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강화(劉江華)
유방은 도대체 몇 명의 부인을 두었을까? 여기에 대하여 통일된 견해는 없다. <사기>에 따르면, 대체로 다음의 몇 명이 있다: 정궁황후 여치(呂稚), 가장 총애했던 척희(戚姬), 한문제의 모친인 박희(薄姬), 이외에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죽은 장오(張敖)의 미인, 조씨(曹氏), 만석군(萬石君)의 누나등 8명이다.
1. 여치
정궁왕후 여치는 유방이 아직 거병하기 전에 유방에게 시집온다. 당시 유방은 패현 사수정장(泗水亭長)으로 있었다. 진나라의 법규에 따르면, 십리마다 정을 설치한다. 십정마다 향을 설치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고대의 문학작품 특히 희극에서 자주 '십리장정(十里長亭)'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상기>의 제4본 제3절에 시작하자마자 '금일송장생부경, 십리장정, 안배하연석(今日送張生赴京, 十里長亭, 安排下筵席)". 십리마다 정을 두고, 정에는 정장이 있다. 십정이 향을 이룬다. 여기에 기록된 대체적인 의미는 10개의 마을로 1정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열개의 정이 1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장은 하급관리이고, 촌장보다 약간 높은 정도이다. 주요업무는 관할 정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오가는 관리를 접대하며, 관청의 문서를 수발하는 것등이다.
유방이 부인을 맞이하는 과정도 아주 특이하다. 용모로 보면, 유방의 콧날은 아주 높고, 수염은 아주 아름다웠다. 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다녔는데, 현지 사람들은 '유씨관'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지방에서 잘나갔던 인물이고, 유방은 자신을 꾸미는데 재주가 있었던 것같다. 그렇기는 해도,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하루종일 놀기만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자신의 딸을 그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마흔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홀아비로 산 것이다.
그때 단보(單父) 여공(呂公)(지금의 산동성 단현)이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온다. 패현의 현령과 여공은 교분이 깊었다. 그리하여 여공을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한다. 패현의 명문망족들은 현령에게 잘보이고, 여공과 가까워지고자 속속 축하하러 간다. 소하등이 주연에 준비한 규정은 1000전을 내지 못하면 그저 아랫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방이 온 후, 문을 들어갈 때 기세등등하게 "하만전(賀萬錢)"이라고 쓴다. 물론 돈을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그리하여 그는 상좌에 모셔진다. 여공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 유방이 분명 장래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유방이 여치와 결혼할 때, 유방은 43살이고, 여치는 28살이었다. 당시든 현재이든 모두 노총각, 노처녀이다. 유병이 결혼하지 않은 것은 백수로 지내서 아무도 그에게 시집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치는 집안에 돈도 있고, 자신의 용모도 어느 정도 괜찮았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부친인 여공이 그녀에게 좋은 사위를 찾아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여공이 유방을 고르자, 그의 처는 화를 낸다. 그래도 여공은 고집을 꺽지 않고, 여자들이 뭘 아느냐고 소리친다.
결혼후 여치는 두 사내아이를 낳는다. 나중에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이다. 유방은 가끔 집으로 가서 농사를 짓곤 했는데, 하루는 여치와 두 아이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와서 마실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시고나더니, 여치에게 말한다: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다" 유방이 돌아와서 그 말을 듣고는 바로 노인을 쫓아가서 자신의 관상을 봐달라고 한다. 노인은 그를 보고난 후 "유방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고 한다.
나중의 역사는 이 노인의 말을 증명한다. 여치가 낳은 여영은 태자가 되고, 여치는 황후가 된다. 유방, 유영이 죽은 후 조정의 대권을 9년간이 나 좌우하여, 역사에서 '여후(呂后)'라 칭한다.
여후는 성격이 강했다. 유방이 밖에서 전투를 할 때, 그녀는 소하와 함께 후방을 지켰다. 유방이 천하를 얻는데 적지 않은 공로가 있었다.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쟁탈하기 위하여 팽성에서 싸우다 패배했을 때, 여후의 동생 여택만이 완전한 편제의 부대를 보존하여, 유방이 위기를 넘기도록 도와준다. 여택과 그의 부하장수 정복등 3사람이 후로 봉해진다. 여후의 매부인 번쾌는 더더구나 유방의 간장이다. 그러므로 외척의 세력이 강대했다고 할 수 있다.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 한신,팽월등 공신을 죽이는 것을 포함해서, 여후가 적지 않은 일을 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팽월이 모반으로 고발된 후, 유방은 사신을 보내어 팽월을 체포하고, 낙양에 구금한다. 나중에 팽월은 유방에 의하여 서인으로 강등되어 촉군 청의(지금의 사천성 노산)로 귀양간다. 촉군으로 가는 길에, 팽월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돌아오는 여후와 만난다. 그는 여후에게 자신은 무죄임을 호소하고, 고향인 창읍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여후는 그러겠다고 응락하고, 그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온다. 낙양에 돌아온 후, 여후는 유방에게 말한다. 팽월은 장사인데, 그를 촉으로 유배보내는 것은 후환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빨리 죽여버려야 한다. 내가 이미 데려왔다고 말한다. 여후는 사람을 시켜 팽월이 계속 모반했다고 고발하게 하고는 마지막에 팽월의 삼족을 멸해버린다. 팽월 본인도 육장이 된다. 유방은 아주 잔인하게도 그 육장으로 완자를 만들어 공신들에게 보내어 강제로 먹게 만든다. 이를 통해서 공신들에게 모반하지 말라고 겁을 준 것이다.
유방이 황제를 칭하기 전에, 오랫동안 바깥에서 전쟁을 했고, 여후는 독수공방한다. 시간이 길어지자 적막을 느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심이기와 애매한 관계였다고 한다. 여후가 조정을 좌지우지한 후, 역이기는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이 되고, 관직이 승상에 이른다. 나중에는 유방의 또 다른 아들 유장에게 피살된다.
2. 척희(戚姬)
유방이 한왕(漢王)이던 시절, 척씨정의 정도(定陶)여인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를 아주 총애한다. 전투에 나갈 때면 그녀를 데리고 나가고, 여후는 남겨두었다. 척희는 매일 밤 유방과 함께 한다. 유방은 여러번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한다. 여후의 동생이며, 효혜제의 외숙인 건성후 여석이 급히 장량에게 계책을 청하고, 장량의 아이디어로 효혜제는 유방이 가장 보고싶어하던 4명의 은거명사 '상산사호'를 모셔오게 해서, 효혜제의 태자지위를 보전한다. 그러나, 여치와 척희는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된다. 유방이 죽은 후, 여치는 사람을 시켜 척희의 손,발을 자르고 척희의 눈을 파내고, 척히의 귀를 멀게 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약주를 먹여 척희가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척희를 변소안에 넣게 하고는 '인치'라고 이름붙인다.
3. 박희, 관부인 및 조자아.
유방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 유항(나중의 한문제)의 모친인 박희가 포로로 잡힌다. 포로의 신분으로 유방의 후궁중 한 명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유방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박희에게는 두 언니가 있었다: 관부인과 조자아. 당시 3명은 서로 약속했다. 누구든지 유방의 총애를 받게 되면 절대로 다른 두 사람을 잊지 않기로. 그 결과 관부인과 조자아가 먼저 총애를 받는다. 한번은 유방의 앞에서 이 이야기를 우스개로 하자, 유방이 그 말을 듣고 연민을 느껴 박희를 불러오게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유항을 임심하였지만, 그 후에도 박희는 유방을 거의 보지 못한다. 누가 생각했으랴. 이것때문에 여후가 전권을 휘두를 때도 박희는 아무를 피해를 입지 않고 평안무사할 수 있었다.
4. 장오의 미인
그녀는 원래 조왕 장오의 미인이었다. 유방이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오가 유방에게 바친 여인이다. 그녀는 그후 유방의 아이를 가진다. 장오는 왕궁의 바깥에 그녀를 위하여 단독으로 집을 짓고 사람을 보내어 돌봐주었다. 나중에 장오가 모반으로 고발을 당하자, 이 미인도 연루되어 붙잡힌다. 미인은 옥리에게 자신이 유방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유방은 장오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 미인은 다시 심이기를 찾아서 그를 통해 여후에게 잘 말해달라고 한다. 여후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질투가 나서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미인은 유장을 낳은 후 자살한다.
5. 조씨
<사기.제도혜왕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제도혜왕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서자이다. 그의 모친은 외부(外婦, 궁밖의 여인)으로 조씨라고 한다. 한고조 6년, 유비가 제왕이 되어 칠십성의 봉록을 받는다. 백성들 중에서 제나라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제왕에게 준다. 여씨의 반란을 평정한 후, 어떤 사람은 제왕을 황제로 삼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제왕의 외가인 사씨(駟氏)등이 너무 강대하다고 생각하여 추진하지 않는다.
6. 만석군의 누나
<사기.만석장숙열전>에 따르면, 만석군의 본명은 만석분(萬石奮)이고, 원래 조나라 사람이다. 조나라가 멸망한 후, 회주로 간다. 유방이 항우와 교전할 때, 회주를 지난다. 15살된 만석분은 유방의 시중을 들게 보내어진다. 유방이 그와 얘기하면서, 만석분이 자신을 매우 공경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래서 너희 집에 누가 또 있느냐고 물어본다. 만석분은 "모친이 있는데, 불행히 실명했습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합니다. 그리고 누님이 한 분 있습니다." 유방은 만석분에게 자신을 따르겠느냐고 묻고는 따르겠다고 하자, 만석분의 누나를 데려오게 한다. 그리고 '미인'으로 봉한다. 얼마후 만석군의 일가는 장안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이 미녀가 자녀를 두었는지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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