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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무덤의 자체모순

by 중은우시 2010. 9. 27.

: 장국안(張國安)

 

 

 

 

조조무덤은 중국고고학의 유사이래 가장 논쟁거리이다. 파급효과는 학술계를 이미 벗어나 처음부터 사회각계층에까지 미치고, 전중국을 석권하고 있다.

 

실제로 논쟁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조무덤설’을 견지하는 안양 서고혈고고팀에서 스스로의 뒤죽박죽인 행위와 모순에 가득찬 논리등을 명쾌하게 분석해보면 그들의 고고학적 ‘관성사유’에 빠진 동료들은 자연히 이성을 되찾게 것이다.

 

처음부터 ‘조조무덤설’의 주장자들은 ‘인장이 없는 것’은 문헌에 나오는 ‘새불존신(璽不存身)’의 기록과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경주 선생이 총고문을 맡은 <<조조묘진상>> 반위빈 선생이 집필한 <<하남안양시서고혈조조고릉>>보고서는 모두 동인(銅印) 사진을 싣고 있다. 모양이 글자인지 도형인지는 연구해봐야 하겠지만, 무덤안에서 도장이 나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모두 알다시피 인새(印璽) 묘주인을 확인하는 주요 증거이다. 도장은 형태로 봐서 등급이 낮아. 조조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다. 조조무덤설의 반증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도장문제를 계속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하남고고팀의 과학적 양심에는 감사해야겠다. 그들은 사실을 공개했으니. 많은 저명한 금석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도장의 문자는 고문이고 ‘환()’인지 ‘제()’인지 아니면 다른 글자인지는 더욱 연구해봐야 것이라고 한다. 이는 조위후기 서진시기에 사마씨가 정권을 잡았을 , 사마소의 장인인 왕숙이 주장하여 고문경학이 크게 성행했던 것과 맞아떨어진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동전: <<중국문물보>> 2010 1 8 5 “문물고고주간”에는 <<안양서고혈조조고릉발굴에서 중요성과를 획득하였다>> 글에서 출토된 전폐(錢幣) 4매로 모두 동한의 오수전(五銖錢)이라고 하였다. 1 13일이후 얼마전에는 “이 무덤안에서 출토한 동전은 3매이고, 그것은 모두 동한의 오수전이다”라고 바뀐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떤 사람은 중의 하나가 조조가 죽은 후에 나온 조위오수(曹魏五殊)이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한다. 지금 다시 2010 8 <<고고>> 등재된 <<하남안양시서고혈조조고릉>> 보고서를 보면, ‘결어’에서 “동한오수전’을 무덤의 연대를 단정하는 증거중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숫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평면도의 설명글자를 자세히 보면, 발견된 전폐의 총수가 여전히 4매임을 있다(38 동오수, 묘도전토; 67 전북실; 51.83, 동전 후실).

 

“위무왕” 석비는 도대체 개인가? 반위빈 선생의 “무왕가용”과 “위무왕가용”시리즈는 스스로 소문을 들었고 실물은 보지 못했다니, 필자도 언급하지 않겠다. 본문은 그저 확실한 것만 가지고 계산해보겠다. 지방공권력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대도” 2, “대극” 1개이다; 2008 9, 안양시 안풍향 파출소 부소장 장연평이 서고혈묘에서 압수한 것에 “위무왕”이라는 석비가 쓰여져 있었다(<<삼련생활주간>>2010 02), 최소한 1개가 있는 것이다; 반위빈 선생이 일을 서술할 , 위에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2009 12 28 <<성도상보>> 보라); 2009 3, 공덕명 소장이 암시장에서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을 하나 구매하여 시장, 서기가 보았다(<<남방주말>> 2010 1 6자를 보라); 2009 11 8, 반위빈은 황급히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의 중대한 발견을 상부에 보고하고, 하남성문물국은 즉시 안양시정부, 공안부서에 통보하여, 전문사건팀을 두어, 도굴사건에 대한 수사업무에 박차를 가하도록 요구한다. 공안부서는 도굴범의 수중에서 다시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비 1, “위무왕상소용위항석”이라는 석침 1개를 회수한다.(신화망 2010 01 06 16:08 <<고고대 팀장의 조조묘에서 위무왕석비를 발굴한 상세한 내부사정을 친히 진술하다>>) 현재 어찌하여 대도 1개와 대극 1개가 줄어들었는가?

 

상술한 예에서 숫자는 모두 한자리수이다. 정확히 계산하는게 어려울 것도 없다. 먼저 일부터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는가?

 

씻은 적이 있는 석비에 천년황토가 묻어 있는가? 가장 유명한, 황토를 묻힌 석비는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스타 문화재일 것이다. 도대체 언제 발굴했는가?  <<상금산공작일지>>: 2009 11 8 흙을 고르는데 잔결(殘缺) 석비를 발견했다…위에는 동그란 구멍이 하나 있고, 위에는 구리줄이 있다”(대하보, 광주일보). <<고고대 팀장의 조조묘에서 위무왕석비를 발굴한 상세한 내부사정을 친히 진술하다>> 따르면, 11 8 오후,  5 퇴근시간에서 20분정도 남은 발견했다(신화망 2010 01 06 16:08), 다만 반위빈 선생은 저술에 참여한 <<조조묘진상>> 45페이지에서 11 11 오후 4 발견했다”고 하였다; ). <<고고대 팀장의 조조묘에서 위무왕석비를 발굴한 상세한 내부사정을 친히 진술하다>>에서는 “제1차로 그럴 듯한 물건을 발견해서, 대원은 약간 겨동했다. 황급히 물로 석비상의 흙을 씻었다. 위에 도대체 뭐가 있는지 상세히 보고싶었다. 흙을 털어내고나지 석비에는 ‘위무왕상소용격호’라는 글자가 확실히 보였다. 지금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은 툴토된 원상태대로 보존되어 있다. 두터운 황니토가 녹이 구리줄을 싸고서, 묵묵히 세상사람들에게 천년의 창상을 말해주고 있다” CCTV <<조조묘발견>> <<무왕귀래>> 25분쯤 지난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 향금산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위무왕석비를 씻었다고 했다. <<진상>> 46페이지에서는 “고고대의 주둔지로 돌아왔다. 상금산은 식사도 하지 않고, 황급히 물로 석비위의 부토를 씻어냈다. 흙을 털어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발굴일자를 바꾸는가? 도대체 어느 날인가? 씻었는가 아니면 원상태대로 보존하였는가? 씻고서 일부분을 보류했다면 그것은 정말 교묘한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것인가? 대부분을 씻고 약간을 남겨놓았다면, 지금은 동그란 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안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줄 알았는가? 결론은 다시 흙으로 쌌다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이처럼 낳은 자체 모순이 있고, 이처럼 간단한 숫자와 기본사실도 명확히 하지 못하는데, 전문가의 식견이나 수준은 일반 백성보다 낮지 않아야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을 비전문가라고 욕하고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