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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골군대의 최대 난적은 남송(南宋)이었다

by 중은우시 2012. 1. 17.

글: 유계흥(劉繼興)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은 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가이다. 그의 몽골군단은 지구상 최강의 정복자이다. 징기스칸의 말채찍이 도달하는 곳이면, 말발굽이 도달하는 곳이면 모두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말도 탈줄 모르고 신체도 유약한 한인(漢人)을 줄곧 멸시했다. 그는 남송을 상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막 거병했을 때, 그는 금나라를 최강의 적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나라군대는 그를 실망시켰다. 중원에서 백년간에 걸친 호사스러운 생활은 일찌기 용맹했던 여진족의 기풍을 모졸 갉아먹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은 금나라의 중도를 점령했고, 금나라사람들은 몽골에 공물을 바치고 칭신했다. 그후 제1차 서정에서도 징기스칸은 적수를 만나지 못하나. 그저 서하를 점령할 때의 영주대전에서 비로소 서하의 주력군으로부터 그럴듯한 저항을 받았을 뿐이다.

 

역사는 왕왕 아이러니하다. 징기스칸은 죽을 때까지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경시했던 한인들이 몽골정복사에서 가장 강경한 적수가 되고, 가장 씹기 힘든 뼈다귀가 될 줄은.

 

징기스칸의 사후 그의 아들 오코타이칸은 징기스칸이 죽기 전에 세워둔 전략대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때가 1234년이다. 다음 해, 오코타이는 제2차 서정을 발동하여, 다뉴브강까지 치고 들어간다. 동시에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남송을 공격한다. 동로는 양번, 강회를 공격하고, 서로는 사천을 공격한다.

 

몽골군은 송나라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다음해 서, 동 양로군은 각각 양평관과 양양이라는 두 곳의 전략요충지를 점령한다. 몽골군은 호북에서 강을 따라 집결하여, 장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 남송은 대장 맹공을 보내어 구원한다. 맹공은 금방 몽골의 24채를 연파하고, 강릉대첩을 거두어, 몽골군의 도강을 막아내고, 몽골군대의 백전백승의 신화를 일거에 타파한다.

 

그후 몇년간 송군은 맹공의 지휘하에 몽골군과 참혹한 공방전을 펼친다. 쌍방은 고하를 가리기 어려웠다. 1239년이 되어, 대장 두고가 여주(지금의 합비)에서 몽골의 동로주력군을 대파한다. 몽골동로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철수하게 된다. 맹공은 반격으로 돌아서, 몽골군대를 연파한다. 양번의 여러군과 신양을 수복하여 기본적으로 몽골대군의 동로에서의 남송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 1240년초, 용맹한 맹공은 다시 서로 몽골군을 대파하고, 대아채 대첩을 거두어, 기주를 수복한다. 양로에서 남송을 포위공격하려던 몽골군대는 전면적으로 좌절하게 된다. 1241년, 몽골칸 오코타이가 병사하고, 서로 몽골군대는 사천에서 철수한다. 이에 이르러 6년에 걸친 몽골-송의 전쟁은 몽골의 실패로 끝난다. 이는 몽골정복사상 첫번째 중대한 실패였다.

 

1241년, 몽골칸 오코타이가 병사한 후, 아들 구육이 칸의 지위를 승계한다. 그러나 2년후에 그도 죽는다. 이 기간동안, 몽골군은 사천을 침범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남송의 대장 여개에게 격패당한다. 1251년, 툴루이 의 아들 몽케가 몽골칸의 지위에 오른다. 그는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 대한 제3차서정을 발동시킨다. 동시에 남송으로 대거 진공한다. 장강의 천험을 피하기 위하여, 우회포위전술을 채택한다. 쿠빌라이는 10만대군을 이끌고 대리국을 급습하고, 대리국의 마지막 군주인 단흥지(段興智)를 포로로 잡는다. 이때 남송은 이미 몽골군대에 포위를 당하게 된다. 불행한 것은, 남송의 항몽명장 맹공, 두고가 그 전에 차례로 병사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제2차 몽골-송전쟁이 시작된다. 몽골대군은 삼로로 나누어, 중로군은 몽골칸 몽케가 직접 지휘하여 사천으로 남하하며 중경으로 진격했다. 남로군은 운남에서 출발하여, 광서를 거쳐 장사로 진격한다. 북로군은 쿠빌라이가 지휘하여, 악주(지금의 무한)로 진격한다. 삼로군은 악주에서 회합할 계획이었다. 그 후에 강을 따라 동진하여 임안을 취하고 남송을 멸망시키고자 하였다.

 

칸 몽케가 이끄는 중로군은 일거에 성도를 함락시킨다. 그후 송군은 계속 패퇴한다. 사천의 대부분을 잃는다. 몽골군은 가릉강을 따라 남하한다. 그런데, 합주에서 수비장수 왕견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그후, 쌍방은 합주에서 격렬한 공방전을 펼치며, 몇 달동안 대치한다. 몽골군은 계속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진 몽케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성에 참가한ㄴ다. 그런데, 석포에 명중당해서 군영에서 사망한다. 중로군은 사기가 떨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게 ㄷ된다.

 

쿠빌라이가 이끄는 북로군도 악주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하루빨리 되돌아가서 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마침 남송의 권신 가사도(賈似道)가 조정의 중론에 배치되게 몽골군과 의화(議和)를 한다. 이것은 쿠빌라이가 바라던 바이다. 1260년, 남송에 침입한 모든 몽골군을 물러간다. 제2차 몽골-송전쟁은 몽골칸 몽케의 죽음으로 삼로군이 모두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끝이 난다. 

 

몽골칸 몽케가 합주에서 전사한 후, 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리부케는 칸의 자리를 놓고 싸웠다. 1260년, 급히 악주 전선에서 돌아온 쿠빌라이는 그의 동생 아리부케와 각각 개평(開平)과 몽골국의 수도 화림(和林)에서 칸으 자리에 오른다. 쌍방은 이때부터 4년에 걸쳐 내전을 벌인다. 1262년, 산동을 장악한 한족군벌 이단(李檀)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남송과 연결하여, 몽골의 국세가 일시에 아주 혼란스럽게 된다.

 

하늘이 내린 영재인 쿠빌라이는 금방 이단의 반란을 평정한다. 그리고 1264년에는 아리부케를 철저히 격파한다. 이로써 4년에 걸친 내란은 종결된다. 그리고 다시 남송을 향하여 칼을 간다. 남송은, 몽골내란을 이용하여 자신을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가사도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충신과 간신이 구분되지 않으며, 군정은 날로 부패한다. 이때 매우 불행한 일이 하나 벌어지는데, 남송 사천의 수비장수인 유정이 몽골에 투항한 것이다. 그가 이끌던 수군은 당연히 몽골에 귀속된다.

 

1268년, 몽골은 아술(阿術)을 주장으로 하고, 유정을 부장으로 하여, 몽골군대와 몽골에 항복한 남송수군을 이끌고 양번을 공격한다. 몽골군은 번성을 중점적으로 공격한다. 각종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사천에서 병력을 증원해준다. 양번의 두 성은 압력이 더욱 커졌다. 1272년이 되어 양번은 이미 포위공격을 받은지 5년이 되었다. 양식도 기본적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양성의 군민은 여전히 투지가 대단했다. 원나라병사들은 시종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남송의 대장 이정지는 장귀, 장순으로 하여금 삼천의 사병을 이끌고, 성내에 필요한 물자를 가져가게 한다. 이들은 원나라군대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돌파하고 양양으로 들어간다. 이는 5년동안 처음 양양으로 들어온 구원병이었다. 이는 온 성의 군민의 사기를 드높이게 된다.

 

그후, 양양의 송군은 바깥의 송군과 연계하여 쌍방은 공동으로 원군을 합공하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반도가 원나라에 투항하여 이 계획을 누설한다. 그리하여 양양의 송군은 원나라군대의 매복에 당하여 손실이 참혹했다. 그후 다시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다. 1273년, 원군은 마침내 번성을 함락시킨다. 수비장수 범천순, 우부는 자살한다. 양양은 고립무원이 되고, 수비장수 여문환은 원나라에 투항한다. 6년에 걸친 양번보위전은 양번의 함락으로 끝이 난다. 남송의 대문은 활짝 열린 것이다.

 

1274년, 쿠빌라이는 원나라군대에 한강을 따라 장강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간다. 가는 길의 남송군대는 속속 투항한다. 1276년, 원나라군대가 임안성에 도달한다. 사태후와 송공종은 성을 열고 나와서 투항한다. 남송의 명은 이때 끝이 난다. 송공종이 투항한 후, 남송의 잔여세력은 각지에서 저항을 계속한다. 대장 이정지는 양주를 굳게 지켰고, 육수부, 장세걸은 복주에서 단종을 황제로 세우고, 문천상은 강서일대에서 반원세력을 결집시켜 적지 않은 성을 장악한다.

 

이정지, 문천상은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히나 원나라에 투항하지 않아 모두 피살당한다. 남송의 조정은 광동연해에서 끝까지 항거한다. 1279년 원군은 애산에서 마지막 결전을 전개한다. 육수부는 포로로 잡히지 않고자, 눈물을 머금고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닷물로 뛰어든다. 나머지 송군과 관리들도 바다로 몸을 던져 순국한다. 여기에 이르러 남송은 철저히 멸망한다.

 

남송의 몽골에 대한 항거는 50여년이 된다. 몽골인들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큰 댓가를 치른다. 몽골인들이 가장 씹기 힘든 '뼈다귀'였음에 틀림없다. 남송보다 강대했던 금나라는 30년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일본이야말로 몽골이 가장 씹기 힘들었던 '뼈다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몽골이 일본침입에 실패한 주요원인은 태풍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이 몽골에 항거한 기간은 아주 짧다. 몽골인들도 전력을 다하여 일본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은 몽골과 싸운 기간도 길고, 치열하게 싸운 전투도 많았던 남송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