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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 균형은 정권안정의 기본이다

by 중은우시 2010. 8. 30.

글: 왕립군(王立群)

 

유방이 한나라를 건립한 후, 중앙정부에는 3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먼저, 유방을 우두머리로 하는 '황족파'이다. 이는 서한정권의 핵심이다. 이 파에는 유방의 8명의 황자, 약간의 황손, 황족중 기타 인원이 포함된다. 그들은 서한황권의 중견역량이다. 이 파의 우두머리는 황족파의 정치강자인 유방이다. 유방은 진나라말기 의거를 일으켜 황제에까지 오르는데 8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중국역사상 첫번째 평민황제일 뿐아니라, 평민에서 황제로의 신분전환에 가장 단기간이 소요된 황제이기도 하다.

다음은, 공신파이다. 유방은 포의천자(布衣天子)이다. 그를 따라 천하를 얻는데는 한 무리의 문신, 무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2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공로로 인하여 왕(王)에 봉해진 제후왕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왕에 봉해지지 않은 공신들이다. 전자는 유방의 중앙정권을 위협했다. 특히 유방이후의 여후의 집권에 위협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방, 여후에 의하여 차례로 주살된다. 왕에 봉해지지 않은 공신도 한 무리이다. 그들은 서한초기 중앙정권의 핵심역량이었다. 유방은 이들 공신을 아주 중시했다. 서한중앙정부에서 권력이 가장 큰 상국(相國)은 역대이래로 공신파에서 장악했다. 소하로부터, 조참, 왕릉, 진평, 주발, 관영에 이르기까지. 한문제말기에 공신파의 세력이 약화된 이후에 비로소 다른 관리들이 점차 맡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외척파이다. 제국시대에 황후제도와 비빈제도가 존재했고, 황후와 비빈의 친정집안은 어느 정도 중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국시대의 외척을 이룬다. 여후가 정권을 농단한 8년간은 외척파의 세력이 가장 강대한 시기였다.

 

유방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유방 본인이 정치적 강자이고, 외척파는 아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유방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척부인도 강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여후의 일족은 비록 지위는 혁혁하였으나, 여후가 유방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씨종족은 서한정권중 실력이 강대한 일파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방이 살아있을 때는 황족파, 공신파, 외척파의 3파가 비교적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한정권은 안정을 유지한다.

 

유방이 사망한 후, 여후는 공신파의 세력이 강대해질 것을 우려하여, 유방이 비불상장(秘不喪葬, 죽은 사실을 감추고 장례를 치르지 않음)하면서 공신파를 주살함으로써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역상(商)이 알고는 그 이해득실을 상세히 설명하여 여후는 현실을 고려하여, 이런 황당한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여후는 공신파의 역량을 약화시킴으로써 정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고, 이로 인하여 여후는 공신파로부터 극도의 반감을 사게 된다.

 

공신파는 서한정권의 초석이다. 이 초석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결국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유방은 부황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수성지군과는 달리, 개국황제였다. 천하를 스스로 차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일개평민에서 천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찌기 평민일 때의 친구들은 그를 따라서 진나라에 반란을 같이 일으키고, 그와 함께 항우를 몰아내고, 이성 제후왕들을 몰아내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유방이 의거를 일으킨 후 서로 다른 시기에 유방집단에 가담했다. 일부는 풍읍에서 의거를 일으킬 때 가담했고, 어떤 사람은 패현에서 기병할 때 가담했으며, 어떤 사람은 동관을 넘어 진나라로 쳐들어갈 때 가담했고, 어떤 사람은 초한전쟁때 유방집단에 가담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보다 이후에 가담했다. 그들은 유방을 따르면서 인생을 탈바꿈했다. 이같이 전공이 혁혁한 사람들은 서한정권에서 아주 강력한 한 세력을 이룬다. 이들은 신흥계층으로, 사람수도 많고, 공로도 컸다. 그리하여 한나라초기 3개의 파벌중에서 기초가 가장 튼튼했다고 할 수 있다.

 

황족파는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일파이다. 그들은 수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신분이 특수하다. 바로 이런 특수한 신분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의 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여후가 삼조왕(三趙王)을 주살한 것은 바로 그들이 유방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황족파의 중견역량이기 때문이고, 황제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외척파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여후는 피비린내나는 수단으로 황자를 살해한다. 유방의 8명의 황자들 중에서 여후와 직접 간적으로 관련있는 사망자는 5명에 이른다.(제왕 유비, 혜제 유영, 3명의 조왕). 황칠자 유장이 여후의 양육의 정으로 인하여 죽음을 면한 외에, 황사자 유항은 성공적으로 여러해동안 잠복한다. 이렇게 하여 여후와 진평, 주발을 포함한 모든 공신파대신을 속여넘긴다. 만일 잠복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대왕 유항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씨외척파에서도 유방을 따라 천하를 얻는데 공로를 세운 공신이 적지 않다. 그들은 전공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공신파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구별이 되는 부분은 여후가 최고통치권을 빼앗은 후 유씨성의 황자,황손을 마구 죽이고, 여러 여씨를 왕에 봉하며, 강제로 여씨여성과 유씨황족간의 결혼을 밀어부치면서 이를 유씨성의 황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방식은 유방의 '백마맹세'에 어긋난다. 유씨성황족과 공신파의 강력한 반항에 부닥친다. 여후의 생전에는 여후가 정치적 강자였으므로, 이런 반발은 숨어있는 단계였지만, 일단 여후가 사망하자, 유씨황족과 공신파가 즉시 힘을 합쳐서, 신속히 여씨들을 주살해버린다. 이리하여 여씨외척파는 멸족된다.

 

중국고대정권의 안정방식은 아주 복잡하다. 각 파벌간의 균형유지는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방식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