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완부(王宛夫)
최근의 공자일생에 대한 글로 인하여 다시한번 고대의 혼인풍속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사마천은 <<사기.공자세가>>에서 “(숙량)흘이 안씨(顔氏) 여자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즉, 당시 나이가 60여세인 공자의 부친 숙량흘이 교외에서 안씨여자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녀와 야합하여, 공자를 임신하여 낳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사실을 엄격하게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고, 신뢰도가 높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가 유가의 창시자이므로 유고가 봉건통치자들에게 숭상받을 것이라는 점은 고려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공자에 대하여 쓴 기록은 나중의 후세인들에게 골치거리를 남겨주었다. 후세인들이 ‘성인’ ‘소왕(素王)’으로 떠받들고, “하늘이 중니(공자)를 낳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기나긴 밤중같았을 것이다(天不生仲尼萬古如長夜)”라고 할 정도로 당당한 성인 공자가 어찌 야합으로 태어난단 말인가? 그 자신이 바로 부친의 윤리도덕에 어긋난 행위로 인하여 출생하였으면서, 어찌 후세인들에게 윤리도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혼인풍속에 대하여 연구하였고, ‘야합’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이 고증하기도 하였다. 당나라에 이르러, 소사마(小司馬)로 불리던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야합’이라는 것은 숙량흘이 나이가 들어서 나이어린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야합이라고 한 것이며,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들판에서 교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견강부회적인 해석이다. 그렇다면 역대제왕은 나이가 들어서 젊은 여자들을 취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모두 야합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고대의 야합풍속은 현재처럼 사람들이 멸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오히려 길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것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묘전, 암화, 회화, 조각등에서 야합도를 많이 그린 것이다. 야합의 풍습은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공자가 처한 시기에는 남자들이 집안의 주인이고, 매번 달밝은 밤이면 많은 남녀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 당시에 야합은 현재처럼 남이 알까 두려워서 몰래 하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진나라에 이르러 로소 혼인과 관련된 율령이 반포되고, 야합의 풍속이 점차 바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자연도태의 진화론적 입장에서 인류의 번성을 보자면, 필자는 공자가 ‘들판에서 교합’으로 출생하였다는 것을 믿는 편이다. 단순히 예절에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육십이 된 남자는 이십여세의 청년과 구분된다. 감옥에서 막 나온 만델라 대통령이 이십년전의 그와 다른 사람이듯이. 예전의 모험심과 조급함은 세월의 절차탁마를 거쳐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성숙한 지혜와 인자한 마음이다. 역사를 뒤적여보면, 많은 위인들 특히 어진 정치를 베푼 사상가들은 집안에서 장남이 아닌 경우가 많다. 부모가 중년이후에 얻은 아들인 경우라는 것이다.
생리적으로 야합은 부친의 신체가 건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야외에 나가서 갑자기 충동이 일었다는 것이니, 체내에 종족번식의 본능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야합으로 태어난 아이는 대부분 집안에서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건강하고 총명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생부가 중년의 성숙한 남자이면서 야합으로 태어났다면, 아이는 건강하고 총명할 뿐아니라, 마음도 돈후할 것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 중에 공자처럼 인애사상을 핵삼으로 하는 유가의 창시자도 있다. 이는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인 법칙에 부합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도 모친이 합법적인 부친과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 아니다. 모친과 혼인관계가 없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보자면, 중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야합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후세인들이 이것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윗사람의 허물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얽매어서 사실을 왜곡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민간의 야합풍속은 진나라때 법률이 나왔지만, 금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시골의 교외나 산과 들에서 남녀간의 성행위를 하는 것은 금지하기 어려웠고, 야합은 오래된 풍속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필자의 장편소설 <<종(種)>>은 절강서부지역의 민속문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 안에는 여러군데 야합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일하는 백성들은 야외에서 오랫동안 노동에 종사하므로,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게 되면, 굳이 혼인여부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부부간이건 혹은 부부간이 아니든 눈이 맞으면 숲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깔고 사랑을 나누면 된다. 외인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하여 민간에는 한가지 풍속이 있다. 즉, 야합전에 바깥의 교차로에 나뭇가지를 끼워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이다. 이를 “삽청(揷靑)”이라고 한다. ‘삽청’을 하였는데도 사람이 들어와서 방해를 한다면, 야합자는 좋은 일을 망친데 대하여 화를 내고 보복을 할 수 있다. 화살을 쏠 수도 있고, 도끼를 휘두를 수도 있다. 당연히 야합을 방해한 사람도 많은 경우는 잘모르고 들어간 경우일 수 있다.
소설 <<종>>에는 민간의 차종(借種)풍속도 대량 언급하고 있다. 주인공은 튼튼한 노총각으로 차종전문가이다. 그는 엄주지역의 많은 부녀들에게 씨를 빌려주었다. 주로는 3가지 방식이다. 첫째는 집으로 가서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람씨를 심는다. 사명을 완수하면 집에서 쫓겨난다. 둘째는 절에서 중이 되는 것이다. 절에서 머물면서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신도들에게 씨를 빌려준다. 셋째는 묘회(廟會)때 ‘간향두(赶香頭)’ 하는 것이다. 간향두라 함은 묘회에 참석하여 향불을 사르는 여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뒤쫓아가서 골목길 같은 곳에 숨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세가지 차종방식은 모두 야합이라고 할 수 있다.
낮에는 곡식의 씨를 뿌리고, 밤에는 사람의 씨를 뿌린다. 수천년내로 부지런한 남자들이 대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중요한 임무였다. 자식은 대를 잇는 것뿐아니라, 양노를 책임졌다. 민간에서는 친자손이 아니라고 배척하지 않고, 후손이 없을까봐 오히려 고민을 했다. 자신이 늙어서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지역에서 차종풍속은 용인되었다. 어느 집의 자식이 차종으로 얻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고, 그 비밀은 지켜주었다. 그것이 원수의 집안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람으로서의 최고수양이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공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강 구주(衢州): 공자후손의 남천(南遷) (0) | 2012.01.23 |
---|---|
공자탄신일은 9월 28일인가? (0) | 2011.09.28 |
소위 "공자후손"은 모조리 가짜이다 (0) | 2010.02.12 |
공자의 제자들은 왜 공자의 스캔들을 기록으로 남겼는가? (0) | 2009.10.08 |
공자(孔子)에 대한 역사상 10가지 이미지 (II) (0) | 2008.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