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계신도(易界神刀)
진시황의 전공은 혁셕할 뿐아니라 놀라울 정도이다. 진시황17년부터 26년까지의 10년동안 육국을 차례로 멸망시킨다. 그러나, 그 공로는 거의 대부분 왕전(王翦) 부자가 만든 것이다.
연대 |
멸망시킨 국가 |
지휘관 |
17년 |
한(韓) |
내사등(內史騰) |
19년 |
조(趙) |
왕전, 강외(羌瘣) |
22년 |
위(魏) |
왕분(王賁) |
24년 |
초(楚) |
왕전 |
25년 |
연(燕) |
왕분 |
26년 |
제(齊) |
왕분 |
왕분은 왕전의 아들이다. 여기에 왕전의 손자인 왕리(王離)까지 합하면 이 빈양 왕씨(頻陽王氏)는 3대에 걸쳐 명장을 배출한다. 진시황이 무력으로 성공한 반이상은 바로 이 왕씨 3대자손에 의존한 것이다. 그중 전공이 가장 큰 것은 왕전이 초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기. 왕전전>에는 아주 재미있게 기록하고 잇다.
"진시황은 진(晋, 여기서는 韓,趙,魏를 합칭한 것)을 멸하고, 연왕을 쫓아냈다. 그리고 여러번 형사(荊師)를 격파한다. 진나라장수 이신(李信)은 나이가 젊고 용맹했다. 일찌기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연태자단을 연수까지 추격한 적이 있고, 마침내 태자단을 격파할 수 있었다. 진시황은 그가 현명하며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시황이 이신에게 묻는다: "내가 형(荊, 초나라를 가리킴)을 공격하여 취하려는데, 장군은 얼마의 사람이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하는가?" 이신이 대답한다: "20만 정도면 될 것입니다." 진시황이 왕전에게 묻는다. 왕전은 대답한다: '육십만이 아니면 안됩니다." 시황이 말한다: "왕장군은 늙었군요. 겁내는 것이군요. 이장군은 과연 젊고 용맹하니 그의 말이 맞다." 그리하여 이신과 몽염에게 이십만을 이끌고 남으로 형주를 정벌하게 한다. 왕전은 말을 듣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인 빈양으로 돌아간다."
이신, 몽염은 양로로 나누어 진공한다. 처음에는 연전연승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초나라군대에 대패한다. 일곱 도위가 전사하고, 진나라병사들을 패주한다. 소식이 전해지자, 진시황은 대노한다. 친히 말을 타고 빈양으로 가서 왕전에게 사죄한다. 그에게 방법을 생각해봐달라고 한다. 그는 말한다.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서 이신이 진나라군대를 욕되게 하였다. 이제 형주의 병사들이 날로 서쪽으로 진격해오고 있다고 하는데, 장군이 병이 들었다고는 하나 어찌 과인을 차마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상황이 조급해서 거의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지경에 이른다. 확실히 이때 왕전이 없다면, 초군은 승세를 틈타 진격해올 것이고, 다른 오국은 이미 망했건 망하지 않았건 모두 호응할 것이다. 그러면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꿈은 아마도 모조리 무너져 버릴 것이다. 왕전은 결국 출산한다. 그는 여전히 육십만을 요구한다. 진시황은 할 수 없이 그의 요구를 응락한다. 왕전과 진시황은 모두 대단한 연기자들이다. 왕전이 출정할 때, 진시황은 친히 패상으로 가서 환송한다. 왕전은 그 자리에서 많은 전답을 요구한다. 시황이 말한다: "노장군, 그냥 떠나라. 설마 가난뱅이가 될까 두려운 것인가?" 왕전이 말한다: "이번 출정은 공로가 있더라도 제후에 봉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손을 위하여 약간의 재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크게 웃는다. 왕전이 동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시 사람을 5팀이나 보내어 전답을 요구한다. 왕전의 부하는 이렇게 하는 것은 거의 황제를 협박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왕전이 이때 대답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아니다. 진왕은 거칠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장병을 모조리 나에게 맡겼는데, 내가 전답을 더 많이 달라고 하여 자손들의 재산을 가지지 않으면, 진시황은 나를 의심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왕전의 마음씀씀이가 아주 주도면밀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진시황의 성격도 알 수 있고, 당시 진,초간의 일전은 서로간에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왕전이 이번에 가서도 초나라에 패배한다면, 진나라는 멸망할 수도 있다. 다행히 왕전 이 노장군은 어땠든 백전노장이었고, 그는 그렇게 많은 대병을 그너렸지만, 그는 보루를 높이 쌓고 지키는 전술을 쓴다. 초나라장군이 병력을 퇴각시킨 이후 그는 추격한다. 여기서는 경제전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런 전술은 충분한 양식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왕전은 성공했다. 이를 보면 그는 후방의 조달을 잘 해냈다고 볼 수 있다. 초나라장수가 퇴각한 것은 분명히 군량이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의 추격을 받아 대패하고는 더 이상 힘을 회복하지 못한다. 왕전은 다시 병력을 나누어 제, 연을 공격하고, 남으로 백월을 공격한다. 중국의 국면은 마침내 통일된 것이다.
왕전의 전공은 아주 휘황찬란하다. 진시황은 어쨌든 남다른 면이 있다. 우리는 진시황이 자부심이 넘쳤지만 한번도 스스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한번도 병력을 이끌고 나간 적이 없다. 그는 비록 '거칠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지만' 상황이 급박하면 그는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에게 자신을 숙일 줄도 알았다. 무력으로 정목하는데서 이것은 그를 성공하게 만든 요소이다. 육국, 백월에 대하여 그는 전력으로 왕전을 신뢰한다. 흉노에 대하여는 마찬가지로 몽염을 신뢰한다. 그래서 그는 군사적으로 확실히 성공한다. 그는 군사적으로 인재를 믿었으므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완전히 독재함으로써 그는 실패한다. 만일 정치적으로 여불위를 완전히 믿고, 그가 원래 생각한 노선을 걸어갔다면, 진나라의 이후 역사는 아마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기실 여불위는 용병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책에는 용병의 공능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방의 오랑캐를 정복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을 진시황은 일부분만 실현한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잘못된 것이었다.
남월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 것은 25년부터 33년까지이다. 이는 무력상의 성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성공의 절반이상은 초나라사람들의 공로이다. 초나라는 동주,서주 팔백년간 남부중국을 평화롭게 경영하여 이미 남부중국은 절반쯤 한족화한다. 진나라가 무력으로 정복한 것은 시간은 앞당겼지만 여러가지 장애가 나타난다. 그리고 나중에 망국의 요인이 된다.
"진나라는 도휴에게 월을 치게 한다. 월나라사람들은 깊은 산 속 밀림 속으로 숨어들어가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오래 흐르자, 월나라사람들이 나와서 공격한다. 진병은 대패한다."
도휴의 출격은 33년의 정벌을 말한다. 이때 확실히 월인들의 유격전술에 대패한다. 그리고 대군을 원정보내다보니 백성들도 힘들고 국고도 줄어든다. 그리고 국내에 군사가 별로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명백히 알 수 있다. 진나라사람들의 병력사용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이다. 남부중국이 이후 철저히 한화한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이것은 진시황식의 무력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흉노토벌은 32년이다. 이것은 현재 세계에 이름을 날린 '만리장성'을 만들게 한다. 북방에 병력을 출동시키는 것과 남방에 병력을 출동시키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북쪽은 방어적인 반격이고, 남쪽은 공격적인 경략이다. 북방의 유목민족은 은나라때부터 자주 중국을 침략한다. 진시황의 북진은 조무령왕 및 조나라장수 이목, 연나라장수 진개등과 마찬가지로, 침략에 항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가 채택한 전체 전략은 남쪽은 진격하고 북쪽은 지키는 것이다. 남쪽을 정벌하는데 오십만을 썼고, 북쪽을 지키는데 삼십만을 썼다. 이 병력의 차이는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나라의 주력은 남정에 쓰인다. 만리장성을 완성하면서 북방은 수세를 유지한다. 특히 남북의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되었다. 진나라통치가 무너진 것은 이로 말미암아 가속된다.
진나라사람들은 전공을 중시한다. 장수의 지위가 재상의 지위보다 앞섰다. 진나라대 비록 군현제를 하고 있었지만, 제후를 봉하는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시 최고위직에 있던 왕전은 전공이 불가일세이다. 병력을 잘 이끄는 외에 정치적으로는 식견이 없었다. 사마천은 왕전을 이렇게 비판한다:
"왕전은 진나라장수이고 육국을 평정했다. 당시에 왕전은 숙장이고 진시황이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러나 진나라를 도와서 덕을 건립하지 못하고, 근본을 공고히 하지 못했다. 황제의 뜻에 영합하였고, 결국은 자신의 몸을 망친다."
이런 비판은 지금 보더라도 가혹하지는 않다. 사마천의 견해는 여불위와 일치한다. 이를 보면, 진시황과 여불위는 사상에서나 정견에서 모두 대립되는 국면을 취했다. 이렇게 거대한 의견차이는 그들의 관계가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왜 이렇게 크게 차이나게 된 것일까? 기실 이것은 두 사람의 감정상 대립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상, 두 가지 서로 다른 시대의 대립이다. 주, 진나라때는 중국역사상 전환기이다. 이는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바뀌는 시기치다. 은, 주는 노예제 사회였다. 춘추시대 중엽이후 노예는 점차 자유를 얻고, 이전의 노예주는 대부분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상실하고, 영락한다. 사회계층에서 상하가 교류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진나라말기 한나라초기에는 더더욱 이런 현상이 많아졌다. 사회는 철저히 질적인 변화를 겪는 것이다. 여불위는 봉건사상의 대표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여전히 노예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진시황은 육국을 멸망시키고 통일한 이후, 육국의 노예주와 이미 해방된 인민을 모조리 노예로 삼는다.
그외에 노예제가 봉건제로 전이하는 것은 예서의 보급이 하나의 표지라 할 수 있다. 노예가 쓰는 간편한 자체가 한나라때는 더욱 일반화된다. 성씨의 혼동과 보급도 하나의 표지이다. 고대에 여자는 성이 있고, 남자는 씨가 있었다. 춘추시대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성씨가 구분되지 않고, 남자는 씨를 성으로 삼고, 성이 있는 사람은 귀족이었다. 그래서 고대에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실 귀족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민은 원래 성씨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연간에, 서인들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성씨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진승, 오광의 성인 진, 오는 비록 "어려서 자주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밭을 갈았지만" 이라는 것을 보면 이미 해방된 자유인이다. 그러나 진시황시기에는 노예로 되었다. 즉 진시황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한 것이다. 손중산의 말은 아주 잘했다: "역사의 조류는 호호탕탕하다. 따르는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진시황 시대에 표면적으로 보면 노예제의 대역전이다. 그러나 이때의 노예제는 그저 회광반조일 뿐이다. 이후의 봉건제와 비교하여 말한다면, 물이 비등점에 도달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진정되는 것과 비슿하다. 그러나, 그 진정된 겉모습의 아래에는 더욱 맹렬한 충격과 전복이 숨어 있다.
과연, 진시황이 죽자, 1년도 되지 않아, 천하는 들끓는다. 진시황이 창건한 개세무공은 돌연 와해되고, 연기나 구름처럼 흩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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