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주무왕(周武王)의 봉신방(封神榜)

중은우시 2012. 1. 30. 11:39

글: 압사룡(押沙龍)

 

파스체르나크(닥터지바고의 작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시대가 어떻게 변천할 지는 모른다. 아무도 풀이 어떻게 조금씩 말라가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에, 역사의 변화는 확실히 느리다. 왕왕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역사상 일부 관건적인 시기가 있었다. 이들 시기에, 세계는 급격히 변화했고, 그 변화도 빠르고 영향도 커서, 백년천년이후의 인류운명까지 미친다.

 

중국역사상, 내가 생각하는 세 번의 중요한 관건포인트는 기원전 1046년의 목야지전, 기원전221년의 진시황의 중국통일, 1840년의 아편전쟁이다.

 

목야지전에서 섬서의 주부락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왕조를 건립한다. 나는 이를 중국역사의 삼대폭발점중 하나로 본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과장이 심하다고 할 지 모른다: "이 자는 자기가 쓰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쓰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말을 나 개인이 한 말이 아니다. 왕국유 선생은 <관당집립>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변혁은 은주시기만큼 급격한 것이 없었다." 상나라는 주나라와 아주 다르다. 우리가 주나라를 볼 때, 전통문명의 특색을 명확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상나라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주나라는 중국역사의 참신한 기점이다. 중국전통문명속의 일부 핵심개념,예를 들어, "충" "효" "덕" "예"는 모두 주나라때가 되어서야 형성되었다. 정치적으로, 주나라는 봉건 + 종법의 구조체계를 만들었다. 후세의 정치제도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크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목야지전은 중국고전문명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 전쟁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참전한 주나라군대는 불쌍하리만치 적었다. <상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무왕은 300량의 전차, 300명의 호비(虎)를 이끌고 참전했다. 나중에 맹자는 삼백명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지, 옮겨적을 때 잘못적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삼천 호비라고 적기도 했다. 이렇게 수정한 것은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관례에 따르면, 1량의 전차에는 10명의 전사가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무왕이 투입한 전투의 주력군은 바로 300냥의 전차와 수천명의 전사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에 관해서 쓰고 쓰다가 사마천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최고수준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질병이 있었다: 탐다희공(貪多喜功)하는 것이다. 큰 숫자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목야지전을 쓸 때, 호쾌하게 썼다. "융거 삼백승; 호비 삼천인" 그리고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갑사 사만오천인" 어쨌든 이 사만오천명은 사마천이 먹여살려야 할 군인들도 아니다. 그는 통크게 주무왕에게 대부대를 하나 보내준 셈이다.

 

그러나, 이 사만오천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주부락의 인구를 자세히 고증했는데, 주무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백성은 남녀노소를 다 합쳐서 5-10만가량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어디서 '갑사 사만오천명'을 데려온단 말인가? 당시의 진정한 상황은 이러했을 것이다. 수천명이 수백량의 전차를 둘러싸고 목야야고 부르는 벌판에 서 있었고, 육백년 역사를 지닌 왕조를 무너뜨리고자 하고 있었다. '희발(姬發)'이라는 사람이 큰 소리로 사기를 북돋우고, '강상(姜尙)'이라는 인물이 전차 위에 서서 음험하게 진격을 기획했다.

 

그들의 앞에는 전해지는 바로 극악하기 그지없다는 은주왕(殷紂王)이 있었다.

 

은주왕은 나쁘기 그지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인인 달기도 그와 마찬가지로 나쁘다. 중국역사를 읽어보면, 그들 둘 보다 더 나쁜 부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금수중의 비익조요, 악당중의 쌍절곤이다. 그들이 한 나쁜 짓을 열거하자면, 여러 편의 글로 쓸 수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주왕은 처음부터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가 나쁘게 변해가는 데는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주무왕은 출병하기 전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성토대회를 연다. 그 성토대회에서 주무왕은 은주왕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았고, 그저 모호하게 얘기했다.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은주왕이 여자의 말을 들어, 친척을 중용하지 않고, 제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상서.목서>). 이들 죄상만을 가지고는 폭군의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

 

나중에 작가들이 이들 죄상을 읽으면서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주무왕은 성군의 표본이다. 그렇다면 그의 적수는 폭군의 전형이어야 한다. 그래서, 은주왕의 죄행은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워야 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계속하여 첨가하게 된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가 되어서는 은주왕이 죄행이 이미 충분히 볼만한 것으로 바뀌었다.

 

사마천은 신이나서 적었다: 주왕이 녹대를 만들고, 포락형을 실시하고, 비간의 심장을 파내어 칠교가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한 후궁의 성격이 차가웠는데, 그는 그녀를 죽여버리고, 그녀를 육장으로 만들어 그녀 부친에게 보낸다; 주문왕이 이 일을 듣고 탄식하자, 주왕에게 붙잡혀서 돈을 뜯겼다. 등등등등. 궁형을 받은 바 있는 사마천은 특별히 주왕이 어떻게 '음락(淫樂)'을 즐겼는지를 묘사했다: 은주왕은 큰 못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숲 속에는 고기를 걸어놓았다. 그 후에 남녀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게 했다. 당연히 이런 오락방식은 듣기에도 촌스럽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노신이 얘기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농촌부녀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연 탄식하며 말했다: '황후낭낭은 얼마나 즐겁게 살 것인가. 지금도 아마 낮잠을 자고 있겠지?" 그리고 깨어난 후에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환관. 곶감을 가져와라." 주지육림은 바로 사마천이 생각해낸 곶감이다.

 

고힐강 선생은 <주악칠십사의 발생차제(紂惡七十事的發生次第)>라는 고증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그는 은주왕에게 모두 70가지의 죄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각 왕조때마다 계속하여 추가되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 20개가 추가되고, 서한때 21개가 추가되었으며, 동지때 13개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들 죄상은 갈수록 과장되었다. 사마천은 주왕이 녹대를 만들었다고 적었는데, 유향은 이렇게 보충한다. 녹대는 높이가 1천척(尺)이었다. 진나라의 황보밀은 다시 높이를 1천장(丈)이라고 바꿨다. 상나라 주나라시대의 1장은 개략 2미터이다. 주왕은 음락을 위하여 2킬로미터 높이의 녹대를 기어올라갔다는 말이 된다. 이때 우리는 이미 잔혹한 군주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우수한 등산가만 남기게 되었다.

 

학자들은 말한다. 주왕의 이미지는 역사학의 중요한 특징을 반영한다. 그것은 바로 관념의 성장성과 층적성(層積性)이다. 이 표현은 너무 학술적이다. 쉬운 말로 번역하여말하자면 이렇다: 한 사람이 똥통에 빠지면, 역사학자들은 그의 머리 위에 계속하여 똥오줌을 눈다. 우리는 자주 말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역사는 공정하다"고. 사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역사는 공정하지도 않고, 시간이 무엇을 증명해주지도 않는다. 역사는 사람이 기록하는 것이고,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다. 우리는 이미 은주왕이 도대체 어떤 군주였는지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그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목야에서 주왕은 일패도지한다.

 

사마천은 시원스럽게 주왕에게 칠십만군대를 주어버린다. 그러나, 당시의 인구규모를 고려하면, 주왕이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정에 따르면, 주왕의 군대는 기껏해야 몇 만명이다. 몇천의 주나라군대(여기에 일부 동맹군이 가산됨)과 수만의 상나라군대가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전투는 아주 격렬했다고 한다. 피가 몽둥이에 묻어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몽둥이는 맹자의 우려를 자아낸다. 그는 그렇게 해서는 정치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천하에서 인자무적이다. 어진 사람이 어질지 못한 사람을 토벌하는데, 어찌 피를 몽둥이에 흘릴 수 있겠는가?"

 

여기에 확실히 모순되는 요소가 있다. 먼저 모든 사람들이 이을 악물고 주장한다: 주무왕은 인자하다. 그러나, 뒤집어 보자면, 이 대전투에서 사람이 맍이 죽지않았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얻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주나라군대가 막 공격을 감행할 때, 상나라의 앞쪽 부대가 창을 거꾸로 쥐고 상나라군대의 뒤쪽 부대를 공격하여, 상나라군대 내부에서 서로 죽고 죽인다. 그 결과 '피가 몽둥이에 흘렀다(血流漂杵)' 그러므로, 비록 사병들이 아주 많이 죽었지만, 그것은 주무왕이 죽인 것이 아니다.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기에 이건 기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믿건 안믿건 상관없지만 나는 믿는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은주왕은 도망쳐서 녹대에 올라 스스로 불을 붙여 자살한다. 주무왕이 그의 뒤를 쫓아와서, 불에 탄 시체를 향해서 화살을 3발 쏘고, 그의 머리를 잘라 태백기에 걸어둔다. 이렇게 하여 상왕조는 끝이 난다.

 

상왕조를 멸망시킨 후, 서주(西周)는 계속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의 영토는 섬서에서 산동까지 확장된다. 북경에서 한수까지 확장된다. 이 규모는 동일한 시기의 앗시리아제국과 비교하면 아마도 조금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은 분명하다. 원등비는 <역사는 무슨 장난인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주나라의 면적은 150만평방킬로미터이다. "서방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수퍼대국이었다" 이 말을 지나치다. 주나라는 사람은 적고 땅은 넓었다. 많은 곳이 황무지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사람들도 강역(영토)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150평방킬로미터 운운은 그저 아무렇게나 계산해본 것이다. 그리고 원선생이 든 서방의 사례는 아테네, 스파르타였다. 이 두 도시국가의 상대방은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페르시아제국의 강역, 인구는 주왕조보다 컸다. 그래서 주왕조가 비교적 크다고 하더라도, 서방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은 아니다. 그들은 원선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촌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나, 주왕조는 너무 컸다. 큰 것은 상관이 없는데,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적었다.

 

같은 시기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어와 비교하자면, 서주의 인구밀도는 너무나 낮았다. 이집트와 바빌론의 도시, 농촌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서주의 도시 바깥은 황무지였고, 풀만 자랐다. 야생공원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자주 중국이 사대문명고국이라고 얘기한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문명고국중에서 중국이 가장 늦었다. 인더스강문명은 요절했으므로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집트와 수메르문명은 중국보다 최소한 천년이상이 앞섰다. 이 양대문명과 비교하면, 서주는 제3세계의 후기지수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서주의 농업, 상업, 공업은 모두 중동보다 낙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구조는 앞섰고, 대제국을 형성했다.

 

취약한 물질기초 위에서, 어떻게 이런 대제국을 운영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서주가 해결해야할 핵심문제였다. 그래서 정치문화를 혁신하였는데,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서주가 직면한 이 난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행위방식도 이해할 수 없을 것ㅅ이다.

 

서주의 몸은 컸다. 머리는 작았다. 몸안에 흐르는 피는 아주 적었다. 신경이 전달되는 것은 아주 느렸다. 그러나 그는 살아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봉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농민은 농사를 짓고, 지주는 도지를 받아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구조이다. 제후를 임명하고, 영토를 주는 것이다. 여기서 주제와 관련없는 것을 한 가지 말한다면, 원시사회 -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사회 - 사회주의, 이 오단계론은 중국역사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이론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중국에 노예사회, 봉건사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는 그저 '아시아식 생산방식'이 있다고만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마르크스가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전인류에게는 모두 한 가지 진보방시만 있을 뿐이라고 고집했다. 어찌 동방 서방을 나눌 수 있겠는가. 모두 오단계로 구분하면 된다. 소련에서 전해온 이 말을 듣고, 곽말약 선생은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붓을 놀려서 상주를 노예사회로 구분하고, 진한이후는 봉건사회로 구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사학계 주류는 이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주제로 되돌아와서, 서주는 봉건제를 실시하는데, 국토를 제후에게 나눠주고, 제후는 세습하며, 독립적으로 영지를 통치한다. 그러나 주왕의 종주권은 인정해야 한다. <순자.유효편>의 기록에 따르면, 주무왕와 아들 주성왕 시대에, 모두 71명의 제후를 임명한다. 그중 55명은 주씨성의 친척이다. 16개는 다른 성의 외족이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분봉하여 춘추시기에 이르러서는 고증할 수 있는 전국의 제후가 모두 140여명에 이른다.

 

이것은 주왕이 호경, 낙양(당시에는 成周라 함)을 본점으로 하고, 전국각지에 140개의 프랜차이즈점을 둔 것과 같다. 이들 가맹점은 독립경영을 한다. 다만 본부의 영도지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본점의 기업문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때때로 본점에 보고를 하고, 일정한 이윤을 바쳐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서주는 가맹점이 각지에서 꽃을 피우고, 광대한 시장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들 가맹점은 어떻게 건립되었는가? 일부는 합병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상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상나라의 속국은 간판을 바꾸어 달아, 주왕조의 이 게임규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새로 세워진다. 많은 독자들은 아마도 문명이라는 게임을 해보았을 것이다. 게임에서 유저는 개척자, 무사를 이끌고 황무지로 가서 도시를 만든다 그 후에 천천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로를 만들어 하나의 나라를 이룬다. 서주가 새로운 제후를 분봉한 것은 현실판 문명과 같다. 주왕이 제후를 봉할 때 토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백성들도 함께 준다. 예를 들어, 주나라가 노(魯)에 분봉할 때 ,'은민육종(殷民六宗)'을 준다. '당(唐)'에는 '회성구종(懷姓九宗)'을 준다. 이들은 무장식민인원이다. 신제후는 그들을 데리고 봉지로 가서 도시를 만든다. 도시는 그들의 무장근거지이다. 식민자는 성안에 거주하며, '국인(國人)'으로 불리고, 토착민은 '야인(野人)'으로 불린다. (국인과 야인의 의미에 대하여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여기서 말한 것은 주류의 견해이다). 인구가 어느 정도 증가하면,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나누어진다.

 

이것이 서주가 확장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 나는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물을 것이다. 왜 서주는 중앙집권제를 택하지 않았느냐고. 정부관리를 보내여 직영점을 운영하지 않았느냐고. 반대로 이들 세습제후를 분봉함으로써 오히려 패가망신하게 되지 않았느냐고.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기 전에 먼저 다른 주제를 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 분점은 본부에 얼마의 이윤을 바쳐야 했을까?

 

답안은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귀한 것은 양식이었다. 이집트에는 나일강이 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유크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있다. 정부는 이들 강물을 이용하여 각지에 적지 않은 양식을 운반할 수 있었다. 서주에도 황하는 있다. 그러나 황하는 운수에 적합하지 않았다. 서주의 수도는 상류에 있고, 분점은 모두 하류에 있다. 그래서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또한 서주는 제3세계국가로 육로교통이 불편했다. 그래서 분점에 남는 양식이 있더라도 본점으로 바칠 방법이 없었다.

 

돈으로 바치면 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서주는 상품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다. 활발한 시장이 없었다. 10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은을 화폐로 삼았다. 서주에도 대량의 조개껍질(貝幣)이 사용되었다. 생각해보라 어떤 발달된 상업사회에서 조개껍질을 사용한단 말인가? 자급자족의 경제시대에 분점으로 하여금 대량의 화폐를 바치게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윤이 그렇게 적었다면, 서주이 본점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방대한 회사에서 직영점을 관리할 요인이 있었을까(기술적으로 가능할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건립한 후에 수지균형은 맞출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계산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주의 해결방법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간단한 관리, 가장 적은 이윤, 노리는 것은 많이 뿌려서 각각에서 조금씩 거두는 것이다(廣種薄收). 서주의 본점이 가맹점에 요구하는 가장 큰 공헌은 군사적 지원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주왕은 근처의 제후에게 병력을 출동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할 권한이 있다. 경제적으로, 주왕은 왕실의 영지에 의존하여 살아갔다. 가맹점이 바치는 이윤에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서주는 대제국을 건립하고 싶었지만, 물질기초를 바꿀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봉건제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둔다. 제국이 신속히 팽창하고, 문명이 이전의 야만지역까지 전파된다. 수백만명이 동일한 문화모델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정치제도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다만, 봉건제의 성공은 그 자체로 쇠퇴의 씨를 안고 있었다. 제국은 심층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