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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한(漢)과 흉노(匈奴)의 "60년평화"는 누가 가져다주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정만군(程萬軍) 

 

역사는 한원제(漢元帝)를 평범한 군주(庸君)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한왕조의 외환은 날로줄어들고, 흉노가 적극적으로 한나라에 전쟁을 걸어오는 일은 아주 적었다. 한과 흉노간의 "60년평화"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당연히, 여기에는 흉노가 내란으로 약화된 점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약해빠진 흉노라 하더라도, 한나라의 평범한 군주를 무서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나라의 행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한원제때, 한과 흉노의 양국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화친외교"로 소군출새(昭君出塞) 즉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을 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지성(郅至城)전투로 한나라의 장군 진탕(陳湯)이 흉노의 진지선우에 대하여 벌인 "참수행동"이다.

 

이는 두 가지 전혀 다른 행동이다. 하나는 '여자를 주고 평화를 얻은 것"으로 적국의 최고지도자의 겉에 여인을 심어두고 베갯송사를 하게 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전쟁을 막은 것"이다. 강경하게 서로 부닥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거의 앞뒤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후 한나라와 흉노간에는 기이할 정도로 길다란 안정기가 도래한다. 이 안정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어떤 사람은 미녀 왕소군의 공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탕의 공로라고 한다.

 

"참수행동"과 "금전미녀" 도대체 어느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까?

 

중원의 대외전쟁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같다. 중원의 대외전쟁사를 보면, 한나라이건 송나라이건, 돈을 보내건 미녀를 보내건 아니면 영토를 주건, 그 전제는 모두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당나라에 굴욕사가 없는 직접적인 이유는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 '평화"의 대전제이다. 금전미녀는 결국 이 기초위의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계속 밀렸다. 대부분의 사학애호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을 이기지 못한다".그러나, 서한이전 즉, 진나라이전시기의 중원왕조때 한족은 오랑캐와의 교전에서 밀리지 않았다. 유명한 "호복기사(胡服騎射)"는 중국전국시대의 이야기로, 조나라의 조무령왕이 일찌기 '호복기사'했다는 것이다. 이 고사를 많은 사람들은 한족이 소수민족만큼 전투를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당시의 시대배경으로 보면, '호복기사'는 단독으로 싸울 수 있는 기능이다. '호복기사'이후, 일대일에서도 진나라 장수들은 호인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진나라의 대장군 몽염은"흉노를 칠백여리 몰아냈고, 호인들은 감히 남하하여 말을 방목하지 못했다." <과진론>의 이 말은 바로 몽염의 위풍을 보여준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고, 북방에 기나긴 방어선을 구축했다. 몽염은 북방을 10여년간 지킨다. 흉노는 그의 위맹함에 겁을 먹고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 몽염의 위하력은 맹호출림과 같고 위풍이 팔방에 미친다고 말할 수 있다.

 

몽염이후, 이 위세를 계승한 장군이 누구인가? 왕조를 넘어서 진탕 한 사람이다. '질지성전투'보다 더욱 유명한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강한 한나라를 감히 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죽인다(明犯强漢者, 雖遠必誅)!"

 

이 말은 "한혼(漢魂)"의 대표적인 구호이다. 이 경심동백의 구호는 아무런 근거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저명한 질지성전투와 함께 탄생했다.

 

한원제가 집권하고 있을 때의 서한은 비록 수성(守城)의 상태를 보였고, 대부분의 경우 흉노의 '야만적인 행동'에 대하여 말로만 '항의'했다. 이런 '항의'는 '약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적을 멈추게 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흉노가 변방을 괴롭히는 것은 다반사가 되고,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진탕은 한원제때 서역을 지키는 부장(副將)에 불과했다. 그는 호위군대를 데리고 대군을 정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지선우가 서역에서 종횡발호한다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선발제인(先發制人)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성지를 위조하여, 단독으로 군대를 데리고 적진 깊숙히 들어간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질지선우의 도성에 이른다. 이렇게 질지선우에 대한 참수행동을 진행하여 일거에 명성을 얻는다.

 

"신이 듣기로 천하의 대의는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흉노 호한야선우는 이미 북쪽의 번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오직 질지선우만이 반역하여,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대하의 서쪽에서 우리 강한 한나라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질지선우는 백성들에게 악독한 행동을 일삼고, 그의 악행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신 (감)연수, (진)탕은 의로운 병사를 일으켜, 하늘을 대신하여 주살하고자 하였으며, 폐하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음양에서 호응하여 적진을 허물고 질지선우의 수급을 베고, 그 아래 각 왕들도 참하였습니다. 마땅히 그 수급을 오랑캐들이 사는 곳에 높이 걸어 만리에 알여야 할 것입니다. 강한 한나라를 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죽인다."

 

이상은 진탕이 올린 글이다. 이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문구가 나온 출처이다. 진탕은 지위가 높지 않은 한나라 장수였다. 그는 행동으로 외적에게 말했다. 한나라는 대국이다. 대국은 이래야 한다. 만일 감히 대들면 죽는 길 뿐이다.

 

욕심은 끊이 없다. 그러나 일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삶을 구하는 본능만 있을 뿐이다. 사람과 늑대는 모두 그러하다. 어떤 시대이건 전쟁만이 영구한 화평을 가져올 수 있었다. 금전, 미녀와 토지를 주는 것은 아마도 일시적인 화평뿐일 것이다. 그러나 남는 것은 영원한 치욕이며 정신은 되살아나지 못한다.

 

누가 한,흉노의 육십년평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왕소군은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하였고, 한나라사람들이 치욕을 삼켜야 했다. 진탕은 직도황룡하여 한나라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게 하였다. 소군은 고초를 겪었고, 진탕은 평정했다. 한혼의 위세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강한 한나라를 감히 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