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여치(呂雉)와 유방(劉邦)

중은우시 2012. 1. 31. 10:21

글: 상선약수(上善若水)

 

여치는 한고조 유방의 황후이다. 역사상 아주 성공한 여성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악독함과 권모술수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여치는 그렇지 않았다. 현숙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유방을 위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고, 구사일생했다.

 

그녀가 유방에게 시집을 갈 때, 유방은 그저 패현의 일개 사수정장이었다. 정장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출소장이다. 여후의 부친이 생일잔치를 할  때, 여후의 부친은 패현현령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유방이 아부를 하기 위하여, 당연히 생일축하를 하러 간다. 유방은 돈이 없었지만, 얼굴이 두터웠고, 담량이 컸다. 부도날 숫자의 선물을 적고는 당당하게 상석에 자리한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여후의 부친이 이를 알고는 원래 화가나서 그를 내쫓으려고 했었지만, 그를 한번 만나보자 깜짝 놀란다. 왜햐하면 여후의 부친은 관상을 볼 줄 알았는데, 유방은 융준(隆準, 메부리코)에 용안(龍顔)이었고, 하늘과 해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결정한다. 처와 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딸 여치를 깨알같이 자잘한 관직을 가진 하급관리 유방에게 시집보낸다.

 

유방은 여후를 맞이한 후, 자주 공무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베를 짜고, 밭을 매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기르는 일은 모조리 여후에게 맡겨진다.

 

젊었을 때의 유방은 무뢰배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이 만든 대나무모자를 쓰고 곳곳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사람을 속여서 먹고 마시며 지냈다. 한번은 죄수를 압송하는데, 자신이 술에 취하여 죄수를 도망가게 된다. 그래서 그 자신도 할 수 없이 망탕산(芒蕩山) 아래의 늪지대로 도망치게 된다. 현숙한 여후는 가정을 혼자서 지탱하는 외에, 시시때때로 먼 길을 걸어 남편에게 옷가지와 먹거리를 가져다 주곤 했다. 그녀가 하는 말에 따르면 유방이 머무는 곳은 항상 구름이 둘러싸고 있어서, 여후가 그것을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었고, 유방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나라말기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유방은 무리를 이끌고 패현으로 들어와 패공(沛公)으로 옹립된다. 여후도 당시에 덩달아서 여부인(呂夫人)으로 존칭된다. 유방이 함양으로 진격하고 나서 서초패왕 항우에 의하여 한왕(漢王)에 오른다. 여후는 다시 왕비(王妃)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후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곧이어 항우와 유방간에 천하를 놓고 싸우는 천지를 진동하는 전투가 벌어진다. 여후는 항우의 포로가 된다. 심지어 항우는 여후를 대치하는 진영의 앞으로 끌고가서 여후를 삶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유방을 협박하고 위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유방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한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필자의 생각에 당시 여후는 아마도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을 것이고, 뼛속까지 시렸을 것이다. 4년의 초한전쟁에서, 여후는 초군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다. 그러다보니 온갖 고난과 능욕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몸부림쳤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심리와 정신은 심각하게 타격을 입는다. 이리하여 그 후에 의심이 많고 안전감이 결핍되는 후유증을 나타낸다. 그녀는 마음이 좁고, 긴장과 공포에 악독한 여인이 된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강한 성격과 일처리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초,한이 서로 화의하여, 홍구(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나누자, 항우는 여후를 유방에게 돌려보낸다. 여후에 있어서 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격이다.

 

나중에 유방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 공격한다. 마지막에 해하지전에서 항우를 무찌르고, 서한왕조를 건립한다. 유방이 황제가 되자, 여후는 당연하게 황후가 된다.

 

한고조 유방은 장기간 외부에서 전쟁을 치르다보니, 거기서 여인들을 데리고 다니게 된다. 여기에는 박희(薄姬), 척희(戚姬), 조희(曹姬)등 여러명이 있다. 한 사람이 황제에 오르면 사해의 땅이 그의 것이고, 여인들도 여러 명 거느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후는 이 이치를 잘 알았다. 그러나 황궁은 원래 권력쟁탈의 전쟁터이다. 그 잔혹한 투쟁은 칼과 창을 들고 싸우는 전쟁에 못지않게 잔혹하다. 그리고 여후는 원래 권력욕이 아주 강한 여인이다. 일단 실질적인 이익충돌이 발생하거나, 향후의 안전문제에 관련되면, 여후는 좌불안석이 되어 불안해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척희에 있었다. 척히는 키가 크고, 기질이 고귀했다. 정도(定陶)에서 유방과 만났고, 아주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이 척희도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유여의(劉如意)에게 황위를 잇게하려고 애쓴다. 유여의는 행동거지가 기품이 있어, 유방이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척희가 잠자리에서 베겟송사를 했다. 여후의 아들인 유영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유방이 좋아하지 않았다. 유방은 유영이 태자신분을 박탈하고, 유여의를 태자로 세워 계승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척희는 여치의 정적(情敵)일 뿐아니라, 정적(政敵)이 되었다. 그녀는 반드시 반격해야 한다. 다만 조심스럽게.

 

한나라가 건립된 이래,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덕망이 높은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모셔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이 상산사호는 유방이 유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말끝마다 욕을 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요청에 응하지 않아왔다.

 

소위 "상산사호"는 상산에 있는 네 명의 은거고인이다.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용리(用里)이다. 이 4명의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은 전란을 피해서 산 속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상산은 지금 섬서성 상현의 동남쪽에 있고, 숲이 깊으며, 아름답고 지형이 험준했다. 은거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아들의 태자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여후는 장량에계 계책을 묻는다. 장량의 주선으로 유방도 모셔오지 못한 "상산사호"가 태자와 여후의 성의에 감동하여 출산을 응락하고, 태자의 빈객이 된다. 네 명의 노인의 가르침으로 유영의 수양과 견식은 크게 진보한다.

 

하루는 궁안에 연회를 베푸는데, 네 명의 수염이 허연 노인들이 태자 유영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한고조는 그들이 바로 '상산사호'라는 것을 알자, 태자를 폐위시킬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조차도 모셔오지 못한 '상산사호'가 이미 태자의 빈객이 되었으니, 태자의 날개는 이미 튼튼해졌다고 느낀 것이다. 유방이 후궁으로 돌아온 후 이 소식은 바로 척희에게 전해진다. 척희는 바로 눈물을 주루룩 흘린다. 그녀는 자신이 일국지모가 되는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 여후가 장량의 도움을 받아 의외의 승리를 거둔다. 웅재대략의 유방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태자의 지위를 공고히 한 다음, 여후는 자신의 위망을 세우고자 한다. 여후가 위망을 세우기 위하여 한 일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한신(韓信)을 죽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위망을 한신의 머리 위에 세우고, 여러 신하들을 겁주어 따르게 한다.

 

한초삼걸중 '운주유악지중, 결승천리지외'의 장량은 한나라가 건립된 후 반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이미 위협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백성을 다독거리고, 국부민강을 위해 애쓰는 소하는 천하를 다투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권건립후에 생산을 발전시킬 인재는 아주 필요했다. 단지 지휘하는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성을 빼앗고 관문을 지키며, 기이한 전술로 승리를 얻어내는 한신에 대하여 유방은 계속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물며 한신은 초한쟁패중에 유방이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를 틈타, 유방을 협박하여 왕이 되었다.

 

한고조 유방은 황제의 보좌에 오른 후, 일반적으로 그와 함께 천하를 얻는데 공헌한 공신들은 행동거지가 거칠고, 예법을 무시했다. 심지어 취한 후에 검을 뽑아 춤을 추기도 했고, 전각의 기둥을 내려치기도 했다. 체통이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숙손통이 조정에서 이를 제안하여 조정에서 규정을 정하게 된다. 한고조 유방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에야 황제가 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얻는데 공로가 높은 공신들은 여전히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고조는 이에 대하여 타격을 가하고 싶어한다. 첫번째는 바로 마음 속으로 가장 불안하게 느끼는 한신이다. 그는 먼저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으로 바꾸어 봉한다. 그리고 다시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을 낮춘다. 그후 진평의 계책을 써서 한신을 체포하여 평민으로 낮춘다. 그런, 한고조는 한신을 죽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한고조는 한신과 약속한 바 있기 때문이다: 견천불살(見天不殺), 견지불살(見地不殺), 견철기불살(見鐵器不殺). 즉, 하늘이 보여도 죽이지 않고, 땅이 보여도 죽이지 않고, 철기가 보여도 죽이지 않는다. 여후는 유방도 죽이지 못한 한신을 베(布)로 싸고, 죽첨(竹簽)으로 찔러서 죽인다. 그가 죽을 때 하늘도 보지 않고, 땅도 보지 않고, 철기도 보지 않았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고조는 한신이 여후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기쁘면서도 슬퍼했다"고 적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배후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은 차마 공신을 죽일 수 없으나, 자신의 처가 과단성 있게 자신이 마음 속으로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을 해결해주었다는 것이다.

 

여후의 이 방법은 확실히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주는 효과를 누렸다. 조정대신들은 그녀가 한신과 같은 인물까지도 죽여버리는 것을 보고, 그녀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장안에 들려왔다. 한고조는 마침 병중이었다. 원래 태자 유영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대신 토벌하게 해야 하지만, 여후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직접 나서라고 핍박한다. "경포는 천하의 맹장이다. 쉽게 대적할 수 없다. 태자가 가는 것은 호랑이 입에 양을 보내는 것이나 같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태자의 아저씨뻘인데, 기꺼이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정하여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빗나간 화살에 맞아 상처가 곪아서, 3개월후에 붕어하고 만다. 향년 63세였다.

 

유방은 죽기 전에 백마를 죽여 맹세하고, 천하에 포고문을 내린다.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봉할 수 없다. 이는 유방이 여후를 어느 정도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태자 유영이 즉위할 때 겨우 17살이었다. 천성이 인자하고 유약하여, 모든 권력은 여후의 손아귀에 장악된다. 여후는 척희와 조왕 유여의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놀랄 피바람이 궁중에 불게 된다. 먼저 척희를 유폐시키고, 다시 조왕 유여의를 한단에서 궁으로 들어오게 한다. 유영이 이 동부이모의 동생을 극력 비호했지만, 여후는 여의를 독살한다. 눈엣가시인 척희에 대하여 여후는 그녀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파내고, 귀를 불태우며, 벙어리약을 먹여 변소에 넣고, '인치'라고 부른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여후는 특별히 아들 유영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다. 유영은 '인치'가 척희라는 것을 알고는 대경실색하고, 얼굴이 눈물로 가득해진다. '너무 잔입합니다. 그게 사람이 할 일입니까. 태후가 이런 일을 벌이니, 나는 어떻게 천하를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는 이때 놀란 것때문에 이때부터 병에 시달리며 밤마다 술로 괴로움을 달래고 조정일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여후는 한편으로 피비린내나는 수단으로 유씨자손들을 처리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씨들을 핵심요직에 앉힌다. 그리고 당근을 써서 황실친인척들을 회유한다. 이렇게 하여 한걸음 한걸음 유씨천하를 찬탈하게 된다.

 

여후의 친아들인 유영은 시위소찬(屍位素餐)으로 7년간 황제로 있다가 죽고 만다. 후궁미인 소생의 아들인 유공(劉恭)이 황제위를 이어받으니 그가 소제(少帝)이다. 어리다보니 말을 가려하지 않아서 여후의 금기를 건드리고, 4년후에 유폐되어 살해당한다. 다시 유홍(劉弘)을 황제로 앉히는데, 다시 4년이 지나서, 여후의 병이 위독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이대 유씨자손과 옛 노신들은 더 이상 그녀의 발호를 참지 못하고, 주허후 유장과 주발, 진평등이 먼저 손을 써서 정변을 일으킨다. 이는 여후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녀의 형제, 조카인 여록, 여산등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모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여후는 놀란 와중에 숨을 거둔다.

 

여후는 강인하고 독랄하며, 남자들 못지 않은 인물이다. 한고조가 죽은 후, 그녀는 혼자서 15년간 권력을 독점한다.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비록 온 손에 피를 묻혔지만, 그녀는 업적도 남겼다. 먼저 한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얻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켜 사회분위기를 바로 잡았으며, 많은 번잡하고 가혹한 법령을 폐지했다. 특히 '삼족죄' 및 '요언령'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사기>와 <한서>에서도 모두 그녀를 칭찬한다: "한고조의 황후인 여주인(여후)은 규방에서 나오지 않고 정사를 하였지만, 천하는 평안했다. 형법을 사용하는 것이 드물고, 죄인도 많지 않았다. 백성들은 농사에 힘쓰고 의식이 풍족했다."

 

여후의 최대결점은 질투심이 너무 강하고, 사심이 강하며, 수단이 잔혹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씨로 유씨들이 천신만고끝에 얻은 강산을 바꾸고자 했으나, 결국 패망한다. 여후가 죽은 후, 박희의 아들인 대왕(代王) 유항(劉恒)이 황제에 오른다. 그가 역사상 유명한 한문제(漢文帝)이다. 이때부터 역사상 '문경지치'의 태평성대가 시작된다.

 

유방의 처첩중에서, 발분도강(發奮圖强)하여 최고통치자의 지위에 오른 여인은 여후이고, 지옥과 같이 참혹한 지경에 빠진 여인은 척희이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흐리멍텅하게 있다가 등봉조극에 오른 것은 박희이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