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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주(周) 왕조는 돌궐혈통인가?

by 중은우시 2011. 4. 21.

 

: 해동청(海東靑)

 

 

토화라문자

 

주나라는 약800년간 존속하였으며, 중국역사상 가장 긴 왕조이다.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모두 30 37왕이 있었다.

 

주부락은 원래 위하(渭河)유역에서 생활했으며, 시조인 희기(姬棄)는 바로 농사의 신(農神)으로 칭해지는 후직(后稷)이다. 주부락은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이 수령으로 있을 때 흥성한다. 그의 통치로 주부락은 세력이 강성해진다. 주의 발전은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희창을 유리(, 지금의 하남성 안양) 7년간 연금시킨다. 주부락 사람들은 보물과 미녀를 바쳐서 희창이 풀려나게 한다. 그후 주부락은 몰래 생산력을 키우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동안 더 많은 제후들이 주부락에 의탁한다. 주문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희발(姬發)이 즉위한다. 그가 바로 주무왕(周武王)이다. 희발은 여상(呂尙, 강태공)을 스승으로 삼아 상나라를 멸망시킬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기원저1046년경, 주무왕은 맹진(盟津)에서 8백의 제후를 모아서 주왕을 토벌하기로맹세하고, 병력을 일으켜 동관을 나선다. 그리고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켜 다음 해 목야(牧野)에서 상나라군대를 대파하고, 상나라 주왕을 죽인다. 이렇게 하여 중국역사상 가장 긴 주나라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주왕조는 중국에서 상세한 역사기원과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첫번째 왕조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중국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숭고하고도 특수하다. 중국의 많은 사상문화의 기원은 직접적으로 주나라에서 나온다. 그러나, 후세인들의 주나라 사람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아주 부족하다. 그저 주나라 사람들을 전설상의 황제(黃帝)와 연결시킬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2천여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전통관념상으로 주()나라 사람들은 화하족(華夏族)의 정종(正宗)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과 역사연구에 따르면, 주나라 사람의 족원(族源)에 의문이 든다.

 

1.     주인(周人)의 조상(彫像), 복식(服飾)의 수수께끼

 

현재 발굴된 주나라때의 묘중에서, 특히 초기의 서주시대 묘는 자주 백인종의 특징을 지닌 두상(頭像)과 벽화가 발견된다. 이는 상나라묘의 전형적인 황인종 특징을 지닌 청동기인면상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다.

 

1976, 감숙성 영대 백초파의 서주묘에서 청동극 위의 인두상이 발견되었는데, 명백히 백인종의 특색을 지녔다.

 

1975년에 발굴된 북경 창평 백부의 서주초기묘에서 출토된 청동인면상은 인도유럽인의 특징을 나타낸다.

 

1980년 가을 섬서성 부풍의 서주궁전유적지에서 두 개의 서주시대 방조(蚌雕) 인면상은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高鼻深目), 머리에 단단하고 높은 모자를 쓰고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샘족의 인면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복식이건 외모건 모두 현재의 중국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중 하나의 머리위에는 (‘)를 새기고 있다. 이 부호는 기원전 5500년전의 서아시아 Khalaf문화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산서에서 출토된 주나라때 남녀의 인형도범(人形陶范)을 보면 구령포복(矩領袍服)을 입고, 무릎까지 오도록 꽃무늬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평정모(平頂帽)를 쓰고 있으며, 허리에는 띠를 매었는데, 끝은 두 개의 동그란 구형으로 하여 띠를 묶고 있다. 하남에서 발견된 것도 대동소이한 복장이다. 이런 복식의 특징은 현재 중앙아시아 일부 민족의 복식과 아주 유사하고, 화하족의 전통복장과는 차이가 크다.

 

사실상, 중국의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시기에 출토된 민족복장은 개수가 많지 않다. 특히 북방지역은 더 그렇다. 나중의 한복(漢服)에 가장 접근한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남방인 초()나라 묘에서 출토되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이 어떤 의복을 입었고, 어떤 모지를 썼으며, 어떻게 생겼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2.     사마(駟馬) 전차의 출현

 

고대전쟁에서, 말은 승리를 이끄는 관건이다. 등자가 나타나기 전에, 전차는 기병의 주요한 형식이었고, 전쟁의 주도무기였다.

 

전차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가장 먼저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하여 학술계에서는 이미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전차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서아시아 메소포타미아지역이며, 기원전3천년경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수메르인들이 마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족과는 달리, 상인들은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주로 타는 것이 아니라 마차를 끌기 위한 것이었다.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마차는 모두 청동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차체에도 동물표기를 그려넣었다. 그중 하나의 말고삐장식은 아주 정교하다. 모조리 바다조개와 고품질의 옥기로 장식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식에 사용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상나라의 군대에서 말은 아마로 외국에서 도입한 것일 것이다. 갑골문에서 말의 수입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상나라 후기에 무정(武丁)의 처인 부호(婦好)는 중요한 여장수이다. 일찍이 병력을 이끌고 귀방(鬼方)을 공격한 바 있다. 갑골문에 여러 번 그녀의 이름이 나타난다. 1976, 그녀의 묘가 발견되는데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도굴된 바 없었다. 배장된 병기가 아주 많았다. 여기에는 병권을 상징하는 대동월(大銅鉞)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말과 관련된 군사도구는 출토되지 않았다. 만일 상나라의 군대에 기병 혹은 말이 끄는 전차가 있었다면, 이 같은 고위장수의 묘에 마차, 말안장등이 나타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런데도 묘안에 없었던 것을 보면, 이늠 말이 상나라군대내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중국최초의 마차는 상나라말기 안양 은허에서 발굴된 유적지에서 볼 수 있다. 본토기원의 견해를 가진 학자는 고대문헌중 상나라말기 이전에 말이 끄는 전차에 관한 기록을 적지 않게 찾아냈다. 심지어 중국에서 말을 기르고, 말을 순화시키고, 말을 사용하는 역사가 용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동물고고학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리두, 이리강시대 심지어 은허전기유적지에서도 말뼈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중원지역에서 전기은허시대까지는 집말(家馬)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서북지역의 제가문화와 사패문화에서는 순화된 말이 발견된다. 그 기원은 마아도 유라시아초원과 교류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은허후기에 비로소 가마와 말이 끄는 전차가 대량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전차의 구조도 완벽하고 공법도 복잡하다. 현재까지 아직도 본토기원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나라의 말이 끄는 전차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된 것일 것이다. 그 경로는 바로 고대비단길을 따라서 왔을 것이며, 종점은 바로 중국서북에 위치한 주부락일 것이다.

 

상나라사람들과는 달리, 주나라사람들의 습관은 군사와 경제생활에서 말을 쓰는 것이다.

 

시경의 <대아.>에는 주나라 초기역사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공단보(古公亶父) 내조주마(來朝走馬), 솔서수호(率西水滸), 지어기하(至於歧下)”. 즉 초기의 주나라사람은 아마도 유목민족이었을 것이고, 말을 타고 이동하여 서기에 정착한 것이다.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주나라군대의 주력도 말이 끄는 전차였다. <주례>에 병제를 언급하는 부분의 제목은 <하관사마(夏官司馬)>이나 주나라제도에서 1대의 병거(兵車)에는 72명의 보병과 3명의 갑사(甲士)를 배치시킨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마차300승이 있었다. “융거 삼백승, 호비 삼천인, 갑사 사만오천인을 이끌고 동으로 주왕을 토벌했다”(사기.주본기)

 

주나라왕조는 험윤(, 나중의 흉노)과의 전쟁과정에서, 사마전차를 사용했다. 그 위력은 상나라와의 전투에서 사용했던 이마전차를 훨씬 능가했다.

 

주나라사람들은 말을 좋아했다. 말에 대한 칭호도 아주 많았다. 단어는 보기 드물 정도로 풍부했다. 예를 들어, ()는 암말이고, ()는 망아지이고, ()은 생식능력을 거세한 말이며, ()는 황색말이고, ()는 갈기와 꼬리가 검은 색인 붉은 말이고, ()은 옅은 검은색에 흰색띠가 있는 말이고, ()는 대추색의 말이고, ()는 검은 말이며, ()는 주둥이가 검은 황색말이며, ()는 청흑색의 말이고, ()는 검은색에 흰색말굽을 가진 말이며, ()은 청색백색 사이의 난색(蘭色)에 유사한 말이고, ()은 순백색의 말이며, ()는 빨리 달리지 못하는 형편없는 말을 가리킨다.

 

이들 말에 관한 글자는 대부분 주나라에서 기원한다. 만일 주나라인들이 유목민족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다면, 절대로 말을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주목왕에게는 8필의 아끼는 말이 있었는데, ‘천자팔준(天子八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각각 적기(赤驥), 도려(盜驪), 백의(白義), 유륜(逾輪), 산자(山子), 거황(渠黃), 화류(), 녹이(綠耳)이다. 기괴한 것은, 이들 말의 명칭은 거의 모두 한어(漢語)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현대학자들은 이들이 실제는 음역(音譯)한 이름일 것으로 본다. 그중 도려는 고대돌궐어의 torug의 음역이다. 그 뜻은 밤색말이라는 뜻이다.

 

주나라사람들은 말이 끄는 전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사적으로 우세를 점했다. 그리하여 문화도 그들보다 뛰어나고, 인구도 그들보다 방대하기 그지없는 상나라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주나라인들이 이런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일부 유목민족과 밀접한 문화적인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     주인의 문자, 언어의 수수께끼

주목왕의 애마들 명칭에서 보듯이, 주나라인들의 언어에는 돌궐말이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뿐아니라, 주무왕이 사용한 병기는 경려(輕呂)’인데,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흉노의 경로도(徑路刀)’와 오늘날 터키어의 Kingrak이다. 이는 지금 고증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돌궐단어이다.

 

주나라사람들의 언어는 도대체 어떠했을까?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보면, 중국의 상형문자는 황하 중하류의 대문구문화 및 나중의 용산문화에서 기원한다. 같은 시기 서북지구의 일부 앙소문화의 유형, 예를 들어 반파문화, 마가요문화, 제가문화등에서는 상형부호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자모화 추세의 부호가 나타난다.

 

다만, 상나라사람들의 갑골문과 금문은 주나라사람들의 문자와 동일한 체계에 속한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해볼 수 있다. 주나라사람들은 상나라사람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자를 차용했다. 문명이 상나라사람보다 낮은 부락에서, 주나라사람들은 열심히 상나라의 문명을 배웠다. 특히 그들이 상나라를 정복한 후, 전면적으로 상나라문화를 받아들였다.

 

이 논점은 근거가 있는가?

 

상나라사람과 주나라사람의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미 발굴된 은상시대의 갑골문에서 우리는 비록 대부분의 글자를 식별할 수 있지만, 그중 대부분의 뜻은 해독할 수가 없다. 이는 비교하자면 중국인이 일본글자를 보는 것과 같다. 일부 글자의 의미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문구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이견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일한 문구를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상나라사람의 어법습관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나라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대문언문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규율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서>>는 중국최초의 책이다. 왜 알아보기 힘든가? 문언문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이 책의 많은 내용은 주나라사람들이 상나라사람들의 것을 번역해왔기 때문이다. 일부 원시적인 상나라언어의 성분을 지니고 있어서 특히 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상 주나라사람의 언어는 상나라사람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모두 우리의 현대 한어와 차이가 크다. 한어는 일종이 고립어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하다. 어법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다. 영어보다 단순하다. 그리고 한어와 언어적으로 가장 가까운 티벳어는 어법이 아주 복잡하다. 알타이어의 일부 어법과 유사하다.

 

영어와 한어도 비슷한 상황이다. 게르만어족에서, 영어의 어법은 가장 단순하다. 그와 친척관계에 있는 독일어는 아주 복잡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영국은 역사적으로 민족융합이 이루어져 라틴어를 하는 노르만인이 게르만어를 하는 앵글로 색슨족을 정복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하여, 두 가지 아주 복잡한 언어가 최종적으로 가장 간단한 현대언어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한어에도 이런 결과가 있었다. 복잡한 주나라언어가 복잡한 상나라언어를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언어 한어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주나라사람의 원시언어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돌궐어와 약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잊지 말라. 기원전1000년경, 흉노는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 이미 거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주나라사람의 언어가 순수한 돌궐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아마도 혼합언어였을 것이다. 이는 후술하기로 한다.

 

4.     주인의 묘장풍속, 도기, 청동기의 수수께끼

 

주나라사람들은 서북에서 발원했고, 중국의 앙소문화는 바로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이다. 현대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앙소문화는 농후한 중앙아시아 고돌궐문화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돌궐문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도기의 위에 물고기무늬 혹은 인신어문(人身魚紋)을 그린다;

(2)   말을 죽여 하늘에 제사지낸다;

(3)   채문도기(彩文陶器)

 

앙소문화는 이것과 완전히 부합한다. 그래서 그 근원은 아마도 중앙아시아일대일 것이며, 사실도 비단길에 연해있음이 증명된다. 한 신석기문화대는 서아시아에서 중국의 서북지역까지 연결된다. 그 문화특징은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

 

앙소문화의 안판(案板)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형인상(陶形人像)은 중국현지기원의 체질과 문화특질과 다른 것을 보여준다 길고 큰 코, 구렛나룻과 높은 모자. 앙소문화의 다른 유적지에도 유사한 도인이 발견된다. 황하 중상류지구이 여러 유적지에서는 모두 도인 혹은 인형부조장식의 도기가 발견된다. 그중 3건은 안판도인과 가장 비슷하다. 안판의 남쪽 10킬로미터의 섬서성 부풍 강서촌 유적지에서 발견된 앙소도분에는 사람얼굴이 부조되어 있다. 길고 구부러진 메부리코, 얇은 입술, 좁은 얼굴로, 시대는 앙소중기 묘저구 유형이다. 섬서성 안강 유가하의 유적지에서 도인두면구가 발견되었는데, 높이 10센티미터이다. 아주 사실적인데, 코가 길고 크며, 눈이 깊고, 얼굴이 좁다. 이 두 건의 인면은 모두 코카서스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제가문화”(기원전3100-기원전1900)의 황낭낭대유적지(감숙성 무위)에서 나타난 한 여자 혹은 두 여자가 무릎을 굽히고 위를 바라보며 다리를 뻗는 매장습속은 어떤 학자들이 유라시아초원에서 널리 유행한 suttee 혹은 sati풍속으로 본다.

 

서북지구의 신석기문화에서 출토된 도기, 병기, 청동기등 유형은 명확히 신강, 중앙아시아일대의 신석기문화와 완전히 일치한다. 중앙아시아유목문화의 일부 특징 예를 들어 사람을 죽여서 순장한다든지, 화장하는 것등이 이들 서북 신석기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인들은 고대 강()족의 묘장에서 대량의 유골을 연구한 결과, 그들이 얼굴이 좁고, 이마가 높으며, 눈이 깊고, 체형이 크고 높은 백인종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채취된 DNA도 이 점을 증명했다. 소수의 몽골리아 특징을 지닌 유골은 그들의 신분이 노예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자주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도 침략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던 것일 것이다. 출토문물로 보면, 도륜을 사용하여 제작한 첨저수문도기는 바로 중앙아시아 고대 토화라(吐火羅)인들의 특유한 원시공법중 하나이다. 명확한 키르무치(Keermuqi, 克爾木齊)문화의 흔적이다.

 

주나라사람들은 서북지구의 신석기문화의 계승자이고, 그들의 묘장문화에서도 이들 특징이 나타난다.

 

위에서 일찍이 말이 끄는 전차는 아마도 주나라사람들이 상나라사람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근원은 아마도 서아시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원 유목문화의 3요소중 나머지 두 가지인, 청동병기, 동문무니 청동기도 아마 주나라사람들이 상나라사람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이제(李濟) <은허동기5종 및 그 상관관계의 문제>에서 은허에서 시촉, , , 도삭, 부근의 5종 동기의 형태를 연구하여, 그중 ()’만이 중국본토에서 발생하여 발전한 것이고, 나머지 무기는 유럽에서 독립적인 발전역사가 있는 병기라고 밝혔다. , 중국의 무기발전사는 이전의 무기는 단지 과의 역사이다. 시모도부(矢矛刀斧)는 모두 유럽에서만 발전역사가 있는 병기이다.

 

예를 들어, 은허에는 대자유척(帶刺有脊)의 화살촉은 척(), (), () 3자가 유럽에서는 독립된 진화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은허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3자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은허에서 출토된 모()에는 통()이 있고, 통의 곁에는 두 고리()가 있다. 이는 브리튼 형식과 일치한다. 유형상에서 유럽에서 가장 보통의 일종 병기이다. 또한, 유럽 청동기시대 말기에 성숙된 후의 기물이다.

 

또한 은허의 공두근(空頭斤, 도끼)도 유럽청동기말기의 형식이다. 유럽 및 소아시아의 청동기는 기원전 3천년이전에 출현한다. 은허시대(기원전12세기-기원전14세기)보다 훨씬 이르다. 시베리아에서 출토된 동기는 모두 은허와 동일유사한 양식이다.

 

연구자들은 은허의 후가장제왕능요 1호대묘의 관에서는 비유라는 괴수도안이 발견되었고, 또 다른 목조잔편에서는 한쌍의 호랑이 도형이 발견되었는데, 고증에 따르면 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다.

 

이들 유럽과 서아시아문화특징을 지닌 청동기와 도안이 어떻게 상나라사람들의 묘에 들어왔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 기괴한 것은 은허에서 대량의 순장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갱내에는 대량의 시골이 매장되어 있어, 노예순장으로 쓰인 것같다. 그러나, 이제는 <은상인의 체질인류학에 관한 평술>에서 양희매선생의 은허인두골에 대한 측량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 두골은 고전적인 몰골인종으로 브류이트족과 비슷하다. 30.

두번째 두골은 태평양류 흑인종이며 파푸아인과 유사하다. 34

세번째 두골은 코카서스인종으로 영국인과 비슷하다. 2

네번째 두골은 에스키모인과 비슷하다 50(, 몽골인종의 북극유형)

다섯째 두골은 정형화되지 않은 것으로 38구가 있다.

 

이제는 이어서 이 측량결과의 의의를 이렇게 분석한다. 그는 그중 둘째, 셋째의 인골이 상나라의 적이라고 본다. 상나라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포로로 잡힌 것으로 본다.

 

코카서스인종과 유사한 두개골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제 선생은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아마도 주나라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서 남은 것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상나라와 주나라가 일찌감치 왕래가 있었고, 어떤 때는 전쟁도 벌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나라사람의 묘장에서 일부 중앙아시아특색이 나타나는 수수께끼는 주나라인들을 단서로 하면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주인의 전설, 풍속, 문화 및 음식의 수수께끼

 

전설에 따르면, 3000여년전에, 알타이산의 남쪽언덕에 한 신비한 부락이 살았다. 그들은 키가 크고, 용감하며 전투를 잘했따. 모든 사람이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그리스의 시인인 아리스테아스가 중앙아시아를 여행한다. 그의 여행견문을 적은 장시 <독목인>과 중국의 상고기서 <산해경-해내북경>에는 모두 일목국일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문헌검색을 깊이있게 하면서 우리는 돌궐어를 하는 민족을 발견한다. 전체 알타이어계 민족중에는 모두 눈하나가진 거인의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알타이산지역은 세계에서 독목인신화가 가장 많고, 가장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그중 고대돌궐 여러부족은 모두 파사트가 독목거인을 물리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고대돌궐문헌외에 현재도 위구르족, 카자흐스탄족, 카르카즈족, 우즈베키스탄족, 하카스족(Khakass), 및 쇼르(Shor), 투바인은 모두 독목인전설을 가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지금까지도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독목인의 석상이 있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점은, 그 형태가 중국 사천 삼성퇴의 독목청동인상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두 지방간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주나라사람들도 독목인 전설이 있었다. 저명한 학자인 양헌익은 <역여우습>에서 이렇게 고증했다: “()자의 고문은 편방이 없고 눈하나를 가진 모양이다. 고대 셈족이 말하는 독목민족이다.”

 

이외에 현대 중국인들이 자주 명절에 축복하거나 축하할 때 용마정신을 드높이자고 말하는데, ‘용마정신은 이런 의미를 포함한다: 건강하게 달리는 말의 정신을 드높인다. 여기서 은 실제로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 원래 또 다른 칭호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다.

 

고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말이 팔척이상이면 용이다. 육척이상이면 말이다.” 그래서 용마는 최초에 큰 말을 가리켰다. 용은 바로 큰 말인 것이다.

 

<시경.대아> <황의>시시의 기록이 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주나라사람들의 활동이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렇게 키가 2미터에 이르는 큰 말은 서역에서 왔다. 8척이상의 중앙아시아의 말을 제사지내는 종교활동은 호인(胡人)의 용신숭배이다. 주나라사람의 활동은 호속(胡俗)이다.

 

그리고, 상나라 주나라 청동기의 쌍마(雙馬) 족휘(族徽)는 인도유럽계의 아리안족이 공유하고 있는 신의 하나이다. 쌍마신우상은 문화적으로 일맥상통한다. 이런 특이한 문화의 유사성은 중앙아시아를 통한 문화전파의 결과라 아니볼 수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멸망시킬 때 수덕(水德)을 숭배했다는 것을, 이는 주나라사람들이 불()을 숭배하고 붉은 색을 숭상하고, 화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습속은 인도유럽어계 민족의 최초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하다. 조로아스터교는 최초에 이란에서 유래하며, 나중에 전체 유라시아초원에 전파된다.

 

음식으로 보면, 중국북방인들은 면을 좋아하고, 남방인은 쌀을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북방인들이 면을 먹은 시기는 쌀을 먹은 시기보다 늦다. 상나라사람의 주식은 쌀이었다. 북방인들이 습관을 바꾸고, 대량으로 면을 먹기 시작한 것은 주나라 진나라때부터이다.

 

신석기문화의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기본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돌을 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드물다. 가장 먼저 보리를 심고 먹은 것은 주나라사람들이다.

 

면을 먹는데 주요한 원료는 보리이다. 발원지는 서아시아이고,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다. 그 경로는 서북에서 동쪽으로 퍼진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주나라사람의 조상인 후직은 후세에 농신으로 추앙받는데, 바로 그가 사람들에게 보리심는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나라사람들이 확실히 중앙아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6.     주인의 정치제도 및 종교의 독특성

 

주나라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큰 특징은 분봉(分封)’이다.

 

분봉제도는 주나라때 주나라 왕실이 영토를 제후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제도이다. ‘분봉제하에서 국가토지는 완전히 주왕실 소유는 아니고, 각각 봉지를 나눠받은 제후들 소유가 된다. 그들은 토지의 모든 자원과 수익을 보유하고, 주왕실에는 일정한 공납을 바치면 모든 의무를 다 하는 것이 된다. , 중세 유럽의 여러 왕국과 로마교황청의 관계와 유사한 셈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연방제의 기초이다. 주나라 왕은 공주(共主)의 성격을 갖는다. 제후의 토지는 이론적으로 그가 죽은 후에 주왕실이 회수하여 재분배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세습되었다.

 

이런 정치제도는 사실 서방과 아주 유사하다. 로마제국의 노예분봉제와 프랑크왕국의 봉건영주분봉제도 모두 이와 관련있다. 이 제도의 특징은 군주의 권력이 분산되고, 귀족세력이 강대해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쉽게 사분오열되지만, 상대적으로는 민주적이고,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게 된다.

 

어떤 학자는 이런 정치제도의 원형은 바로 유라시아초원의 유목민족의 영호분봉제(領戶分封制)에서 찾는다.

 

주나라이후, 중국의 정치제도는 대일통의 중앙집권제였다. 군주권력이 극히 강대하고, 다시는 이처럼 분산된 분봉제도와 연방제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면적이 유럽과 비슷한 중국에서 2천여년동안 계속하여 통일정권이 나타났으니 이것도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제도이외에, 종교적으로도 주나라사람들은 독특했다.

 

주나라사람들은 상나라사람들처럼 정교합일이 아니었다. 상나라사람들이 귀신을 숭상한 것과 비교하여 주나라사람들은 조상과 하늘을 숭상했다. 주나라사람들의 종교는 체계적인 경전, 교의 및 교단이 없으며, 조직화되어있지도 않다. 천신, 지신숭배는 자연숭배에서 유래하고, 조상숭배는 토템숭배와 영웅숭배에서 유래한다. 양자는 모두 혈연광계와 연계된 종법제도와 결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하늘은 아주 큰 포용성을 가지고 있고, 배타성이 적다. 다른 종교의 전래나 신종교의 탄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사람들의 종교는 강렬한 세속성을 지녔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현실세계의 문제였다. 사후의 피안세계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외국학자들은 주나라사람들에게 종교가 없다고 말한다. 그저 원시숭배만 있었다는 것이다. 서방처럼 발달한 종교사상은 없었을 뿐아니라, 앞선 상나라사람들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사람들의 이런 유치한 종교도 중앙아시아초원의 일부 유목민족의 종교상황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돌궐, 몽골과 같은 민족은 모두 자신의 완전한 종교사상이 없다. 그저, 소박한 장생천(長生天)’숭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쉽게 다른 종교를 받아들인다. 돌궐은 최종적으로 이슬람교에 귀의했고, 몽골은 티벳불교에 귀의한다.

 

돌궐과 몽골은 그래도 귀신과 통할 수 있는 샤먼은 있었다. 주나라사람들은 샤먼조차 믿지 않았다. 상나라사람들이 열중한 귀신신앙을 ()’로 폄하했다.

 

그 결과 후세의 중국인들은 종교신앙이 없는 민족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인들이 도교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할 점은 도교는 주나라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나라에서 발원했고, 오히려 상나라와 관련이 있다.

 

주나라사람들의 이처럼 세속화된 종교사상은 유라시아초원의 유목부락에서 기원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샤먼숭배는 돌궐, 몽골과 같은 민족의 특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쪽의 퉁구스부락에서 기원했고, 나중에야 비로소 전체 알타이계민족에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바로 주나라사람들이 귀신과 내세에 대한 태도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주나라사람들의 분묘는 대부분 봉토(封土)가 없다. 그냥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다시 평탄하게 만들면 끝인 것이다. 땅에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았다. 진나라사람이나 초나라사람들의 무덤처럼 융중하지도 않았고, 명시적인 봉토가 있지도 않았다. 이런 구별은 진시황의 능은 여산에 가면 멀리서도 보이지만, 징기스칸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7.     주인의 혈통추측

 

이렇게 많이 분석했으니, 우리는 주나라사람들과 중앙아시아의 일부민족 특히 돌궐인과 어떤 문화적인 연계가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혈통인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다. 필자는 주나라사람들은 사실 혼혈민족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주체는 남하한 돌궐화한 토화라인과 서북지구의 강족의 융합체일 것이다.

 

토화라인은 처음에 신강지역에서 생활한 유목민족이다. 원시 인도유럽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일족이고, 현재는 이미 멸족했다. 유럽학자들은 신강에서 출토된 토화라어문헌을 연구하여, 그들의 언어가 인도유럽어계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까운 인도-이란어족의 아리아인과는 언어가 아주 다르다. 토화라어와 멀리 있는 게르만어족의 각종언어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라틴어, 슬라브어, 그리스어, 인도-이란어와는 거리가 비교적 멀다. 그래서 토화라인은 아마도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인 부락중 하나일 것이다. 일찍이 인도유럽어계의 동,서어계가 갈라지기 전에 그들은 원시인도유럽인부락에서 갈라져 나왔던 것이다.

 

참신한 주장을 펼치는 언어학자는 한어와 인도유럽어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토화라의 옛 명칭은 대하(大夏)이다. 주나라사람들은 자신들이 하인(夏人)의 후예라고 계속하여 주장해왔다. 그러면서, 대하, 하인으로 자처했다.

 

주나라사람들은 시경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혁혁한 나의 조상은 곤륜에서 왔다.” 여기의 곤륜(崑崙)이라는 단어는 토화라어의 Klyom에서 유래한 것이다.

 

20세기초, 신강 타림분지에서 누란 미이라 및 일부 코카서스인종의 건시(乾屍)가 발견된다. 이는 멸족한 토화라인이 남긴 것일 것이다.

 

누란의 간시를 보면 명백히 코가 높고 눈구덩이가 깊다. 전형적인 코카서스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복원도를 보면 명백히 유럽인의 특징을 나타낸다.

 

남하한 주나라부락은 토화라인의 한 갈래이고, 흉노(당시는 귀방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험윤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는 한 족속이다. 모두 흉노와 같다)의 압박을 받아, 비단길을 따라, 감숙과 섬북일대로 이주해온 것이다. 나중에 다시 섬서 주원(周原)으로 이주해 정착한다. 당시 흉노의 주요성분은 돌궐이므로, 돌궐인과의 장기적인 접촉과정에서 토화라인은 점점 돌궐화한다. 이리하여 많은 돌궐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인다. 심지어 일부 단어까지.

 

그들이 남하하여 섬서의 주원에 도착한 후, 사방이 모두 인원수가 많은 강()족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진적인 청동기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가지고, 완강하게 생존해나간다. 동시에 계속적인 무력정복을 통하여, 강족의 혈통을 대량 흡수한다. 섬서 부풍에서 발견되는 서주의 도상(陶像)중에는 남성은 코카서스특징을 나타내지만, 여성은 전형적인 몽골특색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한족과 티벳족의 단어에는 많은 동질성이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일 것이다.

 

주나라사람들은 동쪽의 상나라사람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점차 청동병기의 제작과 말이 끄는 전차의 기술을 그들에게 전해준다.

 

주나라사람들이 황하유역에 계속 유입되면서, 그들은 점차 상나라민족의 강대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상나라의 문화와 언어문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상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강대한 주나라를 건립하는 것이다.

 

신강의 고향에 남겨진 토화라인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그들은 먼저 돌궐인에 정복당하고, 나중에 몽골고원에서 달려온 회흘인에게 정복당한다. 그러면서 점차로 자신들의 언어, 문화 심지어 혈통마저 잃게 되며, 마지막에는 회흘인과 함께 현재의 신강 위구르, 우즈베키스탄족등 민족으로 융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