극한다. 첫번째 등극은 사성원년(684) 이월 초칠일이다. 즉 고종황제가 죽은 다음 해이다. 그는 예왕 이단의 신분으로 형인 당중종을 대체했다. 당시 나이 22살이다. 당고종이 즉위한 연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등극은 이미 경운원년(710) 유월 이십사일의 일이다. 즉 당중종이 죽은 해이다. 이번 즉위는 상왕의 신분으로 중중의 아들인 소제(少帝) 즉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대체한 것이다. 두번의 등극은 27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27년동안, 당왕조의 중앙정국은 계속 변동을 겪었고, 연이어 사건이 발생한다. 예종의 일생은 전설적이다. 이는 그가 두번이나 등극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세번이나 천하를 양보하였기 때문이다.

 

첫번째 양보는 모친에게 양보한 것이다. 예종의 제1차등극은 무측천이 낙양의 궁중에서 당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으로 강등시킨 다음 날이다. 이때 무측천의 정치력은 아직 왕조를 교체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막내아들인 예왕 이단을 새로운 황제에 앉혔다. 예종은 그리하여 당중종의 뒤를 이어 당나라 제5대황제가 된다. 예종은 즉위한 후, 정궁에서 조회를 열고 정사를 볼 수 없었을 뿐아니라, 그저 별전에 거주할 뿐이었다. 무측천이 태후의 신분으로 임조칭제했다. 그녀가 새로운 황제인 당예종을 위해서 해준 것이라고는 이월 칠일 그를 새로운 황제로 앉히는 날에 그의 왕비 유씨를 황후로 봉해준 것이다. 며칠 후, 다시 예종의 장남 영평군왕 성기(成器)를 황태자에 앉힌다. 동시에 문명(文明)으로 연호를 바꾸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린다. 이것은 모두 당예종이 황제에 오름으로써 당연히 이루어져야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때 모든 국가의 정치는 무측천이 혼자서 결정했다. 당예종은 실제로 허수아비황제였다. 같은 해 무측천은 연호를 여흉상용광택으로 바꾼다. 1년에 연호를 3가지나 썼다. 이는 예종의 모후인 무측천이 왕조를 교체하는 것 이외에는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후의 한동안 서경업이 양주에서 병변을 일으키고, 종실인 월왕 이정등이 거병하는 일이 벌어진다. 무측천은 한편으로 대량으로 사람을 죽이면서, 정적들을 위세로 복종시키고, 동시에 정치를 황제에게 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수공2(686) 정월, 그녀는 조서를 내려 예종황제에게 정사를 돌여주겠다고 한다. 당예종은 모친이 본뜻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틴다. 무측천도 못이기는 척하고, 여전히 임조칭제하며 조정을 좌지우지한다. 다시 한해가 흘러 정월이 되었다. 무측천은 예종의 몇 아들을 모두 왕에 봉한다. 성의는 항왕이 되고, 융기는 초왕이 되며, 융범은 위왕이 되며, 융업은 조왕이 된다. 예종의 제왕의 존엄은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사실상 무측천은 한걸음 한걸음 정치의 최고봉을 향해서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당예종은 그저 어쩔 수 없는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영창원년(689) 무측천은 주력(周曆)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호를 재초원년으로 고친다. 이 해에, 무측천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 이때부터 피휘를 위하여 조서제서(制書)’로 개칭한다. 무측천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고, 수만의 사람들이 글을 올려, 무측천으로 하여금 개조환대(改朝換代)하도록 요청한다. 당시 종실대신과 조정의 반대파들은 살륙당하거나 멸문지화를 당했다. 무측천의 권력은 이미 아무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정치파란의 중심에 선 당예종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유위지가 죽은 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던 당예종도 모후에게 등극하도록 요청하고, 자신에게 ()’씨성을 하사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다. 당예종의 이러한 조치는 그의 본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개조환대를 위한 밑받침이 되었고, 예종 자신의 평안무사도 가져온다. 천수원년(690) 구월, 무측천은 아들 예종과 여러 신하으 청구를 받아들여, 구월구일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꾸고, 예종은 황사(皇嗣, 황위승계후계자)로 내려앉는다. 무씨성도 내리고 동궁으로 이주한다. 그에 대한 예의는 모두 황태자와 같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황태자의 명분은 주지 않았다. 황사는 후보성격의 황위계승인이다. 이단의 이름도 으로 바뀐다. 원래의 황태자는 황손이 되고, 황후 유씨도 비로 강등된다.

 

예종의 첫번째 천하양보는 이렇게 완성된다. 황사로 있던 예종은 나날이 그다지 평안하지 못했다. 무슨 원인에서인지, 무측천이 총애하는 호비(戶婢) 위단아(韋團兒)가 이 실의에 빠진 황사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와 사정(私情)을 나누고자 한다. 당예종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일로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당연히 그녀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렇게 하여 위단아에게 밉보이게 되자, 그녀는 예종의 비인 유씨와 덕비 두씨의 거소에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묻어두고, 그녀들이 염고요법(厭蠱妖法)을 행하여 무측천을 저주했다고 고발한다. 결과, 장수2(693) 정월 초이틀, 유씨, 두씨는 입궁하여 무측천을 가예전에서 알현한 후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비밀리에 궁중에 묻어버린다. 아무도 그녀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 묻었는지를 아무도 몰랐다. 당예종이 두번째 등극한 후, 두 사람의 혼을 불러 장사지내준다. 두 비의 돌연한 실종에도 당예종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모후의 앞에서는 태연자약하게 행동했고,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당예종의 두덕비(당현종의 생모)의 모친인 방씨가 법도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고 고발했고, 방씨도 사형을 받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때 나서서 방씨를 위하여 말을 해준 사람은 어사인 서유공인데, 그는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고 교살형을 받는다. 비록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삭탈관직을 당한다.

 

두번째 양보는 황형(皇兄)에게 양보한 것이다. 성력원년(698) 삼월, 무측천이 폐출되었던 여릉왕 당중종을 다시 방릉에서 불러들인다. 당예종은 여러 번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고, 당중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청한다.” 당예종이 아프다는 것은 핑계이다. 그는 자신이 어리므로 황형과 정치적 다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장유유서의 순서에 따라, 형님이 궁중으로 돌아오게 되자, 모후에게 황형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의사표명한 것이다. 당예종의 양보는 그가 이치에 밝고 잘 대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순조롭게 당중종을 다시 세울 수 있게 된다. 동시에 형제 2명의 불협화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당예종은 황사의 신분을 황형에게 양보하여 황형이 황태자가 된다. 자신은 다시 상왕에 봉해진다. 신룡원년(705) 장간지등이 정변을 일으켜, 장창종과 장역지 형제를 죽이고, 무측천에게 퇴위하도록 핍박하고 당중종을 세운다. 당중종은 예종을 안국상왕으로 하고, 태위의 직을 내린다. 그리하여 재상의 신분으로 국정에 참여한다. 1달도 되지 않아, 예종은 태위와 지정사의 지위를 사임한다. 그의 태도가 굳건해서, 당중종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얼마후 중종은 다시 예종을 황태제로 삼는다. 이는 분명히 그가 황위계승인 자리를 양보했던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이 칭호에 대하여, 예종이 다시 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만다. 예종의 양보로 그는 중종복벽후의 정치적 소용돌이속에서, 여러 번 의심은 받지만 평안하게 보신할 수 있었다.

 

세번째 양보는 아들에게 한 것이다. 경룡4(710) 유월, 중종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피살당한다. 그리고 소제 이중무를 황제에 앉히고, 연호를 당륭으로 바꾼다. 처음에, 재상 십여명이 집단으로 상의하여 상관완아가 집필한 중종의 유조는 위후가 황태후로서 임조칭제하고, 당시 안국상왕이던 당예종이 태위로서 보정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위후의 일당은 상왕이 보정을 하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위후가 무측천과 마찬가지로 임조칭제하기를 바랐다. 예종을 장애물로 생각하여, 일찍이 황제와 황사를 지낸 당예종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당예종은 당중종의 유지가 있고, 위후가 사심을 품고 그의 보정권한을 빼앗으려 할 때도, 그는 정면으로 부딛치지 않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겸손하고 양보하는 입장을 보여 이미 정권을 장악한 위후로부터 위해를 당하지 않는다. 이는 당예종이 정치투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면, 보통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뛰어난 재주를 보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대를 역행하는 일을 하다가 위후는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된다. 당예종이 셋째아들 이융기, 여동생 태평공주등이 금군장수들과 연락하여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위후를 주살하고, 소제 이중무를 폐위시킨다. 그리고 당예종을 다시 등극하도록 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궁중정변이 성공한 후, 왕공백관은 글을 올려,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있고, 사람들이 당예종이 등극하기를 바라니, 그에게 등극해줄 것을 요청한다. 소제가 조서를 내려 양위할 때, 예종은 여전히 글을 올려 사양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강렬한 요구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당륭원년(710) 유월 이십사일, 당예종이 승천문에서 즉위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소제 이중무가 유월 초칠일에 즉위하였고, 이십사일에 양위한다. 앞뒤로 1달도 되지 않았다. 여기에 위후가 임조칭제하였으므로, 그는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당나라역사상이건 아니면 역사연표에서도 그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당예종의 이번 즉위후 다음 달에, 위후를 주살하는데 공로가 있는 셋째아들 이융기를 황태자로 삼는다. 동시에 연호를 경운으로 바꾼다. 연화원년(712) 팔월 이십오일, 26개월간 재위한 예종은 다시 황제자리를 양보한다. 황위를 태자 이융기에게 넘기고, 스스로 태상황제가 된다. 이에 이르러, 당예종의 세번에 걸친 양보가 끝나는 것이다.

 

당예종의 세번에 걸친 양보를 살펴보면, 그가 모친에게 양보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두번째 황형에게 양보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번째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예종이 세번이나 천하를 양보한 것은 모두 자신의 평안무사를 가져오고, 그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였다. 사마광조차도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상왕은 관후하고 공경하며 조심성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양보를 잘한다. 그래서 무후, 위후의 세상을 거치면서도 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예종이 정말로 양보하기를 좋아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그의 마지막 양보로 새로운 황제 당현종이 나타나고, 당나라는 당현종시대에 태평성세를 이룬다. 이것은 하나의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개원성세의 도래는 예종이후의 역사적 연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