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초(越楚)
한경제(漢景帝) 3년(기원전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초왕(楚王), 조왕(趙王), 교서왕(膠西王), 교동왕(膠東王), 치천왕(菑川王), 제남왕(濟南王)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역사에서 ‘칠국지란’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대란의 도화선은 한경제 유계(劉啓)의 사부인 조착(晁錯)에게서 비롯된다.
조착은 <<삭번책(削藩策)>>을 내놓는데, 이는 오왕등 제후왕들의 봉지(封地)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반군에서는 “청주조착, 이청군측(請誅晁錯, 以淸君側, 조착을 주살하여 황제의 측근에서 간신을 제거해 달라고 청하다)”의 깃발을 내걸고, 병력을 일으켜 조정을 압박했다.
유계는 어쩔 수 없이, 일찍이 조착과 원한이 있던 원앙(袁盎, 전 오나라 재상)의 계책을 받아들여, 시중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은사 조착을 동시로 유인하여 ‘요참(腰斬)’해 버린다.
가련한 조착은 이렇게 억울한 귀신이 된다.
유계는 원래 ‘졸을 버려서 차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조착이 죽었는데도, 유비는 전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하게 굴었다. 스스로 ‘동제(東帝)’라 칭하며 황위를 빼앗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사실, 이 대란의 도화선은 바로 유계 본인이 매설한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육박(六博)’의 승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이는 중국역사상 바둑 한판으로 인하여 일어난 가장 유명한 내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착은 그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일 뿐이다.
<<사기. 오왕비열전>>을 보면, 이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이고,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에 오왕에 봉해진다.
당시 관상을 보는 사람이 유방에게 ‘오십년후에 동남에서 반드시 난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얘기했는데, 그 의미는 오왕 유비에게 ‘반골’이 있다는 뜻라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분명히 후세인들이 가져다붙인 것일 것이다.
유계가 태자로 있을 때, 오나라의 세자가 경성으로 가서 한문제를 접견했다. 그 동안 태자 유계가 함께 놀아주면서 ‘육박’이라는 놀이를 했다.
이 ‘육박’은 육박(陸博) 혹은 박(博)이라고도 하는데, 가장 오래돤 바둑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문물을 보면, 육박은 기국(棋局, 즉 棋盤), 바둑돌, 저(箸, 주사위) 및 박주(博籌)로 구성된다. 놀이방법은 주로 대박(大博)과 소박(小博)의 두 가지가 있다. 서한 및 그 이전에는 대박의 방법이었느넫 ‘효(梟)”를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육박을 하는 쌍방이 각각 자신의 바둑판에 6개의 돌을 놓아두는데, 그중의 하나가 ‘효’이고 나머지 5개는 ‘산(散)’이라고 부른다. ‘저(箸)’ 6개를 쓴다. 쌍방이 돌아가며 ‘저’를 던져서, ‘저’의 수량에 따라 바둑돌을 옮기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상대방의 ‘효’를 잡으면 승부가 난다. <<한비자>>에서 얘기한 “박자귀효, 승자필살효(博者貴梟, 勝者必殺梟)” 이는 장기에서 왕을 잡아야 이기는 것과 비슷하다.
육박을 좋아하던 태자 유기와 오나라 세자는 바둑판 위에서 결투를 벌인다.
유비의 아들이 모신 스승은 모두 초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성격이 광망하고 오만하며, 호승심이 강했다. 바둑놀이를 하면서 서로 이기겠다고 싸우다보니 태도가 좋지 못하고, 말도 불손했다. 황태자를 무시하는 것같았다.
유계는 화가나서 바둑판으로 오나라 세자를 내려친다. 급소를 맞았는지, 세자는 죽어버린다.
조정은 오나라 세자의 영구를 오나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게 한다. 유비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천하는 유씨일가의 천하이다.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묻어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영구를 다시 장안으로 돌려보낸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계간의 원한은 맺어지고, 유비에게는 모반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유비는 처음에는 병을 핑계로 가을에 장안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그저 사신을 보내어 참가하게 했다.
한나라때 제후왕은 매년 황제를 만나서 업무보고를 하여야 했다. 이 제도는 주나라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천자와 제후간의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맹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후가 천자를 배알하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한다. 한번 배알하지 않으면 작위를 강등시키고, 두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그 땅을 빼앗고, 세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군대를 끌고 가서 친다.”
이를 보면 제후가 감히 황제를 배알하지 않는 것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했다. 이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정은 오나라 사신을 구금하고 심문했다. 사신은 그저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가 아들을 잃고나서 마음 속으로 두려움이 일어나서 병이 들었다고.
마음이 인자했던 한문제는 아마도 유비가 아들을 잃은 고통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유비를 회유하려는 생각에서, 그냥 용서하고, 유비에게 궤안(几案, 벽에 세워놓고 몸을 기대는 방석)과 괴장(拐杖, 지팡이)를 하사하며, 유비는 나이가 많으니 다음부터는 배알하러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렇게 하여 평정되었고, 유비는 그후 이십년간 조정에 배알하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유비의 유계에 대한 원한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복수하겠다는 마음과 모반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항상 유계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생각을 했다: “유씨의 천하이니, 황제도 유씨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오나라는 구리(銅)가 났고, 바닷가였다. 그리하여 유비는 전국각지의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동전을 만들고, 소금을 만들었다. 오나라에서 만든 동전이 전국으로 유통되어, 오나라의 국력은 중앙조정에 필적할 만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니, 오나라는 국내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면 유비는 그들에게 대가를 주었고, 별도로 사람을 사서 일을 시켰다. 명절때가 되면, 그는 돈을 풀어서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유비는 오나라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거병시에도 그가 명을 내리자 바로 이십여만명이 모여든다. 오나라로 도망와 있던 다른 나라이 도망범들도 모두 유비가 길렀다. 다른 나라의 관리가 오나라로 들어와서 체포하려고 하면, 유비가 이를 막아주었다. 그러니 이들은 모두 유비의 은혜에 감격했고, 그를 위하여 기꺼이 견마지로를 다하려 했다. 유비는 그외에도 금은보물로 다른 제후왕, 대신들을 회유했다.
이를 보면 유비는 계속하여 모반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문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에는, 유비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첫째는 한문제는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고, 둘째는 반란을 일으킬 적합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조착은 여러 번 상소를 올려 한문제에게 유비의 죄를 물으라고 요청하나, 한문제는 차마 유비를 징벌하지 못한다.
유계가 즉위한 후, 그는 일찌감치 유비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므로 하루빨리 삭번(削藩, 번국을 없애는 것)을 할 것을 주장했다. 조착은 유계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오늘 삭번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삭번하지 않아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삭번하면 반란을 빨리 일으키고, 그 화도 작지만, 삭번하지 않으면, 반란이 늦어지지만, 그 화는 더 클 것이다.”
조착의 뜻은 황제인 유계 당신이 유비의 아들을 때려죽인 이후로, 유비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반란을 일으키는게 늦어지면 질수록 그 화는 더욱 커진다. 그러니 아예 빨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한 후에 진압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칠국의 난’을 일으킨 진정한 도화선은 바로 그 육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착의 역할이라는 것은 그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일 뿐이다.
서한에 발생한 ‘칠국의 난’은 최종적으로 유계의 동생인 양왕(梁王) 유무(劉武)가 전력을 다해서 막아내고, 태위 주아부(周亞夫), 대장군 두영(竇嬰)이 삼십육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군의 식량통로를 단절시키고, 3개월만에 평정한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치(呂雉)와 유방(劉邦) (0) | 2012.01.31 |
---|---|
“흉노(匈奴)” 명칭의 유래 (0) | 2011.05.11 |
균형의 타파와 재건 (0) | 2011.04.27 |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 아직도 찾지 못한 왕릉 (0) | 2009.10.25 |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0) | 2009.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