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립군(王立群)
세력간의 균형은 제국정권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방식의 하나이다. 다만, 이런 균형은 가장 취약한 형태이기도 하며, 아주 쉽게 타파되기도 한다. 일단 균형이 타파되면, 제국정권의 안정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균형이 타파되는 것은 어느 일파가 특정한 역사조건 하에서 급성장하며, 기형적으로 성장한 한 세력이 최종적으로 다른 세력을 압도하고, 다른 세력을 압박하게 된다. 다른 세력은 일정한 기간동안 저자세를 유지하다가, 시기가 도래하면, 다시 반격하거나 연합하여 반격하여, 기형성장한 어느 일파를 억제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세력균형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먼저 서한초기 여씨(呂氏) 외척파가 소멸된 후의 정국을 살펴보자.
여후가 사망한 후 겨우 2개월만에 여씨일족은 멸망한다. 조정의 3파중 외척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황족파의 핵심은 황4자 대왕 유항과 황7자 회남왕 유장이 남았다. 그리고 황손중에서 제왕 유양과 그의 두 동생인 유장, 유흥거가 가장 우수하여, 여씨세력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다만, 황자와 황손은 이런 상황하에서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황위에 오를 능력은 없다. 황제위에 오르려면 공신파와 조정의 황족파가 협상하여 결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씨세력을 물리친 후, 서한의 중앙정부에서 3파간 세력균형국면은 철저히 타파되고, 공신파(功臣派)가 홀로 강대해지게 된다.
공신파의 선천적인 약점은 스스로 황제에 오를 수 없다는 점이다. 그저 합법적인 승계권이 있는 황자, 황손중에서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할 수 있다. 당연히 가장 적합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공신파에 가장 우호적인 사람이고, 공신파의 이익최대화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황손중에서 유양, 유장, 유흥거는 여씨세력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젊고 능력이 뛰어나서 공신파들이 감히 제왕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고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두 동생은 능력이 너무 뛰어나고, 황손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후임황제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양, 유장, 유흥거는 공신파에 의하여 가장 먼저 배제된다. 황손중에서 이 세 사람을 배제하고나니, 다른 황손들은 너무 어려서 후계자의 범위에 들어가기 힘들다.
황자 중에서 회남왕 유장은 여후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른 사람이다. 그가 여씨세력을 죽인 공신파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이렇게 하여 유장도 배제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황사자 대왕 유항이다. 이는 하늘에서 떡이 굴러떨어진 경우이다. 유항 자신조차도 자신에게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유항은 회의를 열어, 토론하고, 사람을 경성에 보내어 정보를 수집한다. 왜냐하면 이 희소식은 그에게 너무나 의외였기 때문이다.
대왕 유항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실해 보인다. 권력욕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그는 유방의 8명의 아들 중에서 심기가 가장 깊은 인물이다. 이점을 부친인 유방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당시 유방은 태자인 유영이 너무 유약하다고 싫어했다. 여기서 그의 보는 눈은 정확했다. 아쉽게도 유방은 척부인에게 너무 빠져 있어서, 척부인의 아들인 조왕 유여의만을 좋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황사자 대왕 유항을 황태자로 올릴 기회를 놓쳐버린다. 만일 유방이 유항을 황태자로 앉히려 했다면 아마도 여후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유항은 멍청한 듯이 행동했고, 권력을 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십여년을 그렇게 보냈다. 여후를 속이고, 모든 대신을 속였다. 지혜가 뛰어난 진평조차도 대왕 유항이 유방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유항은 이렇게 뛰어난 연기로 한나라의 세번째 황제, 즉 한문제(漢文帝)가 된다.
대왕 유항이 경성으로 와서 황제위에 오르는 그 순간, 진평, 주발과 모든 대신은 알아차린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유항은 절대로 공신파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문제 유항은 황궁에 들어가는 그 날로 몇 가지 조치를 취한다. 황궁의 방비를 강화하고, 실제병권을 쥐고 있는 태위 주발의 군권을 박탈한다. 그후 한문제는 주발을 배척하고 타격을 가한다. 황족파는 다시 조정대권을 움켜뒨다. 공신파는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문제 유항은 주발, 진평, 관영의 세 대신을 연이어 재상으로 삼았지만, 권력은 한문제 유항이 혼자 거머쥐고 있었다. 공신파, 외척파는 세력이 약화된다. 한나라의 중앙정부의 새로운 세력간 균형이 형성된다. 황제를 절대핵심으로 하는 국면은 한경제, 한무제의 두 황제시대까지 이어진다.
한무제는 극단적인 전제황제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 자신이 권력의 중심이었다. 외척, 대신은 모조리 발언권이 없었다. 한무제가 먼저 위자부, 이부인을 총애하여, 외척파의 새력이 대신파(공신파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보다 강했다. 다만, 강대한 황권의 앞에서 각파세력은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한무제가 말년에 만든 무고지화는 황족파에 큰 타격을 가한다. 황태자, 황태손이 모조리 비명에 죽는다. 그러다보니, 한무제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골치아파지게 된다.
이때, 한무제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창읍왕, 연왕, 광릉왕 그리고 어린아들 유불릉. 앞의 세명을 그는 모조리 배제하고, 막내아들 유불릉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 한다.
막내아들 유불릉은 그때 불과 여섯살이었다. 모친인 구익부이이 이십여세였다. 자식은 어리고 처도 젊다. 그런데 한무제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 붕어하면, 유불릉이 정권을 잡을 것인데, 그가 혼자서 강산을 장악할 수 있을까?
제국제도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급소(死穴)가 있다. 하나는 군주전제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승계이다. 부친이 죽은 후, 자식은 아무리 어려도 승계하게 된다. 고아과부가 황권을 장악하면 무수한 비극이 일어난다.
당시 한무제는 7살때부터 16살때까지 꼬박 9년간을 세상일을 모르는 어린아이에서,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 줄 아는 천자로 성장했다. 유불릉에게는 그렇게 긴 성장기를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를 보좌할 오른팔, 왼팔을 고르게 된다.
한무제가 막내아들 유불릉을 황태자로 앉히는 문제에 있어서, 유불릉의 모친인 구익부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사기.외척세가>> 저조손의 보전에 따르면, 한무제는 유불릉을 태자로 확정한 후, 구익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한무제는 핑계를 잡아 구익부인을 심하게 질책한다. 구익부인은 놀라서 머리장식도 떨어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했다고 빈다. 한무제는 전혀 봐주지 않고, 즉시 구익부인을 감옥으로 압송하게 한다. 구익부인은 궁문을 나서면서도 계속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한무제는 ‘너는 죽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할 뿐이다.
왜 반드시 구익부인을 죽여야만 했을까? 한무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구익부인이 죽은 다음 날, 한무제는 별 일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좌우의 시종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구익부인이 죽은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종이 대담하게 말한다: 곧 그녀의 아들이 태자에 오를텐데, 왜 그녀를 죽였습니까?
한무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들은 모른다. 역사상 국가의 내란은 왕왕 황제의 나이가 어리고, 모친이 한창 나이여서 일어났다. 젊은 태후가 구중궁궐에 홀로 살면, 적막하며 교만하고 사치해지고 음란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래도 아무도 어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부인 황태후이기 때문이다. 여후의 일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렇게 하여, 한무제는 말년에 그를 위하여 자식을 낳았던 비빈은 아들을 낳았건 딸을 낳았건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것이 바로 한무제의 “살모존자(殺母存子)” 법칙이다. 젊고 무고한 구익부인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럽고 너무나 잔혹하다. 그러나, 곧 무덤에 들어갈 한무제에 있어서 이는 우환을 미연에 방지한 ‘영명’한 조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 한나라때의 제왕에게 여후는 벗어나기 힘든 악몽이 아닐 수 없다. 구익부인은 너무 젊었다. 황태자에 봉할 때, 유불릉이 겨우 8살이고, 구익부인도 기껏해야 스물몇살이었다. 이같이 젊은 청춘태후가 과부로 일생을 마치게 하는 것은 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스캔들이 나고 사단이 날지 아닐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한무제는 원인중의 한 가지만을 말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말하지 않았다. 구익부인을 죽인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이는 사전에 곽광이 보정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다.
한무제는 왜 곽광을 수석고명대신으로 임명했을까? 곽광은 곽거병의 동부이모(同父異母)의 동생이다. 18세에 입궁해서, 20여년동안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처신하는데서 조정에 따라갈 자가 없었다. 다만, 곽광은 신하이지 군주가 아니다. 그에게 안정적인 정치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구익부인이 살아있으면, 곽광의 집권력은 크게 약해질 것읻. 왜냐하면, 구익부인은 한소제 유불릉의 모후이고, 황태후의 지위와 권위가 있으므로, 어린황제 유불릉보다는 뒤이지만, 고명대신 곽광보다는 앞서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한무제가 죽은 후에 또 하나의 정치핵심이 될 수 있다.
구익부인이 만일 정치에 간여하면, 공정하게 정치를 하려는 곽광이 구익부인과 맞서게 될 것이다. 구익부인이 정치에 간여하지 않더라도, 곽광을 반대하는 세력은 구익부인과 연합할 것이다. 태후의 기치를 내걸고 궁중을 어지럽힐 것이다. 어느 상황이 나타나더라도, 곽광은 손발이 묶이게 되고, 일을 진행하기 힘들어진다.
후원2년(기원전87년) 정월, 한무제는 조서를 내려 막내아들 유불릉을 황태자로 삼는다. 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전천추의 5명이 보정대신에 임명된다.
한무제가 조서를 내린 3일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
한무제가 구익부인을 죽임으로써 모후가 정치간여하는 나쁜 결과는 막을 수 있었다. 다만, 곽광이 보정대신의 권한을 장악한 것은 또 다른 우환을 남기게 된다. 곽광은 권신이고 외척이다. 외척파는 한무제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신속히 성장한다. 그렇게 하여 독보적인 세력으로 된다.
곽광은 한무제의 유지를 저버리지 않았다. 힘을 다하여 한소제 유불릉을 보좌한다. 그러나,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지만 바람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동시에 명을 받은 보정대신 김일제는 1년여후에 병사한다. 상관걸은 곽광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불만을 품고 연왕 유단, 소제의 누나 개장공주, 그리고 상홍양과 손을 잡는다. 그들은 연왕 유단의 명의로 한소제에게 상소를 올려 곽광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한다. 이렇게 정교하게 계획된 음모는 14살된 한소제도 알아차린다. 그후 상관걸, 상홍양이 정변을 일으켜, 한소제를 몰아내고 연왕을 세우려고 한다. 한소제가 손을 먼저 써서, 상관걸, 상홍양등을 모조리 체포하고, 그 가족을 주살한다. 장공주, 연왕 유단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자살로 생을 끝마친다.
이 역모사건은 한소제의 손으로 분쇄된다. 곽광은 이 실패한 정변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다. 이때 고명대신은 곽광과 전전추만 남게 된다. 전전추는 이미 늙고 쇠약하여 조정에 나올 때도 가마를 타고 나와야 했으니, 곽광과 권력을 다툴 힘도 없었다.
한소제가 실패한 정변을 분쇄시킨 후, 서한의 중앙정부에서 권력구조는 곽씨 1인천하로 바뀐다.
한소제가 14살 때 곽광을 무고하는 음모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총명한 인물이다. 아쉽게도 이 똑똑한 군주는 22세에 요절한다. 그리고 후사도 남기지 않는다.
서한제국은 다시 한번 신하들이 군주를 뽑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때의 조정중신은 곽광 1인이다. 곽광은 중신이며 외척이다. 그는 황태후가 된 외손녀를 이용하여 창읍왕 유하를 새로운 황제로 올린다.
유하는 즉위한 때로부터, 아주 황당했다. 경성으로 오는 도중에 민간여자, 재산을 약취하고, 그의 집안사람들과 부하들에게 자사의 관복을 입게 하고, 관직과 작위를 내린다. 황제가 된 후, 유하는 창읍에서 데려온 심복들에게 모두 관직을 내린다. 유하는 미모의 궁녀만 보면, 즉시 불러들여서 술을 따르게 하고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리고 악부의 악기를 모조리 가져오게 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연주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궁안에는 탁한 기운이 가득하게 된다.
곽광은 이 꼴을 보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워서, 황태후의 명의를 이용하여, 겨우 황제에 오른지 27일된 유하를 폐위시키고, 다시 민간에서 한무제의 증손자인 유병이(劉病已, 나중에 劉詢으로 개명함)를 황제로 앉힌다.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이다. 곽광은 유하를 황제로 앉혔을 뿐아니라,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한선제를 황제에 앉히기까지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순조로왔다. 이를 보면 조정의 모든 세력이 이미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곽광 1명만이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국면은 제국제도하에서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한선제는 즉위후에 고묘를 알현한다. 대장군 곽광도 동행한다. 한선제는 가마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마치 등을 가시가 찌르는 것같이 편하지 않았다. “망자재배(芒刺在背)”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곽광의 부인은 자신의 딸이 한선제의 황후가 되지 못하자,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게 된다. 본시3년(기원전71년) 정월, 허황후가 임신하여 출산을 기다리는데 몸이 좋지 않았다. 곽광의 부인은 곽광과는 상의도 하지 않고, 입궁하는 약관을 매수하여 허황후를 독살한다. 허황후가 급사한 후, 약을 쓴 약관이 하옥된다. 곽광의 부인은 약관이 자백할까 두려워, 부득이 사실을 곽광에게 털어놓는다. 곽광은 그 얘기를 듣고는 겁을 먹는다. 그러나, 결국 부인의 잘못을 덮어주어, 요행히 위기를 넘긴다. 다시 곽광이 나서서, 곽광의 딸을 한선제의 황후로 삼게 한다.
이때 곽광의 권력은 일생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한선제도 곽광에게는 어느 정도 양보할 정도였다.
지절2년(기원전68년) 봄, 곽광의 병세가 위중해진다. 한선제가 친히 병문안을 간다. 그날 곽광의 아들 곽우(霍禹)를 우장군으로 삼는다. 삼월, 곽광이 병사한다.
곽씨가족은 한무제, 한소제, 한선제의 3황제를 지나면서, 세력이 악성팽창했다. 조정내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었다. 곽광이 죽은 후, 아들 곽우는 부친의 작위를 세습하여 박육후가 된다. 곽광의 조카손자인 곽산은 낙산후가 되고, 봉거도위영상서가 된다.
한선제는 민간에 있을 때부터 이미 듣고 있었다: “곽씨의 세력이 커진지 오래 되었지만, 집안내부는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황위에 오른 후에 곽씨세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깨달았다. 자신의 황후조차 곽광의 딸이었으니까.
어쨌든 제국제도의 권력중심은 황제 본인이다. 다른 파벌의 팽창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다. 황제가 조정을 장악할 힘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곽광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선제는 곽씨세력을 약화시킬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장안세를 대사마대장군에 임명하고, 허황후의 아들인 유석을 태자에 봉한다. 허황후의 부친인 허광한은 평은후에 봉하고 어사대부 위상을 승상으로 삼는다.
곽광의 부인은 유석을 태자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아주 화를 낸다. 급히 입궁하여 곽황후와 태자를 독살할 것을 모의한다. 이때 곽광부인이 허황후를 독살한 일이 들통난다. 한선제는 곽씨세력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지절4년(기원전66년) 칠월 곽곽이 죽은 후 2년이 되는 해에, 곽씨는 권세를 박탈당한데 원한을 품고 모반을 꾀한다. 한선제를 폐위시킨 후 곽우를 황제에 올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음모는 들통나고, 곽광의 질손 곽운, 곽산이 자살하며, 곽우는 요참당한다. 곽광의 부인과 여섯 딸, 사위, 손녀사위는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친척중 연좌되어 명문당한 고싱 수십곳이다. 곽거병의 후인들은 모조리 대역죄로 처형당한다. 곽황후는 폐위되고, 곽씨가족은 철저히 멸망한다.
황족파가 최종적인 완승을 거둔 것이다.
한나라초의 황족, 외척, 공신의 세 파중에서, ‘공신’은 유방을 따라 천하를 얻은 개국공신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국공신은 자연스럽게 한문제때에 이르러 정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후, 한무제의 흉노에 대한 전쟁으로 새로운 ‘공신’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한나라초기의 개국공신과는 그 성격이나 지위가 달랐다. 한나라초기의 개국공신은 진나라말기 의거를 일으키기 전에는 유방과 대등하게 생활하던 평민들이었지만, 한무제시기의 공신들은 황권전제하에서 운좋게 성공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소제, 한선제 시기에, 곽광등 보정대신은 그저 한무제의 신임을 깊이 받던 노신들이었다. 곽광 본인은 처음부터 외척신분이었고, 곽광의 일가세력이 악성팽창하면서, 곽씨가족은 이미 서한의 여씨외척파 이후의 또 다른 악성팽창한 외척파가 된다. 일단 그들이 황권을 위협하기에 이르자, 황족파의 핵심인물인 황제와 공신파가 변모하여 나타난 대신파는 모두 그에 대하여 싫어하는 감정이 나타난다. 외척파의 멸망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 된 것이다.
곽씨외척파의 멸망은 그저 한 외척파의 멸망이었다. 곽광때부터, 서한말기 및 동한시기에 이르기까지 외척파는 시종 떨어지지 않는 고질이었고, 시시때때로 황족파와 대신파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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