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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과 여후(呂后): 명쟁암투(明爭暗鬪)의 일생

by 중은우시 2011. 2. 3.

글: 진령신(陳令申)

 

진(秦)나라 말기, 통치는 가혹했고, 백성들은 모두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때 패현(沛縣)에는 이런 인물이 있었다. 하루종일 백수건달로 지내면서, 한 무리의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려 놀았고, 제대로된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루는 현령이 집안에서 귀한 손님을 모셔서 연회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석하러 간다. 문앞에서 사람이 가로막았다. 원래 현령은 예물이 1천냥이 넘는 사람만 내당으로 들여보내라고 말했는데, 그 자는 한 푼도 주머니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안을 향해서 소리쳤다: "사수정장 유방, 예물로 1만냥이요." 곁에 있던 사람은 그 말을 듣고는 차갑게 웃었다: "유계(劉季, 어릴 때 유방은 이렇게 불리었다). 저 자가 다시 허풍을 치는군." 그런데 누구도 생각지 못했지만, 유방은 허풍을 치다가 바로 이 해에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내당(內堂)의 여공(呂公)은 누가 1만냥의 예물을 내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급히 문을 열고 마중하러 나왔다. 그는 유방을 보고는 즉시 유방의 비범한 용모에 깜짝 놀란다. 그리고 즉시 그를 내당으로 청한다. 두 사람은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날 때까지 마신 후에, 여공이 유방에게 말한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관상을 볼 줄 알았다. 내가 그대의 관상을 보니 귀하기 그지없다. 나에게 딸이 있는데, 그대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유방은 그 말을 듣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즉시 승락한다. 얼마후 여공의 큰 딸인 여치(呂雉)가 유씨집안으로 시집온다. 이때부터 유방과 여후의 이후 수십년에 걸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아름다우면서 명문출신인 여치는 나이도 많고, 명성도 좋지 않은 유방에게 시집을 갔다. 이는 당시 패현에서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여치의 마음이 어떠했든 간에 그녀는 이 결혼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후에 비교적 잘 살았고, 곧 아들, 딸을 하나씩 낳는다.

 

기원전209년, 진승, 오광이 대택향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삽시간에 온세상으로 퍼져나가 천하는 대란에 빠진다. 어지러운 국면은 유방과 같은 초개영웅에게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소하, 조참과 함께 패현현령을 죽이고, 그 자신이 반진(反秦)의 거병을 일으킨다. 유방이 거사할 때, 여치는 적극 협력하고, 그를 위하여 여론조작까지 한다. 유방은 죄를 지어 망탕산에 은거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여치가 그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여치는 그때마다 유방이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는 찾아갔다. 유방이 놀라서 묻물었다: "내가 매번 숨이있는 곳이 달랐는데, 너는 어쩧게 찾아냈느냐?" 여치가 말한다: "부군이 있는 곳에는 위에 항상 구름기운이 있습니다. 나는 매번 구름기운을 따라가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 부부간의 대화가 밖으로 흘러나가서 삽시간에 퍼져간다. 많은 살마들이 유방이야말로 진룡천자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속속 그의 휘하에 투신한다.

 

삼년간의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여치는 자신의 남편 곁을 따라다닌다. 부부간의 협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기원전 206년, 유방은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점령한다. 승리에 눈이 먼 유방은 항우가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팽성에서 술과 여자와 함께 보내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항우는 제나라의 전선에서 비밀리에 3만의 기병을 이끌고 팽성으로 되돌아온다. 유방의 군대는 어쩔줄을 모른다. 놀라서 정신이 없던 유방은 죽어라 서쪽으로 도망쳐서, 요행히 살아남는다. 그러나, 여후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초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그후 몇년간 유방과 항우는 형양, 성고의 일선에서 대치하고, 전투는 아주 참혹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여치는아침 저녁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생활을 견딘다. 그녀가 받은 치욕과 공포는 한 마디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몇년으 전투가 끝나고 초,한 모두 손실이 중대했고, 평화협상을 하여, 홍구(鴻溝)를 경계로 하여 천하를 나누기로 한다. 구사일생으로 여치는 풀려나서 살아온다. 그러나, 그녀는 유방의 곁으로 돌아오고나서야 비로소, 이미 그녀의 위치는 척희(戚姬)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방은 척희와의 사이에 여의(如意)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여치는 마음 속으로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유방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그리하여 후방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초한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치는 거의 유방을 만나지 못한다. 그녀는 완전히 냉대를 당한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그녀와 유방의 관계는 부부에서 단순한 정치적 동맹자로 변화된다. 그들간에는 더 이상 애정은 없고, 그저 이익만 있을 뿐이었다.

 

한나라가 건립된 후, 유방이 황제에 오른다. 여치는 황후가 된다. 그들간의 아들 유영(劉盈)은 태자가 된다. 그러나, 유방은 마음 속으로 유약한 유영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척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인 여의는 그의 마음에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유방은 여러번 유영을 태자에서 폐하고 유여의를 세우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후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유방이 그의 남편이지만, 그녀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이면, 그녀는 그냥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간의 명쟁암투는 태자의 폐립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된다.

 

여치는 성격이 강했고, 심기가 깊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태자자리를 지키려면, 반드시 공신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개국공신들이 태자를 보호하도록 만들었다. 한번은, 유방이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푸는데, 태자도 자리에 있었다. 유방은 태자의 뒤에 4명의 학발동안의 노인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물어본다. 4명이 이름을 밝히자 유방은 크게 놀란다. 원래 이 4명의 노인은 유방이 여러번 모시려고 했지만 모실 수 없었던 천하의 명사인 상산사호(商山四皓)였던 것이다. 사실 여후는 장량의 건의를 받아서, 태자로 하여금 친히 모셔오게 한 손님들이었다. 유방은 이를 보고는 태자의 세력이 이미 튼튼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 태자의 폐립을 둘러싼 다툼에서는 여후가 완승을 거둔다.

 

기원전195년, 유방은 옛상처가 도져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진다. 여후는 유방에게 후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유방은 처를 바라고보는 마음 속으로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이후 한나라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몇 마디 당부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승상은 고굉대신이다. 만일 그가 죽으면 조참이 승상의 자리를 이어받으면 된다; 조참이 죽으면, 진평에게 승상을 맡기면 된다. 그러나 진평의 재능으로는 전체국면을 총괄하기는 힘드니, 주발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해야 한다. 주발은 무인이지만, 유씨 한나라를 안정시킬 사람은 분명히 그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여후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이후의 일은 네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을 마치고 유방은 죽는다. 며칠 후 태자 유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한혜제이다.

 

유방은 비록 죽었지만, 여후와 그간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씨권력장악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후는 유씨성의 여러 왕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쫓아낸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유영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자, 역시 용서하지 않았다. 유영은 몇년간 우울하게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여후는 임조칭제하여 대권을 장악한다. 비록 여전히 태후라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군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여후를 제왕의 사적을 기록하는 본기(本紀)에 기록했다.

 

자신의 남편이 일찌기 앉았던 용상에 앉았으니, 여후는 분명히 통쾌했을 것이다. 여러해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서 쌓여있던 울분을 모조리 토해내게 된다. 그녀는 남편이 앉았던 용상에 앉고자 했을 뿐아니라, 천하를 여씨(呂氏) 천하로 바꾸고자 하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녀는 자신의 여씨일족을 왕(王)에 봉한다. 대신들의 의견을 묻자, 우승상 왕릉(王陵)은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예전에 유방이 여러 신하들과 맹세했던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삼지 않고, 공로가 없으면 후로 삼지 않는다(非劉不王, 非功不侯)"는 백마맹약(白馬盟約)을 가지고 여후에 대항한다. 그러나 좌승상 진평과 주발은 "지금은 태후가 칭제하고 있으니, 여씨들이 왕이 되어도 안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여 여후의 편을 든다.

 

얼마후 여후는 왕릉을 우승상에서 면직시키고, 아무런 실권이 없는 태부(太傅)로 삼는다. 그후 여씨들을 왕과 후에 대거 봉한다.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아무도 여후의 뜻에 거슬릴 수 없었다. 여후는 속으로 웃었다: "유계, 네가 전에 진평, 주발 두 사람이 유씨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들이 가장 먼저 내 편으로 넘어왔다. 너희 유씨강산은 앞으로 여씨강산으로 바뀔 것이다." 여씨들을 대거 왕과 후에 봉하는 동시에, 여후는 유씨성의 왕들을 살륙하는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유방의 아들들은 여후가 양육해서 기른 회남왕 유장과 멀리 변경에 가 있던 대왕 유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조리 피살당한다. 유방의 카드는 모조리 사라진 것같았다.

 

기원전180년, 여후의 병세가 위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한나라를 찬탈하려는 대업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에 임박하여, 조왕 여록과 여왕 여산을 불러 반드시 금군(禁軍)을 확실히 장악하라고 당부하고, 경성을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녀가 죽더라도 그녀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한다. 여후는 그 말을 마치고 죽었다. 여록과 여산은 여후의 유언을 따랐고, 한나라의 강산은 여전히 여씨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두 당사자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찌기 여후에게 붙어있던 진평과 주발은 그녀가 죽자, 행동을 시작한다. 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진평, 주발 두 사람은 여록과 관계가 밀접한 역기(酈寄)의 부친을 납치한다. 역기를 협박하여 여록에게 군권을 내놓게 설득하게 한다. 마침 여록은 이때 제왕을 위하여 출병을 하는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조정의 장수들 중에서 아무도 여씨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기는 이 기회에 여록에게 군권을 내놓고 자신의 봉지로 돌아가도록 설득한다. 그렇데 되면 대신들도 그에게 반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머리가 단순한 여록은 그의 말을 믿고는 병부(兵符)를 주발에게 내놓는다. 주발은 병부를 가지고 즉시 북군(北軍)으로 가서, 군대를 황성으로 진입시키고, 여러 여씨들을 체포한다.

 

황성내에, 여전히 남군(南軍)을 통솔하던 여산은 이를 듣고는 즉시 병력을 이끌고 황궁으로 진입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다행히 진평은 이를 예상하여, 일찌감치 사람을 보내어 궁문을 지킨다. 그리하여 여산은 황성으로 진입하지를 못했다. 이때, 선부부대를 이끌고 경성에 진입한 주허후 유장은 궁으로 들어와 황제를 보호하며, 여산을 죽이고 국면을 안정시킨다. 그후 주발등은 다시 여록을 죽이고, 여씨일족을 죽여서, 여씨반란을 제압한다. 유방의 예전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기원전180년 10월, 진평, 주발등은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에 이르러, 유방과 여후간의 수십년에 걸친 명쟁암투가 끝났다. 그 결과는 유방이 여후의 모든 카드를 이기고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