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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상(商)나라 부호묘(婦好墓)의 주인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2. 2. 6.

글: 제갈문(諸葛文)

 

 

 

상(商)왕조는 모두 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상나라의 문화중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청동기와 옥기뿐이다. 역사을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상나라때의 옥기조각기술은 이미 상당히 뛰어났고, 정교한 예술품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정교한 정도는 은허(殷墟) 부호묘에서 출토된 대량의 문물들로 입증된다. 그렇다면, 이 부호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렇게 많은 옥기를 무덤 속에 가져갈 수 있었을가?

 

문화재출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상나라때의 가장 중요한 분묘는 부호묘이다. 이 묘는 1976년 하남 안양의 은허유적지 서남측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국가고찰대의 장기간에 걸친 발굴과 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 묘의 주인은 상나라 제23대왕의 배우자중 한 명인 부호(婦好)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고 밝혀냈다. 이는 묘에서 나온 대량의 문물에 '부호'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가지고, 이름을 부호라고 확정한 것이다. 문헌을 보면, 상나라왕의 이름은 '갑을병정'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호는 상나라 무정왕(武丁王)의 배우자중 한 명이다. 이 부호는 상왕 무정의 배우자일 뿐아니라, 여장군이었다. 부호는 생전에 무정의 총애를 받았고, 국가의 군사업무를 주관했다. 그녀는 대명이 자자한 여장군이었다. 갑골문의 기재에 따르면 부호는 일찌기 여러번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다. 가장 많았을 때는 13000여명을 이끌고 나갔다. 이는 갑골문에 기재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전투였다. 이를 보면 그녀는 여중호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 부호묘는 은허에서 유일하게 보존이 완벽한 상나라때의 왕실묘이다. 이것이 발견됨으로써 사람들은 진정으로 삼천여년전 상나라의 사회생활과 예술을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그외에 부호묘는 은허에 유일한 갑골문의 기재로 증명이 되어, 묘주인의 신분과 연대를 확정할 수 있었던 왕실묘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상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생생한 표본을 제공해준다. 인류고고학과 역사학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부호의 묘장에서는 모두 1600여건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 옥기가 755건이다. 이를 보면 부호는 특별히 옥을 좋아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중 동물모양의 옥조각작품은 생동감있고 살아있는 것같다. 이는 당시의 공예수준이 아주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중 500여개는 패옥이고, 구멍이 있다. 몸에 찰 수 있었던 것이다. 옥의 품종도 각양각색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부호가 옥을 목숨처럼 아끼고 좋아하는 여인이었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전문가들이 출토문물을 정리하고 씻으면서, 대정(大鼎)에 "사모신(司母辛)"이라고 쓰여진 명문을 발견한다. 명문이 있는 청동기는 모두 210건이다. 그중 부호의 명문이 109건이다. '부호'명문이 있는 청동기중에서 분체언(分體甗, 분리되는 시루)이 있고, 3개의 대증(大甑, 시루)이 있다.  중국의 역대왕조는 모두 자신이 쓰는 부엌용구를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풍습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 취사도구는 묘주인 본인이 스스로 쓰던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 그외에 묘에서 출토된 청동월(靑銅鉞)은 아주 정교하고 형태가 위맹하다. 양면에 모두 호랑이가 사람머리로 달려드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이는 군대에서 최고통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절대로 이런 동월을 가질 자격이 없다. 이들 출토기물의 명문을 보면, 다시 한번 묘주인이 바로 갑골문에 기록된 그 용맹한 여장군이며 존귀한 왕후인 부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나라의 부호묘에서 출토된 대량의 옥기는 지금의 옥기연구와 보급에 모두 깊은 의의와 연구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옥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옥인(玉人)이다. 전문용어로 "기좌(跽坐)"라고 부른다. 이것은 원으로 깍은 옥기이다. 소위 원조(圓雕)이다. 즉, 입체조각이다. 조각을 다 한 후에, 전후, 좌우, 상하에서 돌려가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부조(浮雕)'가 있다. 대다수는 문양이 평면위로 높이 나와 있고 철(凸)형의 문양이다. 그리고 투조(透雕)도 있다. 이것은 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뚫어서 만든 것이다. 조각공예는 대체로 3가지로 구분된다: 원조, 부조, 투조

 

부호묘에서 출토된 이 옥인에 대하여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체불명의 물건이 옥인의 왼쪽에서 뒷등으로 꽂혀 있는 것이다. 측면에서 보면 이는 아주 분명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모두 이름을 붙이지 못했고, 잠시 그저 "병형기(柄形器)"라고 이름붙였다. 사람들은 이 옥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 먼저, 이 옥인이 바로 부호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몸 뒤의 병형기는 예의용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용은 알지 못한다. 다음으로, 이 옥인은 아마도 무당의 형상일 거라는 것이다. 그 병형기는 아마도 법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모두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아름다운 추측만 할 뿐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의문을 남긴 부분은 더욱 많다. 예를 들어, 왜 부호의 묘는 궁전지구에 만들어졌을까? 현재의 왕릉지구가 아니라. 그리고 상나라때의 묘장의 위에는 일반적으로 건물이 없는데, 왜 부호묘에는 같은 시기에 지은 건물기반이 있을까? 이런 여러가지 역사의 의문은 후일 고고학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